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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의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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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의 불공정 경쟁'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대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단체들은 이런 논리를 펼친다.

"세계화 시대, 국가경제의 경쟁력은 곧 기업의 경쟁력이다. 기업의 경쟁력은 세계 거대기업들과 경쟁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에서부터 나온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우리나라에서야 대기업이지만 세계 시장에서 보면 중기업밖에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업은 더 커져야 한다."

그러나 이들 논리에는 결정적 오류가 있다. 우선은 국가경제의 경쟁력을 (기업이 아닌) 대기업의 경쟁력과 동일 선상에다 놓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경제의 경쟁력은 경제체제의 '효율성'에서 비롯된다. 좋은 경제체제라는 그릇에서 강하고 효율적인 기업들이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기반과 세계화라는 틀 속에서는 효율성이 떨어지는 국가나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다. 효율성의 기제를 찾아 제대로 작동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국가나 기업번영의 길을 가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 효율성은 어디에서 나올까' 효율성은 자유경쟁 또는 공정경쟁이 보장되는 시장, 즉 '자유시장(Free Market)' 경제에서 나온다. '우리나라에도 과연 자유시장이 존재할까' 답은 불행하게도 '아니오'에 가깝다. 공정 경쟁질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앞서 말한 '대기업의 불공정 경쟁'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

차근차근 성장해 30대 그룹에 명단 올린 기업 '0' 

전체 48개 명단을 봐도 중소기업에서부터 성장한 그룹은 웅진과 세아 둘밖에 없다. STX도 과거 범양상선과 쌍용중공업을 합병하면서 M&A로 성장한 기업이라서 중소기업부터 착실하게 성장한 기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체 48개 명단을 봐도 중소기업에서부터 성장한 그룹은 웅진과 세아 둘밖에 없다. STX도 과거 범양상선과 쌍용중공업을 합병하면서 M&A로 성장한 기업이라서 중소기업부터 착실하게 성장한 기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경제가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 특히 우리나라처럼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에 육박하고 인구가 5천만이나 되는 나라의 경제가 효율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좋은 대기업도 많아야 하지만 그것을 떠받치는 좋은 중소기업은 더 많아야 한다. 좋은 중소기업이 많아지기 위해서는 창업의 토양이 갖춰져 있어야 하고, 한발 더 나아가서는 좋은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경제는 과연 어느 수준인가? 2009년 4월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발표한 대기업 집단 지정현황이 그 대답이 되어준다. 30위까지의 대기업 집단 중에서 공기업이나 준 공기업에 해당하는 기업 9개를 제외하고 나면 나머지 21개중에서 삼성, 현대, LG, SK, 롯데, 두산, 한화 등 익히 알려진 대기업이나 그로부터 분사한 기업들이 17개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4개 중에서도 3개는 현대와 대우로부터 분리된 구조조정 기업들이고, 새롭게 이름을 올린 기업집단은 STX 하나뿐이다. 그나마 STX도 과거 범양상선과 쌍용중공업을 합병하면서 M&A로 성장한 기업이라서 중소기업부터 착실하게 성장한 기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난 80년대 이후 중소기업에서부터 차근차근 성장해서 국내 30대 그룹에 새롭게 명단을 올린 기업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전체 48개 명단을 봐도 중소기업에서부터 성장한 그룹은 웅진과 세아 둘밖에 없다. 웅진은 대기업이 사회 비난을 두려워해서 들어가기 힘든 사교육 시장에서 성공한 경우라서 명단에서 제외하는 것이 맞다고 보면, 48개 대기업집단에서 중소기업으로부터 착실히 성장한 것은 세아그룹 하나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캡티브 마켓에서 SSM의 횡포까지

이런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우리나라 경제는 좋은 중소기업이 생겨날 토양이 거의 전무하다. 대기업들이 중소기업 영역까지 다 뛰어들어 예비 창업자들이 설자리를 없애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웅진의 사례처럼 대기업이 사회적 비난 때문에 도저히 뛰어들 수 없는 사교육 시장과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자기들이 해버린다.

우리나라에는 오라클, 썬 마이크로 시스템즈와 같은 대기업집단 소속이 아닌 독자 SI 대기업이 없다. 광고업도, 물류업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대기업집단 소속이거나 그로부터 파생된 기업들뿐이다. 캡티브 마켓(Captive Market, 그룹내 시장)을 가지고 있는 업역은 모두 대기업집단에서 진출해서 전문적인 역량을 가진 전업기업이 출현할 여지를 원초적으로 차단해버리고 있다.

