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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잠재력과 가공할 만한 위력

 

질병이나 고통은 사람에게 직접적인 자극을 준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공포'의 대상이다. 정치적 선동가들이 '암세포' 같은 병을 비유하고, 히틀러가 전체주의를 강요하면서 대수술 같은 처방을 비유로 든 것은 병이 주는 공포의 은유를 알기 때문이다. 질병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하는데, 수술이라는 더욱 강력한 고통을 통해서 삶을 유지하느냐, 더 큰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로 질병이 안내하는 죽음의 길로 가느냐라는 두 개의 선택지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들 부시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했던 앨 고어는 <이성의 위기>(중앙books)에서 공포가 이성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공포와 이성은 모두 인간을 행동으로 이끄는 강력한 동인이 되지만 권력자는 '공포'에 유혹을 받는다.

 

한편 질병의 상태는 그 자체로 인간을 고양시킨다. <은유로서의 질병>(이후)이라는 한 권의 책을 통해 내 평생의 의문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나의 경우 '열정'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오랫동안 고민을 했는데, 그것은 오랜 질병 상태를 통해서 고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개인사로 보는 질병(고통)과 열정의 상관관계

 

 질병 자체가 아니라 질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식과 오해가 문제라는 수전 손택이 주장은 단지 병에 걸린 사람뿐만 사회인 모두에게 해당한다. 병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기 떄문이다.

비록 신생아라고 할지라도 질병에 오래도록 둘러싸여 있다면 성숙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목숨을 건 싸움이라면 더욱 그렇다. 신생아와 유아기 동안에만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맞았다. 부모님은 세 번이나 각서를 썼다. "아기가 죽어도 의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당시로서는 일상적인 각서라고 한다. 그리고 내 옆에 언제나 '삽'을 준비하셨다. 내일 당장 하늘나라로 가버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병명은 급성폐렴, 임파성 결핵, 동맥절단 등이다.

 

너무 이른 나이에 과다한 항생제를 쓴 탓에 신생아 때 머리가 홀랑 다 벗겨졌고,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땜통'이라는 어감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던지 내 유년시절의 상처를 상징하는 단어로 남아 있다. 무서운 질병들로 인해 나의 체질과 성격은 스무살이 될 때까지 완전히 주눅들어 있었다.

 

감기에만 걸려도 꼬박 두 달간 병원에 다녔다. 병원에서 <보물섬>이라는 어린이 만화잡지를 즐겨 봤는데, 의사 선생님이 부를 때마다 <보물섬>에게 "다음에 병원오면 또 봐야지"하고 말을 걸곤 했다. 병원에 오는 패턴이 5일장처럼 지속되다 보니 연속성이 생긴 것이다.

 

그 당시 얼마나 민감해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사례가 하나 있는데. 그때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딜레마가 하나 있었다. "만약 지옥에서 누군가 엄마의 목숨과 1000명의 목숨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어떻게 선택해야 하나?"였다. 어린 나이에 왜 이 문제에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는지 모를 일이다. 때로는 엄마의 목숨을, 때로는 1000명의 목숨을 선택하며 마음속으로 괴로워했다.

 

"폐병은 자네처럼 멋진 시를 쓰는 사람들을 특히 좋아하는 병이라네..."(시인 셸리가 키츠를 위로하며)

나는 계속 기침을 내뱉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침 때문에 내 모습이 추해지기는커녕, 내게 매우 잘 어울리는 우수 어린 분위기가 생겼다. (마리 바쉬커체프)

 

