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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금) 오전 국회 총리인사청문특위는 정운찬 총리 후보자에 대한 청문 보고서를 채택하기 위해 전체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민주당 등 야당의 반발로 회의는 연기, 정회 등 파행을 겪었다. 정 후보자에 대한 국회 본회의 인준 절차가 원만히 진행될 것 같진 않아 보인다.

국회 인사 청문회에서 후보자들의 인사 검증에 등장하는 단골 메뉴 4가지- 위장전입, 세금탈루, 병역면제, 논문복제다. 바로 정 총리 후보 자신이 4가지 덫을 쉽게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뿐일까? 지금껏 많은 후보자들이 이 4 가지 덫을 피해가기 쉽지 않았다.

시류(時流)에 회자(回刺)되는 사자성어(四字成語)

사필귀정(四必歸政)- 4가지를 반드시 갖춰야 벼슬길에 나설 수 있다고?
이젠 이런 부정과 부도덕쯤이야 대수롭잖다는 시대의 자조일까?

학벌 좋고 경력 화려하고 능력 있는 사람은 많되 우리 사회에 정직하고 정당한 사람이 정말 그렇게 드물까?

38세(1538년), 이언적의 추천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
48세, 전생서(典牲暑)와 종부시(宗簿侍)의 주부(主簿) 벼슬
55세, 단성현감(丹城縣監)
61세 이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 상서원 판관(尙瑞院 判官) 종친부 전첨(宗親付 典籤)

이들 벼슬을 모두 사양한 분, 그러면서 자신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는 이유와 되레 인명권자인 지존의 왕을 향해 만천하가 가슴 철렁대는 상소문[丹城疏]을 올려 대비와 임금 그리고 탐관오리를 경계하고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세우려 했던 인물, 남명(南溟) 조식(曺植, 1501~1572) 선생이시다.

남명 기념관 내에 있다.
▲ 남명 조식 선생 석상 남명 기념관 내에 있다.
ⓒ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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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 사람들은 의를 귀하게 여기고 利를 천하게 여기며 조용히 물러가는 것을 숭상하고 탐욕을 부끄러원 할 줄 아니 선생이 끼친 공덕이 실로 크다...."
▲ 선생의 신도비(神道碑)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 " 사람들은 의를 귀하게 여기고 利를 천하게 여기며 조용히 물러가는 것을 숭상하고 탐욕을 부끄러원 할 줄 아니 선생이 끼친 공덕이 실로 크다...."
ⓒ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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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월 26일) 허허로운 마음으로 선생의 유적을 찾아 나섰다.

손에는 인터넷에서 뽑은 단성소(丹城疏) 전문을 들고서... 오늘 따라 왜 그리도 상소문 내용이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가.

우선 그 유명한 단성소(남명 조식(曺植)선생이 단성현감에 제수된 것은 국정의 피폐함이 극에 달했던 명종 11년이었다. 남명은 현감직을 뿌리치면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를 단성소 혹은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라고 한다.) 한 부분을 인용해 본다.

(前略)
전하께서 사람을 쓰시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시는 책임 때문입니다......

신은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 학문은 어두우며 문장은 과거 시험에 끝자리에도 뽑힐 수 없고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일을 제대로 해 내기에도 모자랍니다. ..... 하물며 그 사람 됨됨이가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는 과거를 보려고 하느냐 과거를 보려고 하지 않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잘 것 없는 신이 이름을 도둑질하여 집사(추천관원)에게 제가 훌륭한 인물이라고 잘못 판단하게 했고 집사는 이름만 듣고서 전하에게 제가 훌륭한 인물이라고 잘못 판단하도록 한 것입니다.....

고기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데도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오라 內臣들은 派黨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外臣들은 향리에서 백성들을 착취하여 이리떼처럼 날뛰면서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이치를 모르고 있읍니다. 이런 까닭에 신은 깊이 생각해 보면 탄식만 길게 나올 뿐, 낮이면 하늘을 우러르기 수 차례였고 눈물과 한숨을 누를 길 없어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한지가 오랩니다. 나라가 이 지경이고 보면, 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밖의 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안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 어린 先王의 한 외로운 자식일 뿐입니다.......

