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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의 학원에서 영어 공부에 여념이 없는 한국 유학생들. 최근 호주정부의 비자심사 취소조치에 많은 기술이민 유학생들이 패닉에 빠져있다.
 시드니의 학원에서 영어 공부에 여념이 없는 한국 유학생들. 최근 호주정부의 비자심사 취소조치에 많은 기술이민 유학생들이 패닉에 빠져있다.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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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경 하나.
2월 15일 저녁, 한인밀집거주지역인 스트라스필드에 거주하는 한인동포 박훈종(56)씨 집에서 유학생 최성강(27)씨를 위한 송별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는 군 만기제대 후 한국의 높은 청년실업률에 지레 겁을 먹고 호주 유학을 결행했다.

2년 가까이 요리기술학교에서 공부한 성강씨는 이미 요리사 자격증을 획득한 상태였다. 그러나 호주 이민부의 2월 8일 특별조치로 힘들게 취득한 요리사 자격증도 무용지물이 됐다고 판단하고 귀국을 결심했다. 아들 친구인 성강씨의 얘기를 듣고 있던 박씨는 크게 화를 냈다.

그는 "호주 정부가 유학생을 이용해서 사기를 친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유학생 한 명당 유학비용이 연간 5만 호주달러(약 5천만 원) 정도인 걸로 아는데, 그 많은 돈과 몇 년이라는 시간을 어디에서 보상받으란 말인가?"라며 언성을 높였다. 박씨 집에서는 그다음 주에도 비슷한 송별회가 열렸다.

#풍경 둘.
3월 9일 오전, 호주 연방이민부 파라마타지부 앞에서 유학생 최아무개씨(제과제빵사)를 만났다. 그는 이민부 직원과의 상담결과가 별로 좋지 않았는지 어깨가 축 처진 모습으로 "모든 게 합법이랍니다. 이민부 장관은 호주 이민법에 명시된 권한을 행사했을 뿐이라고 하네요. 그럼 이민부의 정책만 철석같이 믿고 2년, 3년씩 엄청난 돈을 들여서 유학한 우리는 뭡니까?"라고 반문했다.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최씨는 아주 격앙된 목소리로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터트렸다. "좋습니다. 합법이라고 인정해줍시다. 그렇다면 호주 정부가 합법적으로 사기를 친 겁니다. 한국 정부는 강 건너, 아니 바다 건너 불구경이나 하는 거고요."

그는 이어서 "한인동포 공청회장에서도 한 변호사가 이민부 장관의 조치는 합법이라고 말했습니다. 호주 정부가 이런 식으로 합법적인 사기를 치는데 국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할 한국 정부, 대사관, 총영사관은 왜 꿀 먹은 벙어리인가요?"라며 울분을 토로했다.

"오페라하우스 구경하는데 수천만 원 썼다"

시드니 물항(港)에 떠있는 오페라하우스와 호주대륙에만 서식하는 캥거루 등을 구경하기 위해서 연간 수백만 명의 해외관광객들이 호주를 찾는다. 그들이 지출하는 여행경비는 개인의 선택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최근 일부 유학생들이 "나는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리지를 구경하는데 수천만 원을 썼다"고 투덜거린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은 "호주 이민부가 제시한 '영주권 비자 사탕발림'에 속아서 젊음을 허비하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며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지난 2월 8일 크리스 에반스 이민부 장관이 "2007년 9월 이전에 경력, 학력, 나이 등을 바탕으로 기술이민을 신청한 외국인 2만 명에 대한 비자심사를 취소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서 "미용, 요리, 제과제빵 등 단순 기술직에 대해 부여해온 우대점수 제도를 폐지한다"고 덧붙였다.

해당 유학생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특단의 조치였다. 그렇다고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갈 수도 없고, 뾰족한 향후 대책도 없이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처지가 된 것.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인동포들과 유학생들은 공청회를 열기도 했다.

