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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숙빈> 책 표지
 <최숙빈> 책 표지
ⓒ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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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국사 시간이었다.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을 설명하기 전에 선생님은 영조의 출생 이야기부터 하셨다. 장 희빈이 중전이 된 후 숙종은 폐서인이 된 인현왕후 민씨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인현왕후의 생일상을 차려 혼자서 축하하고 있던 무수리 하나를 만났고, 그와의 사이에서 영조가 태어났다. 영조는 어머니의 천한 신분으로 인해 혈통 콤플렉스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에 사도세자를 압박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하셨다.

내가 처음 들은 숙빈 최씨의 이야기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과 관련된 스쳐지나가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때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장 희빈을 다룬 사극에도 항상 무수리라고 나왔기에 이에 대해 특별히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도 이 시기를 다룰 때면, 지루해하는 아이들에게 무수리인 숙빈 최씨의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며칠 전 숙빈 최씨의 일대기를 다룬 <최숙빈>을 읽고 그동안 내가 저지른 역사 왜곡에 대해 심각하게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숙빈 최씨를 역사적으로 고증한 책, <최숙빈>

드라마 <동이> 속 최 숙빈 모습.
 드라마 <동이> 속 최 숙빈 모습.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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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역사 연구서 <최숙빈>이 출판됐다. <오마이뉴스>에 '사극으로 역사 읽기'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는 김종성 기자의 작품이다. 비교적 평이하고 쉽게 서술하고 있어 역사에 관심있는 일반 대중들이 읽기에도 좋다.
이 책을 읽고 세 가지 면에서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첫째는 숙빈 최씨가 무수리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었고, 둘째는 궁녀의 대부분이 천민이었다는 사실이었으며, 셋째는 숙종 대 여인천하의 대결구도는 장 희빈 대 인현왕후가 아니라 장 희빈 대 최 숙빈이었다는 주장이다.

고등학교 때 무수리 출신 최 숙빈 이야기를 들은 이후 한 번도 그 사실여부를 의심도 하지 않았고 검증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내가 읽어본 많은 글도 그랬던 것을 보면 의심하지 않은 이가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저자는 많은 이들과 달리 여러 자료, 사료들을 통해 이 사실에 대한 검증에 나섰다.

이 작업을 통해 저자 김종성이 내린 결론은 숙빈 최씨의 무수리 출신설은 구전되는 이야기일 뿐 명확한 사료적 근거는 없다는 것이었다. 숙빈 최씨가 가난한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고, 입궁당시 노비 신세인 고아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무수리였는지 일반 궁녀였는지를 명확히 확증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현실적으로 최 숙빈은 일반 궁녀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고 있다.

숙빈 최씨가 일반 궁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 또 다른 이유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궁녀들을 천민 중에서 선발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것이 내게는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다. '임금의 후궁이 되지 못하더라도 상궁이 되면 정5품의 품계까지 받는 궁녀들이 어떻게 천한 노비 출신이라는 것일까?', '저자가 뭔가 착각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저자가 여러 사료적 근거를 들어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것을 따라가 보니, 궁녀는 일반 양인이 아닌 천민 중에서 선발했다는 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굶어서 죽어가는 상황이 아니라면, 임금의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고, 결혼도 하지 못하면서, 고된 노동에 시달릴 것은 뻔한 궁녀를 기꺼이 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저자는 숙빈 최씨를 '조선판 신데렐라'로 평가하고 있다. 노비의 자리에서 왕의 어머니로까지 신분 상승을 이루었고, 얻은 것도 딱히 없이 희대의 악녀 이미지만 남기고 만 장 희빈과 달리, 얻을 것은 다 얻었으면서도 좋은 이미지까지 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숙빈 최씨는 누구보다도 매력을 지닌, 연구해 볼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장 희빈 vs. 인현왕후 아닌 장 희빈 vs. 최 숙빈

드라마 <동이> 속 장 희빈.
 드라마 <동이> 속 장 희빈.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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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숙종시대 여인천하의 대결 구도를 사극 <장희빈>에서 항상 보던 장 희빈-인현왕후 구도가 아니라 장 희빈-최 숙빈 구도라고 보고 있다.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가 서로 대립하고 치열하게 싸운 것은 사실이지만, 상대방 제거라는 마지막 선을 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장 희빈-최 숙빈 대결구도는 희빈 장씨가 사사되는 것으로 끝장을 보고야 만다. 이 두 사람의 대결이야 말로 진정 치열하고 목숨을 건 대결이었던 것이다.
장 희빈과 관련된 거의 모든 사극과 이야기들은 장 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중전이 죽었고, 장 희빈은 그 죄로 사약을 받았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저자는 사료 고증을 통해 장 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명확한 사료적 증거는 없으며, 그렇다고 말한 최 숙빈의 주장으로 인해 장 희빈이 사사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목숨까지 건 대결이었기에 장 희빈과 최 숙빈의 대립이 '숙종 대 여인천하'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한 저자의 주장이 흥미롭다.

더불어 숙빈 최씨가 서인에게 이용을 당한 존재가 아니라 서인을 이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튼튼히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까지 올렸다는 주장 역시 매우 흥미로운 지적이다.

저자는 책의 제목을 <숙빈 최씨>로 잡을까 고민하다가 최종적으로 <최숙빈>으로 잡았다.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장 희빈'이라는 이름에 대응하는 명칭이기도 했고, 장 희빈의 진정한 상대였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최숙빈>은 드라마로, 영화로 혹은 정통 역사 연구로 수십 수백 번은 소비된 장 희빈과 달리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숙빈 최씨를 연구한 역사 서적이기에 신선하다. 또 사료 고증을 통해 역사적 인물을 추적한 연구서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아 반갑다. 숙종시대 붕당 간 갈등과 붕당과 연결된 여인들의 행적 및 관계에 관심이 있다면 일독을 권한다.


최숙빈 - 숙종시대 여인천하를 평정한 조선 최고의 신데렐라 숙빈 최씨

김종성 지음, 부키(2010)


태그:#최숙빈, #숙빈 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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