저 많은 天災와 ,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무엇으로 막고,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위로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조금이나마 부지할 수 없을 것이며, 아래로 터럭만큼도 백성들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니, 전하의 신하되기 또한 어렵지 않습니까. 추호라도 헛된 이름을 팔아 전하의 벼슬을 도적해서 그 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신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운 두 번째 까닭입니다.

용암서원 앞에 을묘사직소의 전문을 새긴 돌을 세웠다.
▲ 을묘사직소의 전문 용암서원 앞에 을묘사직소의 전문을 새긴 돌을 세웠다.
ⓒ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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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저며 오는 내용이다.
그 기개 또한 무엇에 비길까? 수렴청정을 행하던 중종의 계비이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정보에 어두운 과부로, 12세 때 왕위에 오른(1545년) 어린 왕을 철부지 고아로, 문정왕후의 동생 천하 패륜아 윤원형을 뇌물에 혈안이 된 도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

상소문을 읽는 동안 조정 대신들은 자신들의 목을 어루만지며 벌벌 떨었다고 하지 않던가? 선생은 돌아가신 후 뜻밖에(?) 높은 벼슬에 제수되었다.

선조 때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 7)영의정에 봉해졌으며, 문정공(文貞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덕산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선생이 태어난 곳을 먼저 찾았다.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488번지다. 선생은 닭의 해[辛酉年]인 1501년(연산군 7) 6월 26일에 이곳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다. 의령군 대의면에서 양천강 다리를 건너면 들머리엔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가 떡 버티고 있다. 2차선 신작로는 새 지명을 얻었다 -남명로-

낙기정(樂飢亭) 굶주림을 낙으로 생각하는 정자? 이 무슨 여유인가?
▲ 낙기정(樂飢亭)과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 낙기정(樂飢亭) 굶주림을 낙으로 생각하는 정자? 이 무슨 여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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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자취를 찾아 볼까?
▲ 느티나무 둥치 선생의 자취를 찾아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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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무 아래에서 선생은 한시 한 수를 지었다.

-홀로 선 나무를 읊다(詠獨樹)-

무리를 떠나 홀로 있기에
스스로 비바람 막기 힘들겠지
늙어감에, 머리는 없어졌고,
상심하여 속이 다 타버렸네
아침이면, 농부가 와서 밥먹고
한낮엔, 야윈 말이 그늘에서 쉬네
다 죽어 가는 등걸에서, 무얼 배우랴
마음대로 하늘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네.

선생은 48세 때 다시 고향인 합천 삼가면 외토리에 와서 학문과 후학양성에 힘썼다. 그러면서 노거수 아래에서 시 한 수를 썼다. 500년 생 느티나무아래에 조성했다.
▲ 영독수(詠獨樹) 시비(詩碑) 선생은 48세 때 다시 고향인 합천 삼가면 외토리에 와서 학문과 후학양성에 힘썼다. 그러면서 노거수 아래에서 시 한 수를 썼다. 500년 생 느티나무아래에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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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옆 길가에는 고려말 효자 이온의 쌍비가 있었다.

나란히 비석이 2개. 고려말 이온(생몰연대미상)의 효성을 기린 비. 그는 부모 사후 3년 시묘살이 후 50세까지 그곳에 머물며 부모님을 애도했다고 함.
이성계가 병마순찰사로 영남 일대를 순시할 때 이를 알고 고려 우왕에게 보고하여 건립(1383년)하였다고 함
▲ 외토리 쌍비 나란히 비석이 2개. 고려말 이온(생몰연대미상)의 효성을 기린 비. 그는 부모 사후 3년 시묘살이 후 50세까지 그곳에 머물며 부모님을 애도했다고 함. 이성계가 병마순찰사로 영남 일대를 순시할 때 이를 알고 고려 우왕에게 보고하여 건립(1383년)하였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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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가 조아리고 벼가 고개를 숙이는 들녘에서 뇌룡정과 용암서원을 바라보았다.
결코 넓지 않은 들녘에서 당대 사림(士林)의 종사(宗師)로 추앙받던 선생은 어디를 어떻게 소요하면서 제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스스로 그 깊은 학문과 사상을 이어 갔을까?
뇌룡정 동쪽 가엔 양천강(남강의 지류)이 조용히 흐르고 강 건너 산기슭 어디쯤엔 계부당(鷄伕堂)과 영파대(暎波臺)가 있어 후학들에게 실천위주의 학문을 가르치며 조용히 남강의 물줄기를 바라보았으리라.

