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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이 읽은 책들' 강독회에서 박능후 경기대 교수(전 양극화민생대책위원)가 제프리 삭스가 지은 <빈곤의 종말>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15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이 읽은 책들' 강독회에서 박능후 경기대 교수(전 양극화민생대책위원)가 제프리 삭스가 지은 <빈곤의 종말>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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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던 제프리 삭스 교수는 어느 세미나에 참석했다. 누군가의 질문을 받고 그는 당당하게 1920년대를 휩쓴 초인플레이션을 현대적 분석 이론으로 설명했다. 아주 당당하게 확신에 찬 모습으로.

그럴 만했다. 1954년생인 제프리 삭스는 미국 하버드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고, 29살에 하버드 대학 최연소 정교수가 됐으니까. 한마디로, 제프리 삭스는 잘나고 똑똑한 인물. 그가 세미나에서 설명을 마칠 즈음 누군가 그에게 외쳤다.

"당신이 그렇게 똑똑하면 라파스(볼리비아 수도)로 와서 직접 우리를 도와주지 그래요!"

농담으로 들렸던 것일까? 하버드의 수재 제프리 삭스 교수는 웃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크게 외쳤다.

"정말로요!"

알고 봤더니 그는 볼리비아 외무 장관과 주미대사를 지낸, 볼리비아의 핵심 정치인이었다. 제프리 삭스 교수는 "내가 다른 나라를 돕는 일은 한 적은 없지만, 당신들이 정말 관심이 있다면 한 번 뛰어들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때로 우연적 사건이 한 인물의 인생행로를 결정하기도 하는 법. 이날의 갑작스런 만남으로 제프리 삭스 교수의 삶과 학문은 많은 면에서 변화를 겪는다. 실제 제프리 삭스 교수는 1985년 7월 9일 라파스로 향한다. 그리고 2만 4000퍼센트나 되는 볼리비아 초인플레이션 해결에 많은 기여를 한다.

결국 볼리비아 국민들은 극단적 빈곤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1989년 초, 제프리 삭스 교수는 워싱턴 주재 폴란드 대사관 직원 크쥐시토프 크로바츠키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며칠 뒤 제프리 삭스 교수를 찾아 용건을 말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해 오던 자문이 폴란드에도 쓸모가 있겠습니까?"

제프리 삭스는 폴란드로 떠난다. 결국 한 세미나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은 그에게 책상에만 앉아 책만 파는 교수가 아닌, 전 세계 빈곤 국가를 누비며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제프리 삭스 교수는 아프리카 말라위,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 등 전세계 빈곤 현장을 찾았고, 그는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하버드 강단이 아닌 아프리카 기근 현장에 있는지도 모른다.

15일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이 읽은 책들 강독회'의 여섯 번째 텍스트는 제프리 삭스 교수가 쓴 <빈곤의 종말>이었다. 위의 이야기 역시 <빈곤의 종말>에 상세히 나와 있는 것이다. 이날 강사로는 전 양극화민생대책위원회 위원인 박능후 경기대 교수가 나섰다. 수강생은 대학생, 교사, 의사 등 다양한 직종에 근무하는 시민 약 100명이 참석했다.

박능후 경기대 교수(전 양극화민생대책위원).
 박능후 경기대 교수(전 양극화민생대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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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교수는 "경제학자가 쓴 책 치고는 설득력 있고, 저자가 말라위, 폴란드, 중국 등에서 직접 뛰면서 정책 자문을 했기 때문에 현장감이 있다"고 책을 소개했다. 이어 저자 제프리 삭스 교수에 대해서는 "정통 주류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이면서도 '휴먼 캐피탈리즘' 차원의 개인 생산성 문제로 빈곤을 바라본다"고 전제한 뒤 "경제학자들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계몽주의 역사관을 갖고 있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학자"라고 평가했다.

책 제목 <빈곤의 종말>이 말해주듯, 제프리 삭스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큰 진보와 경제 발전을 이룬 지금도 왜 빈곤은 사라지지 않는지, 그리고 그 해결 방법은 무엇인지 책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2025년까지 인류에서 극단적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 191개 유엔 회원국이 서명한 '밀레니엄 프로젝트' 달성을 위한 로드맵이 바로 이 책이다. 제프리 삭스의 문제의식을 박능후 교수의 말을 빌어 정리하면 이렇다.

"2001년 9·11 테러로 뉴욕에서 3000여 명이 사망했을 때 세계는 경악했다. 미국은 곧바로 보복 전쟁을 시작했고 2005년에만 4500억 달러를 군비로 지출했다. 그런데 왜 세상은 매일 1만여 명이 빈곤으로 사망하는 일에는 무심할까?"

지금도 세계 60억 인구 중 하루 1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극단적 빈곤'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은 10억 명이다. 그리고 1달러 이상 2달러 미만 소득의 빈곤한 사람들은 15억명으로 추산된다. 그렇다면 전체 인류의 약 40%는 빈곤 상태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제프리 삭스가 분석했고, 지금 우리들 대부분이 알고 있듯 절대적 빈곤은 지구상의 특정한 지역,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남아시아 등에서 강력하게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게을러서, 아니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기에 빈곤한 것일까?

