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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웠다. 날이 무척 맑았는데도 쉽게 흥이 나질 않았다. 실은 그럴 만했다. 숱한 면접 경험을 통해서 깨달은 몇 가지가 있다. 침묵 속에서 서류까지 내려놓은 채로 면접관이 날 보며 웃고 있다면 그건 어서 빨리 나가란 뜻이다. 다섯 명 집단 면접에서 나는 소외되었다. 명문대 출신 누군가는 사는 곳과 학점, 포부, 취미 등의 질문을 받았다. 경력이 3년이 넘는데도 신입으로 지원한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에 대한 좀 더 전문적인 질문이 쏟아졌다. 성격이 어떠냐는 모처럼의 질문에 장황하게 말하고 있는데 사장은 여기 당신 이야기만 들으려고 앉아 있는 게 아니라며 면박을 줬다. "분명하게 한두 마디만 하세요." 이럴 거면 왜 불렀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그럴 만한 배짱이 없었다. 어차피 끝났다는 생각에 막판 우스갯소리 몇 마디를 던졌다. 면접관들은 쓴 웃음만을 지었고, 별 다른 대꾸 없이 "이제 그만"이라고 외쳤다. 그게 끝이었다.

대기실로 돌아와 가방을 들고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얼마 안 된다며 봉투를 하나 건넸다. 만 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래, 이걸로 순대국밥에 소주 한 병은 비울 수 있겠구나. 이 정도면 남는 장사 한 게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발버둥 치며 발악을 하더라도 결과가 바뀌진 않을 테니까. 계단으로 내려가다가 유리창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양복을 입은 창 속 사내의 모습이 어색했다. 나도 한 때는 이 양복을 입고 출퇴근하던 때가 있었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명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몇 백 년 전의 일인 것 마냥. 마치 내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것처럼.

집으로 가는 사거리에는 나를 아는 점포 주인들이 많았다. 구멍가게 부부, 옷가게 모자, 부동산 아줌마들, 세탁소 부부, 그리고 싸움 잘 하는 기사식당 아저씨까지. 난 부러 먼 길로 돌아서 갔다. 대낮에 양복을 입고 걸어간다는 건 오늘 면접 봤다고 떠들어 대는 것이나 진배없는 일이니까. 수군거리는 사람들 입에서 그 날의 일이 일일이 보고되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못 되었다.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열자 강아지 또또가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었다. 반갑다고 왈왈, 먹을 거 달라고 왈왈. 네 팔자가 상팔자다. 괜히 강아지까지 미웠다.

나의 면접시험 순례기

2005년 8월, 코스모스 졸업을 한 이후부터 내 운명 같은 면접시험 순례기는 계속 됐다. 이십대 때는 가진 게 없어도 어리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불러주는 데가 많았다. 맞다. 그래서 착각했다. 내가 뭔가가 있는 놈인 줄 알았다. 마음만 먹으면 영어 따위 못 해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토익 시험 한 번 안 봤어도 원하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지금은 꿈같은 이야기지만 분명 그런 때가 있기는 했다. 이력서를 서너 군데만 넣어도 그 중 한 곳에서는 연락이 왔다. 절박함이 없던 그 때에는 좀 더 나은 연봉과 편안하고 안정적인 노후까지 생각하며 따졌다.

현실보다 꿈이 앞섰던 그 때에는 앞에 놓인 모든 길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를 한두 살 먹고 세상이 어떤지를 알게 되면서 눈높이는 차츰 아래로 향했다. 먼 산은 정녕 닿을 수 없는 곳이었고, 내 손아귀에 쥘 수 있는 건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아무리 노력해봤자 안 되는 사람들은 정말 안 됐다. 그건 일정 부분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딜레마에 빠졌다. 열정만 가지고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나는 무슨 일자리든 알아 봐야 했으니까. 공허한 낱말과 사진, 그럴듯한 내용 하나 없는 이력서를 보고 선뜻 자리를 내줄 기업은 없었다. 공장에서 원단을 나르거나 친구가 하는 일을 이따금씩 도와주며 보수를 챙기기는 했지만 그걸로 평생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 자신의 그릇이 어느 정도임을 알고 있으면서 애써 그걸 숨기고 면접장에 들어서는 신세가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었을 게다. 거대한 몸집이지만 실은 바늘로 살짝 찌르기만 해도 금세 축 늘어져 땅에 쓰러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실패에 익숙해지면서 승부욕과 오기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일에 대한 기대치도 많이 낮아져서 희망연봉이나 근무요일(주 5일제) 따위는 따지지도 않았다. 면접장에서 으레 볼 수 있는 갓 졸업한 햇병아리들은 힘이 넘쳤다. 엄청난 스펙(외국어 능력, 해외연수, 자격증)과 자신감 그리고 사나운 열기로 가득한 그들의 모습은 날 더 작게 만들었다. 점점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다시 올라와야 할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아침이면 출근하고, 저녁이면 퇴근해서 운동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사람들. 내가 한때 그 부류에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

경쟁에서 낙오되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점점 도태되어 갔다. 사회의 패배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예전에는 특이한 것에 이끌려 다녔지만, 이제는 평범하고 남들 사는 만큼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남들 다 있다는 집 한 채 마련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신문에 매일 보고되는 20-30대 평균 연봉을 내가 받는다는 게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 역시도. 특이하게 사는 건 쉬웠지만 평범하고 조용하게 불만 없이 사는 건 정말 힘들었다.

그러면서 차츰 아버지에 존경심이 생겼다.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않고 인쇄공장에 뛰어들었던 사내. 평생 한 가지 일만을 하면서 집을 마련하고 딸내미를 시집까지 보낸 사람. 장성한 자식이 백수 신세인 데다 이유 없이 화를 내는 데도,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는 엄청난 인내심의 소유자. 누군가 강요해서 가르치려고 할 때에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 고통스러운 세상 속에서 쉽게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아내와 자식 그리고 친척들까지 건사하며 걸어온 몇 십 년의 인생에 대해서.

예전에는 무언가 결심을 할 때 항상 거울 속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거울을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깨끗하게 닦고서 이 악물면 그걸로 끝이었다. 이제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게 된다. 잘난 나의 꿈 하나 때문에 놓쳐왔던, 그래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주변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기 위해서다. 더 늦기 전에 그것들을 주워야 했다. 그래야만 어두운 골목길에 드리워진 한 사내의 그림자를 쫓아갈 수 있을 테니까.

집에 도착해 양복을 벗어놓고 햇빛이 들어오는 거실 한가운데에 앉았다. 손을 들어 귀에 갖다 대었다. 어쩌면 들릴지도 모른다. 그 사내의 무뚝뚝한 발걸음 소리가, 뒤따라가는 땅꼬마가 코 훌쩍거리며 아빠, 아빠 부르는 소리가. 

덧붙이는 글 | <나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응모글



태그:#면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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