멀리서 바라본 용암서원(왼쪽)과 뇌룡정
▲ 용암서원과 뇌룡정 멀리서 바라본 용암서원(왼쪽)과 뇌룡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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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선생이 48세 때부터 12년간 학문을 가르치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
뇌룡이란 장자(莊子)의 '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레처럼 소리치고, 시체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에서 따온 말. 선생은 이 곳에서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일명 단성소)를 지어 올렸다고 함.
▲ 뇌룡정(雷龍亭) 남명 선생이 48세 때부터 12년간 학문을 가르치고 제자를 가르치던 곳 뇌룡이란 장자(莊子)의 '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레처럼 소리치고, 시체처럼 가만히 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에서 따온 말. 선생은 이 곳에서 그 유명한 을묘사직소(일명 단성소)를 지어 올렸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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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의 후학들이 지어 회산서원이라고 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서원지가 1987년 합천댐에 수몰되어 2006년 이곳 뇌룡정 옆에 복원함. 1609년 용암서원이란 이름이 사액됨.
▲ 용암서원 남명의 후학들이 지어 회산서원이라고 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서원지가 1987년 합천댐에 수몰되어 2006년 이곳 뇌룡정 옆에 복원함. 1609년 용암서원이란 이름이 사액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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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경상좌도(慶尙左道)의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과 더불어 영남 유림(儒林)의 쌍벽을 이룬 선생은 특별히 '의'(義)와 '경'(敬)을 존중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선비 정신을 강조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이 돌아가신 지 20년 후 임지왜란이 일어났을 때, 정인홍(鄭仁弘)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한 선생의 많은 제자들이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구국 전선에 나선 것은 바로 선생의 이러한 실천적 학문의 가르침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사례로 볼 수 있겠다.

산천재는 선생이 만년에 평생 갈고 닦은 학문과 정신을 제자들에게 전수 한 곳이다. 여기서 공부한 제자들이 선생의 학덕을 계승하여 사림의 중심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의 선봉이 되었다.
▲ 산천재(山天齋) 산천재는 선생이 만년에 평생 갈고 닦은 학문과 정신을 제자들에게 전수 한 곳이다. 여기서 공부한 제자들이 선생의 학덕을 계승하여 사림의 중심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의 선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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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의 시는 이곳 산천재에 터를 잡고 난 후의 심정을 적고있다.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 덕산복거(德山卜居)란 제목이다.
▲ 선생의 시가 적힌 안내문 두편의 시는 이곳 산천재에 터를 잡고 난 후의 심정을 적고있다. 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 덕산복거(德山卜居)란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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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문집을 간행하던 곳.
▲ 장판각 선생의 문집을 간행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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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께서 제자를 가르치며 말년(61세~ 72세 타계)을 보낸 산천재(山川齋-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원리)를 찾았다. 이곳엔 선생의 묘소를 비롯해 신도비(神道碑), 여재실(如在室-문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묘(家廟) 또는 별묘) 등이 있어 선생의 말년의 흔적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남명 기념관에 그려져 있다. 신명사도는 마음의 작용을 마치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하여 도식화 한 것이다. 남명선생은 인간의 마음과 마음 바깥의 경계를 굳은 성곽으로 표시한 것은 신체적 외부로부터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은 욕심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뇌룡정을 신명사도에 따라 지은 것이다.
▲ 신명사도(神明舍道) 남명 기념관에 그려져 있다. 신명사도는 마음의 작용을 마치 임금이 신하를 거느리고 정사를 보는 이치에 비유하여 도식화 한 것이다. 남명선생은 인간의 마음과 마음 바깥의 경계를 굳은 성곽으로 표시한 것은 신체적 외부로부터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사사로은 욕심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막아야 한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뇌룡정을 신명사도에 따라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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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는데 이름을 성성자로 명명했다. 선생는 성성자로 스스로 경계하여 방울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을 일깨우고자 했다.
▲ 성성자(惺惺子) 선생은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을 옷고름에 매달고 다녔는데 이름을 성성자로 명명했다. 선생는 성성자로 스스로 경계하여 방울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을 일깨우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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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이 장도를 늘 품에 지니고 다녔다. 장도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명문(銘文)을 새겼다. 마음 속을 밝게 하는 것은 공경이요, 밖으로의 행함을 결단케 하는 것은 의로움이다.
▲ 경의검(敬義劍) 선생은 이 장도를 늘 품에 지니고 다녔다. 장도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명문(銘文)을 새겼다. 마음 속을 밝게 하는 것은 공경이요, 밖으로의 행함을 결단케 하는 것은 의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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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재 뒷편에 있는데, 선생께서 생전에 직접 자리 잡은 묘소터다.
1572년 2월 8일(72세) 별세. 묘소 아래에는 숙부인 은진 송씨의 묘소가 있다.
▲ 선생의 묘소 산천재 뒷편에 있는데, 선생께서 생전에 직접 자리 잡은 묘소터다. 1572년 2월 8일(72세) 별세. 묘소 아래에는 숙부인 은진 송씨의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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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을 맞아 산천재에 들른 초등학생들.
 휴일을 맞아 산천재에 들른 초등학생들.
ⓒ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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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또 다른 재미는 먹는 것, 1인당 6천원의 점심이 이렇게 푸질 수가..
덕산의 한 식당에서.
 여행의 또 다른 재미는 먹는 것, 1인당 6천원의 점심이 이렇게 푸질 수가.. 덕산의 한 식당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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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천면 사리 덕산고을을 지나 덕천서원을 만났다.                                                      

