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제주도에는 360여개의 오름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몇 개나 올랐을까? 세어 보려다 이내 '말어라~' 한다. 그랬다가는 괜히 더 많은 오름을 올라야겠다는 욕심이 생길 것만 같아서이다. 그 많은 갯수만큼이나 각양각색으로 저마다 제 빛깔을 지니고 있는 오름은 사람을 끄는 매력을 지녔다.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오름을 오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다랑쉬' 같은 이름난 오름은 등산화에 밟히고 미끌린 흙이 무너져 내려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한다. 오름의 표면은 붉은 흙인 경우가 꽤 된다. 이런 흙 또는 돌을 송이, 스코리아라고 하는데 나무보다는 풀들로 이루어진 연약한 오름을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리니 붉은 살갗이 드러나고 벗겨지고 마는 것이다.

 

어떤 이는 '제주도 사람들은 오름에서 나고 오름에 묻힌다'고 말한다. 처음과 끝, '알파요 오메가'이니 그 만큼 삶과 가깝다는 뜻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오름들이 곳곳에 분포되어 있어서 제주도 어디에 있든 오름은 눈 안에 있게 된다.

 

이제 도들오름을 오른다. 오름은 제주시의 서쪽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 바닷가에 있는 사라봉과 여러모로 대구를 이루는 오름이다. 제주 시내에 더 가까운 사라봉은 예전부터 사람들이 자주 찾는 오름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끊임없이 사람이 드나드는 이 사라봉은 도들오름보다 한참 더 크다. 

 

운동과는 담을 쌓은 나같은 사람은 계단으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도 뻐근하고 숨이 차 온다. 사실 정상까지 오르는데는 마음만 먹으면 5분이면 충분하다. 아니, 3분이면 될 듯하다. 그만큼 조그만 오름이다.

 

산책로가 생겼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편안히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나무를 베어내고 그 위에 죽인 나무, 흔히 말하는 '데크'로 넓은 길을 놓은 것에 대해서는 실망할 수밖에 없다.

 

그다지 크지 않은 오름에 산책로는 폭이 너무 넓다. 걷는 입장에서야 편안하겠지만, 길이 면적을 더 차지하려면 길보다 더 넓은 면적을 도려내야 한다. 도려낸 자리에 있던 진짜 주인인 나무는 여지없이 베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섬의 머리와 같다고 붙인 한자 이름인 '도두봉' 자체로도 뜻이 이루어지지만, 고유한 토박이 제주말로 된 이름이 모두 존재하는 것을 보면 도들오름이 먼저로 봄이 타당하다. '도두리'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앞에 붙은 '도'는 그 의미가 불분명하나 둥글다는 뜻의 '두리(圓)'라고 오창명은 보고 있다.

 

어쨌든 '도들오름'은 도드라지게 솟아 있다는 뜻이 되는데 꼭대기에 올라 주변을 바라보면 더욱 수긍이 간다. 눈앞에 펼쳐진 평지가 좁지 않다. 그곳에서 보면 이 오름이 유난히 도드라져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새로 뽑은 길을 무시하고 굳이 돌계단길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 길 따라 심어놓은 나무들 때문이다. 나무는 동백나무와 돈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그보다 키가 큰 소나무(아마, 해송일 것이다)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는 길. 이 길 위에다 검붉고, 붉노랗고, 검누런 물이 든다. 동백꽃, 돈나무열매, 솔잎이 떨어져 만든 작품이다. 벚나무들도 있어 봄을 장식할 채비를 하고 있다.

 

돈나무의 원래 이름은 '똥나무'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뿌리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뿌리를 태우면 냄새가 더 심해진다'고 적고 있다. 이 냄새 때문에 '똥낭'이라고 하나 보다. 똥나무가 돈나무로 된 배경에는 일본말 때문이라고 전한다. 때는 일제강점기, 제주도 식물을 연구하는 일본 사람이 처음 보는 나무를 살펴보다가 마침 지나가던 어르신에게 묻는다.

 

"이 나무가 무슨 나무 데스까?"

"그거 똥낭이주."

"(멀뚱~) 무슨 말인지 모르겠스므니다."

"똥낭! 똥.나.무!"

"아, 돈나무!"

"아니, 돈나무가 아니고 똥. 나무."

"하이, 돈.나.무"

"허,참! 모슴냥 허라게(마음대로 해라), 나 가키여(나, 갈래)"

 

아마 이랬을 것 같다. 나라 잃은 설움은 이런 데까지 미치고 있는데 무슨 큰 도움을 받은 양 이야기하는 사람들 머리 속에 돈만 들었을 것이다. 돈나무, 처음 듣는 사람은 이름이 너무 좋다고 웃다가 원래 이름을 말해주면 실망하는 기색을 보인다.

 

똥꿈을 꾸면 재수가 좋을 것이고, 첫차가 똥차이면 또 재수가 좋을 것이니, 똥나무는 돈나무보다 만 배는 좋은 이름이다. 똥낭이 한 해 정성들여 만들어낸 열매는 동백 열매처럼 세 갈래로 쩍 벌어진다. 그 속에는 쫄깃해보이는 질감의 선홍빛 씨앗 여럿이 앙증맞게 앉아 있다.