제프리 삭스는 "최빈국들의 핵심적 문제는 빈곤 그 자체가 함정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함정의 원인과 '패키지 해법'에 주목한다. 즉 빈곤은 부패한 국가 지도자와 발전을 막는 퇴행적 문화의 결과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프리 삭스의 분석에 따르면 빈곤은 자연지리, 재정적 함정, 통치구조의 실패, 문화적 장벽, 지정학, 혁신의 결여, 인구 함정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빈곤에 빠진 국가는, 특히 '빈곤의 함정' 빠진 나라는 자신 혼자의 힘으로 나올 수 없다는 걸 제프리 삭스는 강조한다. 결국 전지구적인 '밀레니엄 프로젝트'가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 말하고 있는 셈이다.

"최빈국들을 위한 주된 경제발전의 목표는 이 나라들이 사다리에 발을 올려놓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부국들이 최빈국들을 부유하게 만들 정도의 투자까지 할 필요는 없다. 단지 빈국들이 사다리에 발을 올려놓을 수 있는 정도의 투자만 하면 된다. 그 이후에는 자기 동력으로 경제성장의 거대한 메커니즘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박능후 경기대 교수(전 양극화민생대책위원).
 박능후 경기대 교수(전 양극화민생대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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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능후 교수도 "빈곤국은 '빈곤의 함정'에 빠져 있고, 그곳에 빠지면 빠져 나올 수 없다"며 "결국 빈곤에 빠진 사람이 사다리를 오를 수 있도록 누군가 기회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프리 교수의 부인은 의사다. 그는 그 부인이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경제학에 응용하며, 실제 빈곤 퇴치에서도 그걸 사용한다. 이른바 '임상경제학(clinical economics)'이다. 즉 인간이 병을 앓는 원인을 분석하고 치료하려면 가족력과 주변 환경 등을 알아야 하듯, 빈곤국가 등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한 나라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처방법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프리 삭스는 경제 어려움을 겪는 나라를 진단할 때는 "IMF 같은 단일한 국제 기구에 의해서 다뤄질 수 없다"며 "저소득국의 국내 기구들뿐만 아니라 많은 국제 기구가 서로 협력하여 진단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설명하며 박능후 교수는 탄식하듯 말했다.

"97년 우리나라의 경제위기 때를 보자. IMF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었다. 전문가 와서 한 마디 툭툭하고 가 버린다. '사기업 규제 줄여라, 예산 적자 줄여라, 공기업을 민영화 하라' 등등. 그리고 나서 외국 기업이 우리나라 기업을 많이 잡아 먹지 않았나. 이걸 IMF 직원 몇 명이 다 한 것이다."

<빈곤의 종말> 마지막 장에는 '반지구화 운동'을 벌이는 운동가에 대한 제프리 삭스의 견해와 충고가 나온다. 그는 "지구적 통치구조의 위선과 명백한 단점을 폭로함으로써 부유하고 힘 있는 나라들이 오랫동안 계속해 온 자화자찬을 끝냈다는 점에서 그 운동을 환영한다"면서도 "(하지만) 반지구화 운동 지도자들은 1990년 이래로 다른 무엇보다도 지구화 덕분에 극단적 빈민들이 인도에서는 2억 명, 중국에서는 3억 명이나 줄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어 그는 이렇게 강조한다.

"여러 차례 반복하여 지적했듯이 아프리카 문제는 전 지구적 투자자들에 의한 착취가 아니라 경제적 고립 때문에 발생했다.(중략) 반지구화 운동은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너무 비관적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무역과 투자의 놀라운 힘이 이용될 수 있으며, 동시에 보정적 집단 행동을 통해 힘의 한계들이 인식되고 다뤄진다."

제프리 삭스가 친 시장주의자이든 아니든, 그리고 백인 중심 사고에 빠진 백인이든 아니든 곱씹어 볼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실제 이날 강독회에서도 한 수강생은 "너무 백인과 미국 우월주의 입장에서 서술된 것 아니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이에 박능후 교수는 "서로 좋은건 배우는 게 좋고, 역사적으로 봤을 때 고립된 나라는 모두 몰락했거나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빈곤의 종말 표지> 21세기 북스
 <빈곤의 종말 표지> 21세기 북스

제프리 삭스는 계몽주의 입장을 견지하며 역사의 진보와 발전을 확신하고 있다. 그는 "(이전의) 다른 세대들은 투쟁과 설득 그리고 인내를 통해서 인간의 복지와 자유의 영역을 확대하는 데 성공했다"며 "세 차례의 큰 세대적 도전이 생각나는데, 이 도전들 속에서 각 세대는 가난한 자와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싸웠다"고 강조했다.

그가 제시한 역사적인 세대적 도전은 노예제도의 종말, 식민주의의 종말, 그리고 민권 운동과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우리 세대가 빈곤퇴치를 위해 도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빈곤의 종말>는 이렇게 끝난다.

"결국 문제는 개인으로서 우리 자신에게 돌아온다. 사회적 약속이란 곧 개인들의 약속이다.(중략) 미래가 우리 세대에게 이렇게 말하게 하자. 우리가 희망이라는 강력한 물결을 일으켜 세계를 치유하기 위해 뜻을 모아 함께 일했다고 말이다."

박능후 교수는 "10년 안에 제프리 삭스가 노벨 평화상이나 경제학상을 받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나저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책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양극화가 심화된 자신의 통치시기를 스스로 어떻게 평가했을까?



태그:#빈곤의 종말, #노무현 강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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