선생이 타계한 후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1576년에 세운 서원이다.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576년 후학들에 의해 세워졌다. 지금의 건물은 1926년에 복원한 것으로 산천재 등과 더불어 국가 문화재 사적 305호로 지정되었다.
▲ 덕천서원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1576년 후학들에 의해 세워졌다. 지금의 건물은 1926년에 복원한 것으로 산천재 등과 더불어 국가 문화재 사적 30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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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히 흐르는 덕천강을 굽어보고 있다.
▲ 덕천서원 유유히 흐르는 덕천강을 굽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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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숭모하는 사당. 덕천서원 뒷편에 있다.
▲ 숭덕사 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숭모하는 사당. 덕천서원 뒷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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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덕천강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리던 정자
▲ 세심정(洗心亭) 선생이 덕천강을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리던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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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물에 목욕하며- 

온 몸에 쌓인 40년 간의 허물 
천샘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 욕천비(浴川碑) -냇물에 목욕하며- 온 몸에 쌓인 40년 간의 허물 천샘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리네 만약 티끌이 오장에 생긴다면 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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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강 가에서 선생은 시조 한 수를 지었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보니
됴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해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 덕천강 덕천강 가에서 선생은 시조 한 수를 지었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보니 됴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해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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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학문과 사상은 널리 알려져 있는 바, 여기 한정된 지면에 언급하기란 너무 벅차다.

권정호(전 남명학연구회 이사장 현 경상남도 교육감)씨가 선비문학 창간호(2004년)에서 밝힌 선생의 선비 사상을 이렇게 요약했다.

(前略) '선비란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보군(輔君)의 관료가 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군을 초월하여 그를 비판하고 인간 본위를 지키면서 언제나 대의를 밝히는 처사(處士)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선비'라 함은 후자, 즉 인간본위에 입각한 정치현실의 시비곡직을 가려 비판하고 도의를 후세에 전수하는 산림처사를 말하다.....
국가나 정부가 무너질 경우 여전히 민족을 지킬 수 있는 지식인이 선비이다......
그는 이학파(理學派)의 학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이론보다 실천에 가치를 두었다.....
학문의 정도가 구설(口舌)이나 사장(詞章)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도의에 입각하여 실천궁행이 학문의 시종이 되어야 한다.
당시 정치 현실에 시비곡직을 가려 추상같은  비판을 행하여 지식인의 참모습을 견지한 남명의 생애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後略)

몇 가지 흙탕물을 뒤집어썼지만, 이 시대 최고 지성인 자리인 서울대 총장을 지낸  정운찬 총리 후보자가, 만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이제 새롭게 정치판의 신선한 선비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그려 본다.

-유적지 설명은 남명선생 사적지 팸플릿 및 안내판을 참고하였음-


태그:#남명선생, #뇌룡정, #용암서원, #산천재, #덕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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