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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7> 리포터가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벌어진 5200명 누드 촬영을 보도하고 있다.
 <채널7> 리포터가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벌어진 5200명 누드 촬영을 보도하고 있다.
ⓒ <채널7>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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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의 가을은 3월 1일에 시작된다. 호주의 아이콘 오페라하우스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깃들었다. 1번 부두를 지나서 오페라하우스 광장 쪽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차가운 바닷바람 때문에 조금씩 웅크린 모습이었다.

잠시 후, 그곳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먼동 무렵의 꼭두새벽에 5200명의 '인간 군상'이 동시에 나체가 된 것. 어린이, 임산부, 노인 등 연령층도 다양했고 목수, 간호사, 정치인, 학생, 박사 등 직업도 천차만별이었다. 노숙자와 백만장자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대형 누드사진을 통해서 현대인의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싶어 하는 미국 사진작가 스펜서 튜닉의 작가정신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오페라하우스에서 옷을 벗은 것이다. 그들은 아무런 보수도 없이 기꺼이 누드모델로 나섰다.

여기까지는 사진예술을 위한 대형 이벤트였다. 그런데 시청률 1, 2위를 다투는 <채널7>과 <채널9>이 중간에 끼어들어 대형 방송사고를 쳤다. 기상캐스터가 완전나체의 모습으로 화면에 등장했고, 모델로 참여했던 한 남성이 갑자기 정면누드 자세를 취해 여성 진행자가 비명을 지르는 사태가 벌어진 것.

<시드니모닝헤럴드> 연예부장도 누드모델로

왜 그런 일들이 발생했을까? 궁금하던 차에, 때마침 호주 최고의 정론지로 인정받는 <시드니모닝헤럴드> 크리스 도브니 온라인 연예부장이 누드모델로 직접 참가했던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 얘기를 1인칭 화법으로 옮기면 이렇다.

대중 앞에서 나체가 된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새벽 4시에 친구와 함께 꿈을 꾸듯이 시내로 달려갔다. 오페라하우스 근처에 도착해보니 많은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노부부가 언덕 위에서 걸어오는가 하면 젊은 여성이 혼자 차에서 내리는 모습도 보였다.

오페라하우스에 도착해서 옷을 비닐봉지에 담아 지정된 장소에 맡긴 다음 우리의 임무가 시작됐다. 런던해롯백화점, 에펠탑, 바티칸광장 등에서 대형 누드사진을 찍어 유명해진 스펜서 튜닉이 지시하는 대로 포즈를 취하는 것.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는 게 우리의 첫 번째  임무였다.

튜닉의 지시에 따라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어느 젊은 커플의 대화를 엿들었다. 20대 중반쯤의 여성이 "초현실의 세계로 와서 꿈을 꾸는 것 같다"고 말하자, 남자친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라고? 나는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 같은데"라고.

<채널7> 기상캐스터가 나체촬영에 참여하기 위해 옷을 벗고 참가자들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채널7> 기상캐스터가 나체촬영에 참여하기 위해 옷을 벗고 참가자들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 데일리텔레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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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우면 옆에 있는 사람하고 껴안고 키스하세요!"

"나는 세계 최고의 사진작가는 아니지만 예술가이고 완전주의자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스펜서 튜닉은 메가폰을 이용해서 끊임없이 주문사항을 전달했다. 예닐곱 커트를 찍었을 때쯤 그가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파트너와 함께 온 사람은 파트너와 키스하고, 친구와 함께 왔으면 친구하고 키스 하세요. 혹시 혼자 오신 분은 옆 사람과 키스하면 됩니다. 그리고 서로 껴안으세요. 지금 바닷바람이 불어서 무척 추운데, 그건 우연이 아니고 대자연이 우리가 하나 되도록 명령하는 겁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둥켜안고 키스를 시작했다. 문득 5200명의 군중 속에서 나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짝을 찾을 요량으로 몇 계단 올라가니 거기에 나와 처지가 비슷한 노인이 있었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금방 세상이 따뜻해졌다.