또한 캡티브 마켓이 없더라도 대기업의 손이 뻗치지 않는 곳은 없다. 오죽하면 전통적 자영업자 업역까지 대기업이 진출하고 있지 않는가. 1990년대에 들어선 뒤 우리나라 재래시장은 대부분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할인마트에 밀려 언젠가부터 설 자리가 없어졌다. 동네 구멍가게들도 대기업 집단에서 진출한 편의점이 장악했다. 최근에는 편의점과 마트의 중간쯤 되는 기업형 슈퍼마켓(SSM) 사업까지 확장하고 있어서 이러다간 우리나라에서 재래시장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가 되고, 구멍가게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될는지도 모른다.

공급망관리(Supply Chain)가 강력한 산업 내에서 대기업과 협력관계, 소위 갑-을 관계에 있는 중소기업도 설자리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자동차, 전자산업처럼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동반해서 살아가야 하는 업종에서 대기업은 협력업체가 간신히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마진만 보장해준다.

갑과 을의 관계를 수요자 독점(Monopsony, 공급자독점 Monopoly의 반대말)으로 만들어 옴짝달싹 못하는 종속적인 관계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서는 납품업체에게 비용 떠넘기기를 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역시 강력한 수요 독점 관계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협력업체가 독자적인 경쟁력을 가진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IMF의 교훈과 노키아의 함정

이와 같은 불공정한 체제의 온상은 역시 과거 개발경제 시대의 대기업 우선 정책에 기인한다. 박정희 정권에서는 중소기업의 희생을 통해서 대기업을 육성했다. 그 능률우선주의는 지금의 경제력 집중을 가져왔고, 그렇게 집중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기업이 경제력을 더 키워가는 악순환이 고착화되었다. 그렇게 대기업 중심의 국가를 만들었다가 외환위기 당시 그 대기업의 부실화로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던 뼈아픈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다.

대기업을 대변하는 단체에서는 툭하면 핀란드의 노키아를 예로 거론한다. 핀란드는 노키아라는 대기업 하나로 온 나라가 먹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핀란드는 인구 524만 명의 소국에 불과해서 인구 5천만 명의 대국에 가까운 우리나라와 비교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더구나 핀란드가 노키아 하나로 지금은 잘 살고 있지만, 만약에 노키아가 미국 GM처럼 망해버리면 나라 전체가 망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진짜 노동시장이란 존재하는가

노동시장이라는 것은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협력적 경쟁관계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서로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 협력하면서도 그 협력의 과실인 이익을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경쟁하는 관계여야만 한다.

히말라야 설산에 가면 머리가 두 개 달린 커다란 뱀에 대한 전설이 전해진다. 그 뱀의 머리는 항상 교대로 잠을 자는데, 깨어 있는 머리가 먹잇감을 사냥하는 식이다. 그러던 중 유독 머리 하나가 깨어 있을 때만 먹잇감이 나타났다. 덕분에 하나는 연거푸 배를 채웠지만, 나머지 머리 하나는 먹잇감의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다. 이럴 때 먹이를 많이 잡은 머리가 잠자는 머리를 위해서 좀 남겨뒀어야 하는데 자기 혼자 먹을 욕심에 모조리 다 먹어버렸다. 자다 깨어난 머리는 결국 이 사실을 알아챘고, 격분한 나머지 너 죽어봐라 하고 독을 먹었고 결국은 두 머리가 다 죽어버렸다.

노사관계도 머리가 두 개 달린 뱀과 같다. 서로 더 많이 먹기 위해서 경쟁은 하지만, 잠자는 머리를 위해서 먹을 것을 조금은 남겨줘야 한다. 더군다나 먹을 것을 남기지 않았다고 해서 독을 먹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실상은 사뭇 다르다.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에는 회사의 발전을 위한 협력은 없고 이익을 더 많이 챙기기 위한 경쟁 혹은 대립밖에 없다.

차라리 비정규직 월급을 늘려라

비정규직 문제도 심각한 상황이다. 기업 경영에서 비정규직은 꼭 필요하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노동시장이 경직된 나라에서는 더욱 그렇다. 시장상황에 따라서 사용자가 탄력적으로 인력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고용보장은 원초적으로 사용자가 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설사 힘겨운 투쟁을 통해 사장으로부터 고용보장 각서를 받는다고 해도 시장에서 물건이 안 팔리면 소용없다. '고용을 보장해주는 것은 시장(市場)이지 사장(社長)이 아닌 것이다.'

