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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두 분 다 95세 전후 건강하게 장수하다가 잠깐 낮잠을 자는 듯이 그렇게 천수를 누리고 가셨다. 그리고 엄마도 그렇게 칠순이 되시도록 감기 한 번 앓은적 없이 정정하셨다. 칠순이 지나서 몇 년 동안도 새벽에 에어로빅과 배드민턴을 하시고, 틈만 나면 요가도 하셨다. 오십대의 중년보다 더 팔팔하셔서 주위분들이 모두 부러워하셨다.

 

그러나 74세가 되면서 갑자기 크게 스트레스를 받은 일이 생겼다. 심화가 얼마나 크셨는지 가슴에는 시퍼런 멍이 드셨고, 많이 울으셨는지 눈은 벌겋게 충혈이 생기셨다. 그 후로 시름시름하시더니 어느 날부터인가 몸에 땅콩알같은 조그만 혹이 생기고 살이 빠지고 주름이 갑자기 많아지고 눈물도 많아지셨다.

 

큰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보니 백혈병류의 하나인 급성조혈모혈관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암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3개월 밖에 못 산다고 하셨다. 엄마는 평생 고생을 많이 하셨지만, 좋은 일도 많이 하셨다.

 

원래 긍정적인 성품이시라 생에 대한 큰 미련이 없어 3개월이면 마음준비 하는데 족할 것이라고 하셨고 항암치료도 안 받으려고 하셨지만 자식들의 강한 권유에 방사선치료도 함께 받으셨다.

 

그런데 그 때쯤 나는 갑자기 엄마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두 딸과 떨어지는 아픔과 반려자를 잃는 혼란속에 빠졌다. 엄마는 서울서 살다가 조그만 소도시로 이사간 막내가 잘 사는 줄 알으셨던 모양이다.

 

항암투병을 하시면서 저 세상으로 가시는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생각이셨는지 몰라도, 7남매 중 막내 살림도 한 번 더 되살펴 봐주고 외손녀들도 품에 안고 알콩달콩 지내려고 갑자기 내려오셨다. 이혼녀로서 혼자 지내던 나는 무척 당황했다. 엄마가 항상 오시면 주무시던 방도 이불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당황한 이상으로 엄마는 더 놀라고 가슴이 찢어지듯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었다. 소도시에서 처음 생겼던 고층아파트의 넓은 집에서 남 부러울 것 없이 살던 막내가 갑자기 냉장고 하나 없이 조그만 원룸에 지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 때 마침 떨어져 살던 아이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드는 소식이 들려왔는데, 만날 수가 없어 애간장이 타서 내 얼굴이 반 쪽으로 타고 쪼그라들었다. 간절히 기도를 하고 나날을 보내는데 아이가 마침 살아나서 내게 오고 싶다고 간절히 말해서 내 곁으로 왔다. 하지만 나는 아이를 잘 돌볼 수 있는 집도 경제적인 능력도  그 때는 없었다.

 

시한부 3개월에서 2개월 밖에 남지 않았던 친정엄마가 달려오셨다. 그리고 확고한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인천으로 데려가마! 외할머니가 만드는 음식을 이 아이가 어릴 적부터 잘 먹었으니 내가 잘 먹이고 데리고 있을께!  말기암에 걸렸지만 네가 자리잡을 때까지는 하느님에게 간절히 기도해서 못 간다고 버틸꺼야! 그러니 우리 한 번 힘내자꾸나! "


"엄마는 몇 달 못살고 멀리 간다고 언니가 말했는데 엄마도 많이 아픈데 아픈 아이를 데리고 가면 어떻해!"

 

"아냐! 엄마는  안가! 지금은 못 가! 엄마를 믿어봐!"

 

일이 끝나는 날이면 왕복 6시간인 인천의 엄마집으로 갔다. 주말이면 엄마와 딸은 나를 기다리고 내가 혹시 길을 잘못 들거나, 서울에 볼일을 마치고 지하철을 잘못타서 늦으면 걱정을 하면서 내가 무사히 잘 오기를 기다렸다.

인천에 가면 그 다음날은 아이의 손을 잡고 유명하다는 경기도의 병원이나 서울 청량리의 병원쪽으로 치료받으러 다녔다. 그리고 엄마도 열심히 항암치료를 받으며 늘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고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시며 나와 딸이 입을 잠옷이나 이불 등을 만드셨다.