1시간 30분 정도의 촬영이 끝난 후에 추위에 떨었던 사람들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옷을 입으니까 따뜻해서 좋기는 한데, 왠지 즐거움이 너무 빨리 사라졌다는 막연한 실망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스펜서 튜닉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어제(2월 27일) 시드니에서 열린 게이 레즈비언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서 이번 촬영이 기획됐다"면서 "그런 연유로 작품명을 '마디 그라: 더 베이스(Mardi Gras: The Base)'라고 붙였는데 예상보다 두 배가 넘는 5200명이 모델로 나서주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옷을 벗은 채 날씨를 보도하는 기상캐스터 그랜트 데니어.
 옷을 벗은 채 날씨를 보도하는 기상캐스터 그랜트 데니어.
ⓒ <채널7>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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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앞에서 갑자기 옷을 벗어버린 기상캐스터

촬영이 한참 진행되는 동안, 생중계로 아침뉴스쇼를 시청하던 시청자들은 기절초풍할 뻔 했다. <채널7>의 기상캐스터 그랜트 데니어(27)가 오페라하우스 현장에서 일기예보를 끝낸 다음 갑자기 누드모델로 참가했기 때문이다.

설마 했지만, 그의 앞에 서있던 누드모델들이 "그랜트! 그랜트! 그랜트!"를 외치자 아무 망설임 없이 옷을 다 벗어버렸다. 군중 속에서 환호성이 터졌고 스튜디오 진행자들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예정에 없었던(설정이 아닌) 방송 사고로 보였다.

문득 경쟁방송사인 <채널9>에서는 어떤 식으로 보도하는지 궁금해졌다. 채널을 돌려보니, 마찬가지로 오페라하우스 현장을 연결해서 일기예보를 진행했다. <채벌7>의 해프닝이 이미 전해졌는지 <채널9>의 기상캐스터 스티븐 제이콥도 옷 벗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이미 누드 촬영이 끝난 상태. 제이콥은 계단에서 혼자 생각에 잠겨있는 남자한테로 다가갔다. 그는 여전히 완전 누드 상태였다. 그런데 손으로 중요한 부분을 가린 채로 인터뷰에 응하던 남자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카메라를 향해서 정면으로 섰다.

스튜디오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여자 앵커 리사 윌킨슨이 비명을 질렀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방송사고였다. 그러자 공동 앵커 칼 스테파노빅이 사태를 수습할 요량으로 광고를 내보내겠다고 코멘트 했다.

생방송 도중 정면 나체를 보여 여성진행자 제시 윌킨슨이 '악' 소리 지르게 만든 장면 직후의 모습. 방송사고였다.
 생방송 도중 정면 나체를 보여 여성진행자 제시 윌킨슨이 '악' 소리 지르게 만든 장면 직후의 모습. 방송사고였다.
ⓒ <채널7>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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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방송 사고였나? 설정된 방송 사고였나?

호주의 2대 방송사에서, 그것도 같은 시간대에 방송 사고가 동시에 터진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타블로이드신문 <데일리텔레그래프> 인터넷 판과 호주 국영 abc-TV 온라인뉴스가 머리기사로 크게 보도했다.

<데일리텔레그래프>가 흥미위주의 보도였다면 abc-TV는 상업방송사들의 시청률 경쟁에 초점을 맞췄다. 그 결과, 두 기사에 달리는 댓글의 내용도 큰 차이를 보였다. 비아냥거림 일색의 <데일리텔레그래프> 댓글과는 달리 abc-TV 쪽은 사태를 우려하는 내용이 많았다.

호주 상업TV방송사들 간의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시청률 경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시청률이 높은 아침뉴스쇼와 저녁종합뉴스는 사운을 걸다시피 경쟁한다. 이번에 사고를 친 프로그램도 둘 다 아침뉴스쇼였다.

<채널7>이 나체 모델 카드로 선수를 치고나간 이유가 밴쿠버동계올림픽 독점중계권을 가진 <채널9>의 높은 시청률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일부 네티즌들이 "그런 충격요법을 써서라도 시청자를 빼앗아오겠다는 거지?"라고 비아냥거리면서 '설정에 의한 방송사고'로 규정한 것.

술 취한 방송진행자 칼 스테파노빅
 술 취한 방송진행자 칼 스테파노빅
ⓒ <채널7>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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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담기 어려운 조크로 시청률 올리는 진행자

상업TV의 시청률과 수익금은 거의 정비례한다. 그래서 시청률에 집착하는 걸 무작정 비난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2년 전에 <미디어워치>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데이비드 마(시드니모닝헤럴드 논설위원)는 "호주의 경우가 미국이나 유럽국가에 비해 훨씬 심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온 가족이 함께 시청하는 아침뉴스쇼 진행자들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수준의 조크를 수시로 내뱉는다"면서 "자체적으로 걸러지지 않는다면 시청자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번에 사고를 친 <채널7>과 <채널9>이 그의 주요 타깃이다.