반면 비정규직 근로자의 처지에서 보면 처한 상황이 너무나 다르다. 경기가 나빠져서 해고를 당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생존을 위협받는 것이다. 해고당하는 순간부터 생계가 막막해진다. 그렇다면 소위 잘릴 확률이 높은 비정규직일수록 당연히 정규직보다 월급을 더 많이 받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비정규직은 고용 안정성도 없고 급여도 정규직보다 적게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의미의 노동시장이 존재하기란 어렵다. 애초부터 사용자와 노동자 간의 경쟁적 협력관계가 성립되기는 쉽지 않을 뿐더러 항상 극렬한 갈등과 대립이 표출될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이렇다

가장 본질적인 해결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모색하는 것이다. 대기업은 자본력, 정보력, 마케팅력을 가졌다. 반대로 중소기업은 신속하고 유연한 경영체제라는 상대적 우위를 갖고 있다. 이 두 가지 장점이 결합해서 시너지가 발휘되는 관계를 만들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관계가 수직적 종속 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 같은 협력관계의 구체적인 사례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동 R&D를 통한 지적 소유권 공유나 해외 동반진출을 통한 동반성장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노사관계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 사용자나 노동자 모두 서로 간의 의견 차이를 십분 감안해주는 배려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정부 차원에서 중소기업의 육성을 위해서 힘써 노력해야 한다. 역대 정부 중에서 중소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던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벤처 육성정책밖에는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그때 벤처 육성정책 덕분에 우리는 상당한 수의 기술력을 지닌 중소기업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또 그들 중 일부는 상당히 큰 기업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정부가 부지런을 떨어야 될 3가지 일

근본적으로는 정부의 몫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위에서 말한 대기업과 협력관계에 있는 중소기업에 대해 대기업과의 공동 R&D나 동반 해외진출시 정부 차원의 인센티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대기업에는 세제상의 인센티브를 제공해서 유인하고, 중소기업에는 R&D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방식이다.

그 다음은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가 삶의 포기를 강요받는 걸로 인식되지 않도록 사회안전망을 대대적으로 확충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정리 해고된 실직자가 노숙자로 전락하는 것은 순식간이며,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노동자가 이런 불안감을 느끼지 않도록 정부가 제도를 정비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 비정규직은 인정하되 최소한 동일직무 동일임금은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제도개선이 필요하다. 이런 제도를 착실히 정비해 나가면서 노조의 불법적인 파업도 막기 위해서 사회적 대타협을 만들어 내야 한다.

중진국 수렁에서 벗어날 비장의 무기가 우리에게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 선진국 진입을 문턱에 두고 번번이 좌절하는 중진국 수렁에 빠져 있다. 지난 1997년에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2만 달러를 뛰어넘는데 실패했다. 이번에는 서브프라임 위기로 인해서 또 다시 경제가 주저앉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나 인도와 같은 거대국가를 제외하고 개발도상국 중에 선진국으로 도약할 가능성을 가진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해도 무방하다. 물론 많은 국가들이 아르헨티나처럼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해버리는 것을 보아왔듯이 선진국으로의 도약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진국으로 도약할 잠재력이 있음은 틀림없다. 세계적 석학인 피터 드러커도 우리 국민들처럼 성공 지향적인 국민성을 가진 나라는 세계 그 어디에도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일본의 경우를 보면 회사에 입사를 하면 사람별로 사장까지 갈 사람, 임원까지는 할 사람, 과장으로 끝날 사람이 거의 정해진다. 그리고 그런 평가를 일본인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생의 행복을 일 이외의 것에서 찾는다. 만년 과장의 이야기를 그린 일본 영화 '쉘 위 댄스(Shall We Dance)'에도 그러한 일본인들의 가치관이 잘 나타나 있다.

만일 우리나라에서 '넌 만년과장으로 직장생활을 마감해야 해'라고 하면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까? 사표를 던지고 다른 직장을 찾아가든지 아니면 죽기 살기로 일해서 승진을 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국민성에 배어 있는 성취동기가 우리의 무한한 잠재력이다.

도둑질 하지 말라, 네 이웃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그러나 성취동기만으로는 안 된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이는 곧 효율성이 제대로 작동되는 시장, 즉 대기업의 불공정 경쟁이 사라지고, 공정경쟁이 보장되는 시장을 말한다.

해법은 의외로 간단한 데 있다. 기본을 지키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도둑질하지 말라", "네 이웃의 재물을 탐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기독교 10계명의 하나이며, 또한 양심 있는 인간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리다. 시장우월적인 힘을 빌려 약자의 몫을 빼앗으려 하지 말고 공평하게 공정경쟁을 하는 사회, 시장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는 경제구조를 만들어 갈 때, 이미 우리는 선진국의 문턱을 넘고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계안 기자는 17대 민주당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태그:#대기업 불공정 경쟁, #공정경쟁, #자유시장경제, #캡티브마켓, #S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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