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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이후 처음으로 광역단체장 주민소환 투표를 앞두고 있는 제주도. 이번 주민투표와 관련 이규배 탐라대 교수가 오마이뉴스에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 교수는 일본 와세다대에서 일본정치사를 전공했으며, 제주4.3연구소 소장과 제주해군기지반대대책위원회 상임공동대표 역임하고 이번 '김태환지사 소환운동본부 100인 대표'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교수의 글은 세 차례 실릴 예정입니다. [편집자말]
ⓒ 주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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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엄습하는 모든 태풍은 제주를 지나야 본도에 당도한다. 미증유의 역사도 태풍처럼 지금 제주를 거쳐가고 있는 중이다. 광역자치단체장인 김태환 도지사에 대한 대한민국 첫 주민소환이 제주에서 실현되었고, 이에 따라 소환투표가 8월 26일로 확정되었다. 주민자치와 민주주의의 성숙함 정도가 제주에서 첫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그러나 소환을 실현시킨 운동본부나 소환을 당한 도지사나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이 운명의 잔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멀쩡한 도지사를 소환하자고 10%가 넘는 제주 유권자가 서명할 리는 없을 터, 그래서 이 난국을 자초한 장본인은 도지사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까지 자신의 신원을 전면 노출해야 하는 까다로운 소환서명지였다. 이런 서명지에 소환투표청구 요건인 유권자의 10%(4만 1천 여 명)의 무려 두 배에 근접하는 7만 7천여 명이 동참한 사실만으로도 이미 도지사는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진배없다. 그것도 법정 청구서명기간인 4개월을 채 사용하지도 않고 불과 46일 만에 달성된 것이다. 제주도민들은 이 불가능하다던 대하(大河)를 건너 이제 소환투표라는 고지를 넘어서야 하는 험로에 직면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제주 땅에서 이런 초유의 거사가 발생했을까?

제주도민들은 도지사에게 행정권한을 한시적으로 '위임'했을 뿐이다. 도민의 생존에 관한 여탈권을 양도한 것도, 도민이 도지사에게 정복당한 것도, 굴복한 것도 아니라는 의미다. 최소한 주권자인 도민들의 총의(總意)와 생명, 재산, 자유를 온전하게 지킨다는 전제 하에 도지사의 일시적인 권한행사를 '허락'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기까지 제주도지사는 '지사가 곧 제주도'이며 '지사의 생각이 곧 제주도의 정책'인 것처럼 동의와 합의도 없는 권한을 지나치게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휘둘러 왔다.

그의 전횡은 단순한 허물이나 과실이 아닌 죄악에 가까웠다. 그래서 더 이상 도지사의 이탈된 폭주를 참을 수 없는 제주도민들이 그에게 한시적으로 위임했던 권한을 이제 회수하겠다고 결단한 것이다.

움직이는 제주해군기지, '넌 크루즈?'

7일 오전 한림 성이시돌 요양원에서 입소 노인들과 '말벗' 봉사활동 중인 김태환 주민소환대상자.
 7일 오전 한림 성이시돌 요양원에서 입소 노인들과 '말벗' 봉사활동 중인 김태환 주민소환대상자.
ⓒ 김태환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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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군기지 문제는 제주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너무나도 민감했던 일대 현안이었다. 그러나 해군기지는 '국책사업'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기지반대에서 찬성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입장들이 있었고, 그만큼 심도있고 주도면밀한 논의와 공론화를 필요로 하는 사안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만일 고민과 연구 여하에 따라서는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는 대안제시도 가능할 것으로 보였으며, 그래서 모두가 결과에 승복할 수 있는 대안 마련을 위해 거도적인 중지가 절실했다.

그러나 이 절호의 기회는 무엇엔가 쫓기는 도지사에 의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곤 도지사 재임 기간(2004.6.5~2009.8.6 직무정지) 대부분 해군기지문제를 둘러싸고 제주는 갈등과 분열로 큰 생채기를 남겼으며, 후보지로 거론됐던 세 군데 마을공동체는 하나같이 파괴되고 말았다.