도스도예프스키는 평생 간질에 시달렸다.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들이 질병이나 고통과 직접 관계되는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를 연구한 수많은 비평가들은 '간질'이라는 키워드가 도스도예프스키라는 인물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서양에서 '벼락'이 치면 엎드려서 하늘에 죄를 비는 것처럼, 중국에서는 '질병'에 걸리면 역시 엎드려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신에게 용서를 비는 풍습이 있었다. 신이 질병을 통해서 인간의 잘못을 꾸짖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주 일리가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32년 동안 질병 상태나 고통이 없는 상태가 거의 없었다. 몸의 고통과 마음의 고통을 합친다면 아마 모든 시간을 고통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을 때, 어떤 아픔이나 고통이 없는 상태를 매우 이상해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비해 무척 행복해해하고 괜히 고마워했던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오장육부가 다 안 좋고, 왼쪽 팔은 오십견 걸린 것처럼 아프고 치아는 씹는 것을 두려워한다. 눈은 예전부터 안 좋아 안경을 썼다. 왼쪽 다리는 수술 때문에 걸음걸이에서 묘한 불균형을 만들어낸다. 오장육부 신체기관 마디마디 중에서 괜찮은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부모에게 받은 건강복도 없을 뿐더러 신생아 때 죽음의 문턱을 넘어오면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질병 마디마디, 고통 순간순간마다 내 감정은 고양되었고 내면은 거의 여성에 가까울만큼 섬세해졌다.

 

질병에 시달리는 고통과 견뎌내는 고통의 어마어마한 차이

 

그 사망자의 수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많고, 별다른 치료도 먹혀들지 않은 주요한 질병일수록 그 질병은 무수한 의미들에 시달리는 경향이 있다. (88쪽)

 

질병과 고통이 인간에게 주는 자극이 엄청나고 직접적이기 때문에 질병의 비유는 단련되거나 악용될 것이다. 하지만 질병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서 우리의 운명은 달라질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님은 시민들을 향한 감사 인사에서 "제 남편은 평생 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히틀러의 독일 국민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좋은 비교 대상이 된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고통은 하나의 시험이기도 했다. 불의에 타협하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권력이 주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의 고통에 처해지는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모함과 저주의 고통에 시달렸다. 김대중 대통령에게 이런 고통은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고통'의 성격을 바꿔놓았다.

 

사실 질병과 인간의 관계에서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히틀러의 독일 국민들은 고통에 시달렸고 고통을 피하려고 했기 때문에 히틀러가 제시한 허무맹랑하고 위험천만한 수술방식을 지지했다. 애꿎은 독일국민 탓할 것이 아니라 작년의 대한민국 국민만 하더라도 정체모를 고통을 없애주는 만병통치약 '뉴타운 처방약'에 열광해 한나라당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병이 환상이 되고 약장사의 영업 대상이 될 때 불행한 운명과 만난다.

 

나는 신념적으로 병과 고통은 일종의 메시지를 머금고 있다고 생각한다. 메시지를 받기 위해서는 고통을 피하려 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현명하지 못하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고통을 두려워하고, 가능한 한 문제를 피하려고 한다. 때로는 문제를 질질 끌면서 저절로 없어지기를 바란다. 무시하거나 잊어버리려 하고, 문제가 없는 것처럼 여기려고 한다. 심지어는 고통을 잊어버리기 위해 약물을 먹고 자신을 마비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문제가 생기면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고 주변을 맴돌면서 달아나려고 한다. 그러나 문제와 고통을 피하려는 이런 태도가 바로 정신 건강을 해치는 원인이 된다. - 스캇 팩 박사, <아직도 가야 할 길>(열음사) 일부

 

고통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자에게는 최고의 재앙이 뒤따르고, 고통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그 메시지를 얻으려는 자들은 한 단계 성장한다. 사실 수전 손택이 이 책을 통해서 던지려는 메시지도 이것이다.

 

손택은 자신의 책이 에이즈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에이즈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다룬 책-그러니까, 에이즈를 다룬 또 다른 책이 아니라, 그저 에이즈를 주요 사례로 들고 있는 책"이라고 설명해 줬다. - 부록, 수전 손택과의 대화 일부(243)

 

질병에 관한 주제선별도 그렇고 이를 통해 추구한 메시지도 그렇고, 영감을 주는 작가의 특징은 어떤 주제로 출발하건 간에 인간의 주요한 문제로 되돌아오는 것 같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질병이라는 주제어가 생뚱맞았지만,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이 주제가 우리에게 무척이나 중요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에도 올렸습니다.


은유로서의 질병 - 이후 오퍼스 0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이후(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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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놀이 책>,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 <공자, 사람답게 사는 인의 세상을 열다> 이제 세 권째네요. 네 번째는 사마천이 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