 

길을 두고 왼쪽엔 무교식 신당인 '오름허릿당'이, 오른쪽에는 유교식 제단인 '포제단'이 놓여 있다. 길 초입에는 불교식인 '관음정사'가 있으니 없을 건 없고 있을 모두 있다는 '화개장터' 노래가 떠오른다.

 

 

길 중간쯤에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경상도에서 온 사람들이다.

 

"산에 이런 무덤은 연유가 어찌됩니까?"

 

아마도 오름에 많은 무덤이 자리하고 있는 게 신기한 모양이다.

 

"오름 주변 마을 사람들이 가까운 오름에 묘를 조성하는 겁니다. 제주도 오름을 더 다녀보시면 여러 곳이 이렇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사실 그렇다. 동쪽 김녕 지경에 있는 삿갓오름(입산봉)에는 수많은 무덤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오름 하나를 아예 공동묘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기이한 풍경을 연출하는 오름의 무덤은, 앞서 말한 '제주도 사람들은 오름에서 나고 오름에 묻힌다'는 것을 몸소 증명하고 있다.

 

"이야, 제주도가 조그만 줄로만 알았더니 꽤 넓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소싯적에 주고 받은 농담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말이야. 한라산 꼭대기에서 공을 차면 그 공이 바다에 풍덩 떨어진단다'라고 말하면 제주도 구경을 못 해 본 사람은 속아 넘어간다는 이야기. 또 이런 얘기도 있다. '얘야, 비행기 탈 적에는 꼭 신발을 벗어서 신발장에다 놓고 자리에 앉아야 하느니라.'

 

경상도 어딘가에서 온 그 어르신은 오름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에 감탄한 것이 분명하다. 꼭대기에 다다르면 두 팔을 벌리고 앉아 있는 이른바 '산북', 한라산의 북쪽 지대를 꼼꼼하게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새는 날이 흐려서 한라산과 오름들이 이루는 어여쁜 선을 감상하기 쉽지 않아 아쉽지만 발 아래 펼쳐지는 너른 땅은 가슴을 시원하게 만든다. 제주국제공항이 다져놓은 넓고 긴 활주로도 이 때만큼은 시원한 풍경에 일조한다. 장난감처럼 조그만 비행기들이 '돌돌돌~' 바퀴를 굴려 움직이는 모습도 재미를 준다.

 

 

그리고 이번엔 반대쪽으로 가 본다. 바다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그어진 수평선, 그 바다 위를 유유자적 떠다니는 듯 보이는 배들. 여기까지의 과정을 텔레비전 만화영화 <미래소년 코난>처럼 잽싸게 뛰어올라 꼭대기에서 숨을 할딱거리며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으로 바꿔놓아 본다. 하지만, 나는 마음만 그럴 뿐인 걸 잘 안다. 내 몸은 그저 걷기만을 바라나니.

 

도로 내려가려는데 저쪽 다른 길에서 오르는 사람들이 보인다. 흥이 났는지 노래를 부른다.

 

"비내리는 호남선 남행열차에~~"

 

속으로 따라 부르며 내려 오는 길.

 

 

오름허릿당 옆으로 빼놓은 길을 따라 내려가면 도두항이 나온다. 이리로 내려오는 이유가 또 있다. 황토색의 돌들이 해안에 있기 때문이다. 응회암이라고 부르는 이 돌들은 오름의 절벽 일부를 이루기도 하고 바다위에도 솟아 있다. 절벽이 된 응회암은 현무암의 오름과 경사를 이루며 만나는데 그 모습이 신비하다.

 

이런 황토색 응회암층은 서쪽 고산 지경, 수월봉에서도 만날 수 있다. 방파제와 접한 곳의 응회암 돌들은 사암을 깎아 집을 지어 마을을 형성한 사막지대의 어느 풍경을 축소하여 놓은 듯하다. 이 곳에 와 어슬렁 거리노라면 마치 거인 '걸리버'가 된 듯한 느낌이 들곤한다.

 

 

그 곁 절벽가에 '소득모실'이란 표석이 있어 다가가 본다. 자연석 하나를 옆에 모신 '해신당'이다. 바닷일을 하는 사람들이 안전과 풍어를 비는 곳인데, 원래는 저쪽에 있던 것을 여기로 옮겨왔다고 전한다.

 

 

이 오름에서 바라보는 일몰도 꽤나 운치가 있다. 해질 무렵에 오름을 둘러보고 난 뒤, 도두항 잔잔한 물 위로 햇살이 잠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평온하게 하루를 되새겨 보는 것도 괜찮을 법한 일이다.

 

덧붙이는 글 | *그밖에 이 오름에는 일제강점기 때 파놓은 갱도가 네 곳이 있고, 자연히 형성된 굴(궤)이 두 군데가 있어 굿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태그:#도들오름, #도두봉, #제주여행, #제주도, #제주도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