그 첫 후보지는 제주도 서부지역에 위치한 산방산이 보이는 화순항이었다. 2002년 해군기지 건설계획이 처음으로 발표되었다가 논의가 잠정 유보된 뒤에 재차 해군기지 건설계획이 보도된 것은 2005년이었다. 화순항 해군기지 도민대토론회가 단 한 차례 개최(2005․5)되기는 했지만, 제주도를 특별자치도로 만들기 위한 '행정계층구조개편' 주민투표(2005․7)와 지방선거(2006․5)로 인해 해군기지를 둘러싼 논의는 자연 보류되었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해군기지를 둘러싼 본격적인 논의는 2006년 중반기가 지나면서부터이다. 화순항 일대 주민들은 찬반논의로 대립이 격화되었으나, 압도적인 주민의 반대 총의를 통해 수용불가를 결정하였고 반대시위가 전도를 뜨겁게 달궜다. 후보지 선정에서 철회가 결정될 때까지 허비한 세월은 무려 5년이었다.

두 번째 후보지였던 서귀포시 동부에 위치한 위미항 일대 주민들도 같은 길을 걸어야 했다. 발단은 화순지역에서 해군기지 반대시위가 한창인 2006년 5월에 위미지역 해군기지유치추진위에서 해군기지 유치 결정을 발표한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두 달 뒤에 위미리 주민들은 임시마을총회를 개최해 만장일치로 해군기지 반대 입장을 결정한 것이다.

문제는 해군기지 유치를 결정한 해군기지유치위원회란 것이 지역주민들의 의사를 고려하지도 않고 주민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은 채 일부 인사들의 결정으로 구성됐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위미지역의 해군기지 반대시위는 2007년 4월에 들어서도 점점 열기를 더해 갔다.

도지사에게 불의의 기습을 받은 '강정마을'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바라본 바다.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바라본 바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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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을 대체한 위미에서 해군기지 반대시위가 한창이던 2007년 4월 26일, 서귀포시 서쪽에 위치한 강정마을에서는 취재진은 물론 모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한 채 철저하게 비공개로 진행된 마을총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그리고 1시간 지난 뒤 마을총회는 투표절차도 없이 '해군기지 강정마을 유치' 결정을 내리고, 회의 과정과 내용은 물론 결과까지도 함구령을 발했다.

그러나 당일부터 이 마을총회에서는 다양한 의견 수렴절차가 생략된 데 대하여 일부 주민들이 불만을 터뜨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 다음 날 강정동마을회(회장 윤태정) 지역주민 30여명은 기자회견을 열고 해군기지 유치 결정 입장을 공식화하게 된다. 파란에 휩싸이게 되는 강정마을은 이렇게 해서 세 번째 후보지로 급거 부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곳 마을주민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마을이 해군기지 후보지로 선정되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모든 마을에는 마을총회란 것이 있고, 중대 사항은 마을규약에 따라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소집된 총회에서 의결을 거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 해군기지 유치신청은 종래의 관행을 무시한 탈법적인 절차와 결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미 도지사는 2007년 4월 10일에 여론조사 방식을 통해서 최종 후보지를 결정하겠다고 발표한 바가 있었는데, 강정동마을회의 유치신청은 이보다 보름이나 지난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강정동마을회의 해군기지 유치신청을 접한 도지사는 화순-위미-강정 세 마을 가운데 적지를 결정하는 것으로 전격 발표하게 되며, 결국 두 차례에 걸쳐 실시된 문제투성이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5월 14일 강정이 해군기지 최종 후보지로 결정되었음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강정동마을회의 해군기지 유치신청에서 1차 여론조사 실시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1주일, 강정마을이 최종 후보지로 발표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8일. 화순과 위미에서 수 년 씩이나 표류하던 문제가 강정에서는 이렇게 결정된 것이다.

