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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이 임박한 사형수가 있다. 모든 법적 절차가 끝나서 이제 집행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런데 그가 진범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게 하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억울한 죽음을 막기 위해 그의 사형집행을 연기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연기의 목소리는 온당하고 시급해 보인다.

문제는, 사형집행이 이미 2년간 유예 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가 무죄일 것이라는 점은 2년 전에도 알려져 있었고, 그래서 2년만 두고 보아 유죄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특별사면으로 풀어주기로 합의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2년이 다 되자, 혹시 사회안전에 해가 될지도 모르니 더 가둬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답은 유예가 아니라 석방이다. 2년간 유죄를 확인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는 이제 와서 조사를 못했으니 풀어줄 수 없고, 유예가 되지 않으면 사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억지다. 그리고 유예가 아닌 석방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사형수의 생명에 대해 책임지라는 것은 가증스럽다.

더 큰 문제는 유예를 해도 그 기간 동안 충분한 조사를 할 의지도, 그 유예기간이 끝나면 이번에는 꼭 풀어주리라는 생각도 별로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사형수의 입장에서 보면 기가 막힐 일이다. 2년 전에 마땅히 풀려났어야 하는데, 모범수로 살면 풀어준다며 2년을 더 가두어두더니, 이젠 그걸 또 연장하겠단다.

그리고 그 연장 기간 후에도 희망이 없어 보이니, 유예는 연명 이외의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이미 정신적으로는 두 번 세 번 사형을 당한 것이고, 앞으로도 매일이 그러할 것이다. 그래도 살아 있는 게 낫지 않느냐고 한다면, 이건 이미 협박이다. 물론 살아 있는 것이 죽는 것 보다는 낫다. 그러나 그는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는 결백한 피해자이다. 따라서 이 모든 상황은 너무 불합리하고 억울하다.

지금 온통 정치권의 싸움거리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법 논란을 보면서 이보다 더한 자가당착은 없다고 느낀다. 2년의 유예기간 후에 이제 또 유예를 늘리자고 한다. 아니면 모두 해고라고 협박한다. 그러면서 유예를 주장하는 자신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비정규직을 생각해주는 거라고 강변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2년 전에 충분히 예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너희를 위한 일이니까 가만 있으라'고 윽박지르며 법을 통과시켰다. 2년만 참으면 된다는 사탕발림과 함께… 하지만 그 2년의 지옥 같은 노동의 시간은 아무런 보완조치도 없이 마냥 흘러가 버렸다. 지금 할 일은 유예가 아니라 정규직 전환이다.

이제 유예기간을 늘리자고 하는데, 그 기간 후에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줄 것 같은 분위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이번의 학습효과로 인해 한번 더 유예하자는 배짱도, 시기가 되면 다 자르겠다는 잔인함도 지금보다 더 강해질 것이 확실하고, 비정규직은 더욱 불쌍한 처지가 될 것이 분명하다. 파리목숨이다.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한민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권을 유린당하는 삶이다. 기형적인 노동형태의 고단함은 인간에게 합당한 삶의 수준을 박탈하며,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불안함은 그나마 인간의 마지막 존엄성마저 누릴 수 없게 한다.

세계인권선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23조
1. 모든 사람은 근로의 권리, 자유로운 직업 선택권, 공정하고 유리한 근로조건에 관한 권리 및 실업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동등한 노동에 대하여 동등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3. 모든 근로자는 자신과 가족에게 인간적 존엄에 합당한 생활을 보장하여 주며, 필요할 경우 다른 사회적 보호의 수단에 의하여 보완되는,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4.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가진다.

60년 전에 모든 정부의 의무로, 모든 사람의 권리로 선포된 이 조항이 21세기 오늘, 대한민국의 비정규직에게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비정규직을 살려야 한다고, 자기들의 의견에 반대하면 해고밖에 없다고 거품을 무는 사람들에게 과연 인권에 대한 최소한의 고려는 있는 것일까? 인권을 존중할 국가의 의무가 헌신짝처럼 내팽개쳐진 2009년 대한민국, 우리는 모두 유예된 사형수들이다.

노동유연화를 국가가 가야 할 지고지선의 목표라도 되는 양 당당히 떠드는 앞에서 나는 할 말을 잊는다. 거대한 경제기계가 되어버린 이 사회에서 나는,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국가경제를, 기업을 위해 태어난 소모품일 뿐이라는 말인가. 그저 하루하루 연명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존재인가. 오늘 우리에게 국가는, 사회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다시 한번, 상황을 바꿀 책임은 시민들에게 있다. 지옥의 입구 앞에서 혼자 살 길을 찾는 노력은 허망하다. 힘을 합쳐 지옥문을 막는다면 모두 함께 살 가능성은 존재한다. 체제가 우리의 인권을 짓밟지 못하게 하자. 국가가 우리를 집어삼키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하자. 그래서 모두 함께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하자.

비정규직과 관련한 방송에서 일단 기업이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고 당당히 떠드는 것을 듣고 이 글을 씁니다. 노동자가 살지 못하는데, 기업이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논리인가요? 하지만 그들은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쳐 기업을 살리고 나머지 사람의 배를 불리려는 것입니다.

이 글은 저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국제앰네스티나 한국지부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앰네스티일기 블로그(http://amnesty.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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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비정규직, #인권, #해고, #유예, #정규직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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