'호주는 기술직이 필요하다'며 기술이민을 독력하고 있는 이민부 웹사이트.
 '호주는 기술직이 필요하다'며 기술이민을 독력하고 있는 이민부 웹사이트.
ⓒ 호주이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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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 후 기술이민'이 도대체 뭐기에?

호주 연방이민부가 발급하는 영주권 비자를 크게 분류하면 기술이민, 취업이민(457비자), 사업/투자이민(1차, 2차), 가족이민, 기타이민 등이 있다. 또한 어떤 형태로든 호주로의 이민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영주권 비자 신청을 한 다음 이민부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호주는 그 심사기준으로 점수제도(points test)를 적용한다. 예를 들면 나이 점수, 직업군 점수, 영어 점수, 경력 점수, 보너스 점수 등으로 별도 채점을 한 다음, 그걸 합산한 종합점수가 합격선 이상일 경우에만 영주권 비자를 발급하는 방식이다.

호주에 친척이 있으면 합격점수가 100점이지만, 순수한 독립기술이민의 경우 커트라인이 120점이기 때문에 합격점수를 얻는 게 마치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다. 그러나 10여 년 전부터 통칭 '유학 후 기술이민'이라는 방식이 시행되면서 사정이 크게 달라졌다.

호주로 유학 와서 단순 기술직인 요리, 미용, 제빵 등을 공부하고 정해진 실습기간을 거치면 무려 15점의 가산점을 주는 제도. 그러다 보니 호주로 유학을 와서 공부를 마친 다음 영주권 비자를 신청하겠다는 유학생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점수제도의 덫에 걸린 유학생들

호주 이민부가 발표하는 부족직업군 리스트(MODL, Migration Occupations in Demand)가 있다. 일자리는 많은데 일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직업군이다. 거기에 요리, 미용, 제빵 등의 직종이 포함되어 나이가 많아 나이 점수가 낮거나 영어 점수가 낮은 유학생들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런데 MODL 가산점을 얻으려면 호주에 2년 이상 유학한 다음 6개월 안에 영주권 비자 신청을 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그러자 요리, 미용, 제빵 등을 가르치는 사설 기술학교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질 낮은 교육으로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더욱이 학교를 졸업하면서 요리사, 미용사, 제빵사 등의 자격증을 얻었지만 영어능력 부족으로 전공분야에서 취업을 못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그러자 이민부는 2007년 9월부터 기술이민의 국제영어능력평가시험(IELTS ; International English Language Testing System) 점수를 5점(vocational)에서 6점(competent)으로 상향조정했다.

비교적 영어에 약점을 보이는 아시아권 유학생들이 불리해진 것.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2월 8일에 독립기술이민 카테고리에서 요리, 미용, 제빵 등을 부족직업군에서 제외하자 상황이 더 나빠졌다. 5점, 10점 차이로 합격 여부가 판가름나는 상황에서 15점이 사라졌으니, 호주 기술이민은 또 다시 '하늘의 별 따기'로 회귀하고 말았다.

지난 7일 시드니에서 열린 독립기술이민 관련 한인 공청회 모습.
 지난 7일 시드니에서 열린 독립기술이민 관련 한인 공청회 모습.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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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또 다시 나를 울리다니..."

지난 10년 동안 '유학 후 기술이민' 방식으로 기술이민 영주권이 양산되자 호주 언론은 급조된 기술학교를 일컬어 '영주권 제조공장'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럼에도 비영어권 출신 유학생들은 '그놈의 영어' 때문에 여전히 애를 태워야만 했다.