평화로운 일상을 살고 있던 강정마을 주민들은 '어버이'처럼 자신들을 지켜줘야 할 도지사에 의해서 불의의 기습을 받은 것이다. 아무런 논의도 준비도 없던 주민들은 그렇게 처참하게 자신들의 운명이 결정되어야 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상식적인 주민이라면 누가 자기 마을에서 일어난 이런 현실을 납득할 수 있겠는가? 마을주민들에게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고, 그래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강정동마을회의 전격적인 해군기지 유치결정처럼 이들 강정마을 주민들은 해군기지를 찬성했을까? 같은 해 8월에 실시한 '강정해군기지 유치 찬반 주민투표'에서 강정 주민들은 94%에 달하는 압도적 반대로 해군기지 유치반대를 결의했다. 탈법적인 방법으로 해군기지 유치결정한 마을회장이 마을총회에서 해임된 것은 그 때문이다. 평화로웠던 마을은 산산조각이 나기 시작했고, 모든 생업을 포기하며 2년이 넘도록 이어지는 처절한 반대시위는 그래서 막이 올라갔다.

하소연도, 애원도, 통곡도 소용이 없었다

강정마을 주민이 제주도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모습이다. 지난 2007년 제주도가 강정마을 해안을 해군기지 예정지로 결정한 이후, 마을 주민들이 이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며 2년 넘게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 1인 시위 강정마을 주민이 제주도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모습이다. 지난 2007년 제주도가 강정마을 해안을 해군기지 예정지로 결정한 이후, 마을 주민들이 이를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며 2년 넘게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 장태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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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제주해군기지 유치 건이 본격 부상했을 당시, 후보지역의 마을주민만이 아니라 제주도민의 대다수도 기지와 관련된 정보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최종 후보지 선정을 위한 여론조사 직전에 실시된 여론조사(한라일보․KCTV․코리아리서치 공동조사, 제주MBC 단독조사)에 따르면, '해군기지 정보 부족'이라고 응답한 사람이 무려 70%에 달하고 있었다. 해군기지가 갖는 의미에 대해 도민들은 아직 무지한 상태라는 경고 메시지였다.

이 때문에 보다 활발한 토론과 공론화에 대한 제주사회의 요구도 봇물처럼 이어졌고, 후보지 선정방식에 대한 의견도 '도민투표'를 포함하여 다양한 안이 제기되었다. 해군기지가 제주의 미래에 끼칠 불확실한 불안감 때문이다. 그러나 도지사는 이런 도민의 총의를 무시하며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여론조사를 강행처리했다.

해군기지에 대한 찬반 양론은 존재할 수 있고,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더더욱 존중되어야 할 것은 도민사회의 총의와 여론일 것이다. 그러나 도지사는 이 모든 것과 절차와 합의의 정신을 유린한 것이다.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도지사는 마치 식민지 제주를 점령한 총독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셈이다. 이런 권력남용은 도지사가 저지른 죄악 가운데서도 매우 중대한 유죄에 해당된다.

도지사가 더더욱 용서받을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해군기지 자체를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으나, 강정 주민들은 해군기지라는 국책사업의 불가피성은 인정하고 있었다. 오로지 단 한 가지 조건만이 있었다. 마을주민들의 뜻을 물어봐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수의 강정주민들이 찬성하면 해군기지를 수용하겠다는 의사표현까지 공식화했다.

도지사에 대한 끊임없는 면담요청이 이어졌다. 하소연도, 통곡도, 애원도, 절규도 있었다.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끊겠다는 결연한 항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절실한 바람은 철저히 외면되었고, 소통과 대화를 요구하는 주민들의 처절한 목소리도 참담하게 무시되었다. 안하무인격의 도지사 행태에 분개한 도민들은 주민자치와 절차적 민주주의의 원칙, 그리고 제주의 미래가 송두리째 파괴되었음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만일 그대라면 이런 행위를 도지사의 '고유한 행정행위'로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과연 그대라면 이런 도지사에 대해 관대한 시민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 믿는가?

도지사로서의 자질과 역량과 미덕을 상실해버린 오만무도한 독재자에 분개한 도민들은 도지사 소환서명운동으로 속속 결집되었고, 그래서 도지사측에서도 불가능할 것으로 예측했다던 소환요건을 겨우 46일 만에 갑절 가까이 달성했던 것이다. 문제는 보다 심각한 도지사의 죄악이 더 있다는 사실이다.

덧붙이는 글 | 기사 2, 3편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태그:#주민소환, #김태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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