 

아이는 할머니가 만든 이불 감촉을 유난히 좋아했고 그 이불을 덮으면 잠이 깊이 잘 온다고 했다. 하늘이 도왔을까? 강남성모병원의 담당 박사님은 암투병환자 1만 명이 만약 있다면 항암제 부작용 없는 1명이 있을까 말까 하는 사례라며 엄마를 꼽았다. 

 

항암제를 여러 번 자주 맞아도 별로 구토도 하지 않고, 방사선치료를 한 뒤에도 밥을 드시고 투병의지가 아주 대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의사가 시한부라고 말한 3개월을 지나 6개월이 되었는데도 별로 악화되지 않으셔서 병원측은 희한하고 놀랍다고도 하였다. 엄마는 그 때 아들과 며느리와 언니들에게 이런 말씀도 하셨다고 한다.

 

"우리 막내에게는 지금 내가 꼭 있어야 하기 때문에 더 아프면 안 된다. 더도 말고 막내가 자리잡고 막내의 딸들이 대학 들어가는 3-4년만 더 살아볼거야!"

 

아픈 딸이 엄마와 함께 산 지 6개월이 되면서부터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되어갔다. 다시 외국어고등학교에 복학하려고 알아보다가 동급생과 한 학년 차이가 나게 되어버려 그냥 검정고시를 통해 수능을 보기로 했다. 아이가 회복되어 엄마와 안전하게 학업을 준비하니 나는 마음의 안정을 얻어 하는 일을 더욱 열심히 했고 조금씩 빛을 보고 자리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엄마가 아프고 3년이 지난 후에 마침내 아이는 수능에 합격하고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 사범대학에도 무사히 들어갔다. 엄마는 우리 모두가 해냈다며 너무 좋아하셨다. 그리고 안도하고 긴장감이 풀어지면서 그동안 물리쳤던 병마에 가슴빗장을 연 모양이신지 악화되셨다.

 

언니가 일본에서 임시 귀국해서 엄마의 요양을 위해 물빛이 좋은 강화도에 조그만 집을 얻고 보살펴드렸다. 엄마와 딸이 인천에 있을 때 그리로 가던 발길은 이제 엄마가 강남성모병원에 계실 때는 그리로 가고, 강화도에 계실 때는 그리로 가기를 2년 가까이 했을 때 엄마는 돌아가셨다. 돌아가시는 마지막까지 엄마는 정신이 맑았고 많이 웃으셨다.

 

오빠들이 반대했지만 엄마는 눈과 신장을 비롯해 병이 들지 않은 모든 장기는 기증하셨고, 남은 육신도 의과대학에 해부용으로 기증하고 돌아가신 지 2년 후에야 아버지가 잠드신 분당의 묘역에 합장될 수 있었다. 엄마의  얼마 되지 않는 쌈짓돈은 13명의 손주들이 대학들어가는 날, 결혼하는 날, 군대가는 날 등에 얼마씩 주라고 모두 그렇게 메모를 미리 해놓으셨다.

 

그리고 엄마가 돌보았던 내 아이와 작은 아이에게는 작은 귓속말로 "네 엄마와 잘 살아야 해!" 하고 당부하고 내게는 "신경쓰지 말고 그냥 잘 먹고 잠 좀 잘자고 살어!" 하는 유언을 하셨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헤어졌던 작은 아이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내 곁으로 왔다. 그리고 잘 안먹고 잠 못자던 나는 잘 먹고 잘 자게 되어 금세 펑퍼짐한 중년의 살이 붙은 희망아줌마가 되었다.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 한다.

 

엄마의 응원으로 인해 세상이 모두 반대하던 붓잡는 길도 들어섰고, 엄마로 인해 위태했던 것 같은 모녀의 삶의 길도 잘 지탱할 수 있었다.  아이는 지금도 엄마가 만든 이불을 덮고 잠을 잘 잔다. 가끔 심란함으로 뒤척일 때 나는 아이가 덮던 엄마가 만든 이불을 당겨 같이 덮는다. 

 

죽음조차 미루고 우리를  잘 보살피고 뒤늦게 먼 길을 가신 우리 엄마! 그런 엄마의 기억으로 해서 삶은 고통스러운 순간도 축복 같다. 마치 구상시인의 지금의 가시자리가 꽃자리라는 시구처럼….

덧붙이는 글 | 특별한 죽음이야기 공모


태그:#엄마의 죽음, #엄마에 대한 감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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