요리, 미용, 제빵, 회계 등을 열심히 공부해서 일정한 자격증을 얻어도 이민부가 제시하는 IELTS 5점, 6점을 얻는 게 생각처럼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대부분의 아시아계 유학생들은 기술학교와 영어학원을 동시에 다녀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아시아계 유학생들은 강한 불만을 토로한다. 태생적으로 영어권 국가 출신 유학생들보다 불리할 수밖에 없는데, 호주 이민부가 자꾸 영어 점수 반영 비율을 높여서 아까운 세월만 허비한다는 것. 그래서 중국 언론에서는 "호주가 아시아 이민자 쿼터를 조정하면서 영어 점수 반영률을 악용한다"고 꼬집었다.

최근 "그놈의 영어 때문에..."라며 한국으로 돌아가는 유학생이 급증했다. 반면에 앞으로의 추이를 다 지켜보겠다는 한 유학생은 "요즘 1주일에 한두 번씩 송별회를 한다"면서 "대부분 호주정부에 사기당한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강하게 성토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겠냐?"고 반문했다.

"호주 이민부의 조치는 인권침해 수준"

지난 7일(일) 오후 7시,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독립기술이민 관련 한인 공청회'에 참가한 정영란(35)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정씨는 "이민이 궁극적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관계라는 측면에서 더 없이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사기행위"라며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정영란씨는 영주권 비자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2년 남짓 요리기술학교에 다니면서 요리를 배우고 음식점에서 실무경험을 쌓는 중이다. 아울러 이민부에서 요구하는 영어점수 6점(competent)을 얻기 위해서 영어공부도 병행하고 있다. 거기에 드는 비용은 1년 학비 약 3만 호주달러(약 3천만 원)에 생활비, 교통비 등 만만치 않은 액수다.

한편 한국에서 수학강사로 활동했던 정씨는 "한국에서 닦아놓은 기반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과정에 날벼락을 맞았다"면서 "난 아이가 없어서 조금 낫지만, 주변에 자녀 둘 셋을 둔 경우는 가족 전체가 위기를 맞는다는 측면에서 가히 인권침해 수준"이라고 강하게 성토했다.

이날 열린 '독립기술이민 관련 공청회'는 호주동포사회의 대표적 진보운동단체인 <시드니민족교육문화원>과 <평화연대>, 그리고 <시드니한인회>가 공동으로 주관하여, 김병기 <시드니민족교육원> 이사, 정동철 변호사, 정영란 유학생 대표 순으로 주제발표를 했다.

한 유학생 참석자가 공청회장에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한 유학생 참석자가 공청회장에서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 윤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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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 대사관, 총영사관은 왜 아무 말 없는가?"

김병기 이사는 "호주가 석탄-철광-유학사업 순으로 외화를 벌어들이면서 호주답지 않은 비도덕적인 조치를 단행했다"면서 "일사부재리법이 엄연히 존재하는 호주에서 현재 2~3년 동안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들에게 불리한 법을 소급 적용시킨 것은 인도주의에도 반한다"고 성토했다.

정동철 변호사는 "1958년에 제정된 호주 이민법은 재량권이 크게 작용하는 법이어서 이민부장관이 이민법 39조에 의거하여 이민쿼터를 재량껏 조정할 수 있다"면서 "부디 이번 조치가 완결편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이민부장관의 2월 8일 선언이 합법이라는 걸 인정하면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한편 공청회 준비를 위해 동서 분주했던 <노동자그린카드교육> 강병조 강사는 "한인동포나 유학생이나 분통 터지는 것은 똑같다"면서 "그러나 실질적인 대응 차원에서, 현재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들이 소급해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이민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자"고 제안했다.

공청회 종료 후에 회의장 밖으로 나가던 한 유학생은 "공청회 결론이 조금 밍밍하다"는 실망감을 나타내면서 "유학생 문제 전반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중국, 인도 정부와는 달리 대한민국 정부는 왜 항의조차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공청회 도중에도 비슷한 발언이 나왔다. 끝내 대한민국 외교관의 모습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대사관과 총영사관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며 "이민부 관계자와의 전화통화는 물론이고 미팅도 가졌으며, 지금도 대화를 계속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태그:#호주 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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