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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일이다. 학교에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 녀석이 전화를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가운데, 녀석이 뜬금없이 물었다.

"혜은이가 부른 '감수광'이란 노래 알지?"
"응, 당연하지. 왜?"

"근데 뒷부분에 '혼자 옵서예'라고 하는데 그게 맞는거야?"
"ㅋㅋㅋㅋㅋㅋㅋ"
"야, 웃지만 말고 가르쳐줘 봐."

다른 이와 대화하다가 이 제주도 사투리로 된 노래 때문에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인지 제주도가 고향인 내게 물어 온 것이다. 생각해보니 '혼자 옵서예'라고 하는 것도 말이 되기는 하는지라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문제가 되는 부분만 따 오면

'감수광 감수광 난 어떡허렌 감수광
설른 사람 보냄시메 가거들랑 혼저 옵서예'
인데,

'떠나는 설운 님을 보내드리니, 가고나서 돌아올 적에는 (다른 이, 말하자면 연적이 될 이와 함께 오지 말고) 홀로 오시라'는 것으로 해석이 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인 '혼저 옵서예'는 답부터 밝히자면, '얼른 오세요'이다. 다시 가사를 맞추어 보면,

'가시나요, 난 어떡하라고 가시나요
설운 사람 보내오니 가거든 얼른 오세요'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감수광'도 옛 조상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사랑노래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은 노랫말인 것이다. 특히나 고려가요인 '가시리'와 많이도 닮았는데 이 '가시리'를 '청산별곡'과 섞어  대학가요제(1회/1977)에서 이명우가 노래해 은상을 받은 적도 있다.

'혼저 옵서예'는 제주도에 와서 차를 타고 다니다보면 어느 마을 입구에 적혀 있는 경우를 더러 볼 수도 있다. 또한 그 마을을 빠져나오는 지점에는 '잘 갑서예'라는 글귀가 대꾸하게 마련인 것인데, 문제는 '혼저 옵서예'라는 글귀를 직접 눈으로 보면 '혼'의 모음을 'ㅗ'가 아닌 '.(가운데 점, 아래 아)'로 적어 놓는다는 것이다.

오늘날 토박이 워드 프로그램 '아래아 한글'로 대변되어 기억하는 이 '아래 아'는 죽은 소리요, 그 때문에 쓰지 않는 죽은 글자인 것이다. 그런데 제주도에는 아직도 이 글자를 쓰는 곳이 있는 것이다.

내가 처음 이 글자를 본 것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당시에도 이미 죽은 글자였던 '아래 아'는 학교 가는 길가에 자리한 식당 앞에 세운 간판에 적혀 있었다. 'ㅁ'과 'ㅁ'이 위 아래로 놓인 사이에 찍힌 그 점 하나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궁금함을 달고 살았댔다. 마치 한자 여(呂)와 비슷한 생김새인데, 그것은 제주 토속 음식으로 알려진 '몸국'이라고 적어 놓은 것이었다.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으니 나로선 당연히 이상한 글자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훈민정음'도 배우고. '용비어천가'도 배우고, '서동요' 따위도 익히면서 이 '아래 아'의 소리를 적나라하게 깨치게 되는데 이는 선생님의 우렁차고도 제대로운 제주도식 발음 덕분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제주시가 아닌 지역에서 온 친구들은 적잖은 수가 이 '아래아'를 그야말로 제대로 소리내곤 했는데 정작 나는 내가 내는 소리가 지금도 제대로 된 소리인 것인지 영 자신이 없다.

글로 적어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만 '아래아'는 'ㅗ'와 'ㅓ'의 중간쯤 되는 소리라고 배우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들어보면 밋밋하게 뽑아내는 소리가 아니라 혀를 재빠르게 말아 굴려서 소리내는데 콧소리도 약간 가미되는 그런 느낌이 든다. 이 부분은 전문가가 아니라 확신하지는 못하는 바, 관심 있는 이는 나이 드신 분들께 직접 전수받는 게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다. 웹상으로는 '제주전통민요'나 '노동요' 따위를 게시한 사이트를 검색해 소리를 들어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이렇게 'ㅗ'와 'ㅓ'의 중간 소리를 내는 '아래 아'의 영향권에 있는 제주도 사람들은 앞서 예를 들었던 워드프로그램를 '한글'이라 하지 않고 '혼글(아래아)'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한글날' 따위는 그대로 '한글날'이라고 소리내는 데, 이는 위 프로그램이 '혼글(아래아)'이라고 시각화된 것을 라벨이나 설명서나 제품포장 따위에 그려넣었기 때문이다.

광고에서 표현되는 '아래아'로 표기한 이름들, 예를 들면 '다맛', '수려한', '참 크래커' 따위도 바다를 건넌 육지권에서는 위에 적힌 그대로 읽고 말지만, 제주도에서는 '다못', '수려혼','촘 크래커'에 가깝게 읽는다. 그래서 '맛'이라는 뜻으로 쓰였을 '다맛'은 제대로 따지고 들면 '아래아'로 표기할 수 없는 것이다. 한글이 생긴 때에도 애초에 '맛'이라고 표기했던 것이지 '아래아'로 표기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탐나는도다','이재수의 난' 따위의 제주도를 다룬 극에 나온 사투리가 떠오른다. 극에서 사투리를 보는 그 고향 사람들도 그럴까 궁금해질 정도로  이들의 사투리 구사력은 이마에 땀을 맺히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탐나는도다'의 경우는 분위기가 심각한 경우가 별로 없어 덜한 편인데다 초반에는 자막까지 입혀주는 정성을 보였지만, 이재수 역을 맡은 이정재가 결의에 찬 자세로 한 말들은 그야말로 '뻘쭘'하게 만들었다.

반대로 높은 점수를 주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80년대에 방송되었던 '김만덕'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그것이다. 물론 제주 출신으로 잘 알려진 고두심이 그 배역을 맡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조만간에 또 제주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몇 편 등장할 거라고 하는데 이 번엔 몇 점을 주게 될 지 기다리고 있다.

아예 이 참에 '사투리 교육사' 같은 직종이 생겨나 극에 사실감을 높이는 구실을 하고, 더 나아가 지역.지방마다 자랑거리인 사투리를 돌보고, 다듬어, 이어주는 다리 구실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상점에 들러 장을 보고 계산대에 기다리는데 외국인이 계산을 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이는 모든 것이 마무리되자 겸손하게도 두 손으로 카드를 돌려받았다.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만, 이 인상 깊은 모습은 우리가 기를 쓰고 '어륀지'를 소리내려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리고, 버린 것들에 관심을 두고 보살피는 모습을 갖추었을 때 쉬이 해결될 일들이 참으로 많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적어도 외국 가서 살 생각, 또는 재력이 없는 평범한 한국사람이며 제주도사람인 내게는 '가시리'와 '감수광', '몸국'이 입맛에 맞아 착착 달라붙으니 행복하기 그지 없다. 제대로 소리내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말이다.


태그:#제주도, #제주도사투리, #감수광, #아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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