<채널7>의 앵커 데이비드 코시가 '악어가죽으로 만든 여자 핸드백 조크'로 한동안 구설수에 올랐다. 그가 생방송 도중에 "수컷 악어의 생식기로 만든 여자 핸드백은 한참동안 만지작 거리다보면 여행용 가방으로 변한다"고 발언한 것. 당연히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지만, 그의 낯 뜨거운 조크로 프로그램 시청률은 상승곡선을 그렸다.

같은 시간대 경쟁프로그램 진행자인 칼 스테파노빅은 체질적으로 그런 조크를 내뱉을 배짱이 없었다. 결국 시청률 경쟁에서 밀리게 된 그는 폭음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이 깨지 않은 상태로 방송을 진행하여 퇴진 압력을 받기도 했다.

샤메인 드래건(왼쪽)과 함께 뉴스를 진행했던 빌 우드가 샤메인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다.
 샤메인 드래건(왼쪽)과 함께 뉴스를 진행했던 빌 우드가 샤메인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다.
ⓒ <채널7>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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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한 뉴스앵커·마약중독자 된 해외특파원

한편 낮은 시청률 때문에 심한 우울증에 걸린 뉴스 앵커가 방송 시간 직전에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례도 있다. 지난 2007년 11월, <채널10>의 저녁종합뉴스 공동앵커를 맡았던 샤메인 드래건이 방송 30여분을 남겨놓고 방송국에서 사라졌다.

애타게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공동앵커 빌 우드는 뉴스시간 직전에 경찰당국으로부터 "드래건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우드 앵커는 "지금 내 옆에서 함께 뉴스를 진행해야할 드래건이 조금 전에 자살했다"면서 잠시 눈물을 글썽이다가 끝가지 뉴스를 진행했다.

마약스캔들에 연루돼 복역중인 abc-TV 로이드 특파원.
 마약스캔들에 연루돼 복역중인 abc-TV 로이드 특파원.
ⓒ 시드니모닝헤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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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지역 해외특파원으로 근무하다가 마약소지 혐의로 체포되어 현재 싱가포르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호주국영 abc-TV 소속 피터 로이드 특파원의 사연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다.

2008년 11월, 싱가포르에서 체포된 로이드 특파원은 그 직전까지 뉴델리, 마닐라, 방콕, 발리 등에서 활동했다.

그곳에서 6년 동안 근무한 그는 필리핀 아동성매매, 부토 암살, 발리 테러, 카라치 자살 테러, 동남아지역 쓰나미 등을 보도했다.

그는 법정진술을 통해 "아동성매매, 테러, 쓰나미 등의 현장을 6년 동안 취재하면서 악몽에 시달렸다.

게다가 타 언론사 특파원들과 경쟁을 하다 보니 마약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었다"고 털어놓았다.

"옷을 벗으면 모든 인간이 똑같아진다"

심리학자 케이트 맥마흔 교수는 '국제 트라우마틱 스트레스 학회'에 제출한 연구보고서를 통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근무하는 외신기자 85%에 해당하는 115명을 조사한 결과 약 15% 정도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을 가능성이 있다"고 피력했다.

그러나 호주 방송사들은 불과 10년 전까지 만삭의 임산부가 출산 직전까지 TV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도록 배려했다. 그래서일까. abc방송 마크 스코트 전 사장은 "언제부턴가 신자유주의 만능 상황이 되면서 호주 방송계 종사자들의 얼굴에서 여유로움이 사라졌다"고 개탄한 바 있다.

그런 측면에서 3월 1일의 오페라하우스 누드 촬영 작업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누드모델 자원봉사자로 나온 학생 아트 러시(19)와 간호사 네리다 그랜트(27)가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옷 벗기기 경쟁에 나선 방송사 관계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 생애에 다시 없을 기회일 것 같아서 누드모델을 자청했을 뿐, 금기를 깨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성적인 느낌은 없었고 그냥 인간적으로 통하는 동족(tribal)이라는 느낌이 들었다."(아트 러시)

"옷을 벗으면 모든 인간이 똑같아진다는 걸 알게 됐다. 갑자기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왔을 때 서로 감싸 안아주면서 사람의 체온을 느꼈고, 항상 경쟁하느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따뜻한 인간애를 다시 찾았다."(네리다 그랜트)
첨부파일
naked3.jpg


태그:#누드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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