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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몸에 맞지 않는 것처럼 어색한 생활이 다른 이에게는 일상이 될 때가 있다. 시골에서 초등학교에 다닌 나로서는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마주한 도시아이들(?)의 생활방식이 그랬다.

 

일례로, 방과 후 당연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나와 달리 학원이라는 곳으로 짝지어 이동하던 친구들의 모습이 나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그건 학원을 왜 다녀야 하는지에 대한,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공부에 대한 도시와 농촌의 시각차에서 비롯된 일이다.) 또 몇몇,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풍경이 그 도시친구들을 통해 눈앞에 펼쳐지곤 했는데, 나는 가끔 그 친구들과 내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믿기지 않곤 했다.

 

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에는 그런 정서가 잘 녹아있다. 오히려 내가 느꼈던 감정보다 훨씬 더 묵직한 뭔가가 느껴지는 그런 '만화'다. 이야기는 분명 그림으로 구성돼 있는 만화지만, 끝까지 읽고 난 뒤에는 한편의 역사책을 읽은 느낌마저 든다.

 

"그들의 반대편에는 전통사회의 바닥에 깔려 있다가 느닷없이 닥쳐온 파도에 밀려 끝없이 떠돌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다. 갑자기, 그리고 너무나 늦게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마치 물 마른 강바닥에서 소용도 없는 아가미를 꿈벅대는 물고기처럼 미처 제 삶의 방식을 손볼 겨를도 없이 허우적대야 했던 사람들. 그들을 키웠던 곳은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의 일상이었던 것들은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게 되어 버린 사람들. 나는 그들을 '대한민국 원주민'이라고 이름 붙였다." (작가의 말 중)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세상의 변화 속도에 적응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삶과 생활방식을 빼앗겨 버린 사람들. <대한민국 원주민>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만화 속 그런 사람들은 작가 최규석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과 누나들, 작가 자신을 포함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작가의 말대로 술만 먹으면 반복하는 아버지의 지겨운 무용담일수도 있고, 생활사박물관에서 듣지 않으려는 아이를 붙잡고 자신의 추억을 애써 들려주려는 부모들의 안타까운 노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별나 보이고픈 욕심에 별것도 아닌 과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노출증 심한 청년의 주접일지 모르겠다.

 

어쨌든 몇 달 전에는 그저 담담하게 그리고 가끔 웃으며 읽었던 이 만화가 최근 다시 떠올라 책장을 넘기게 됐다. 왜냐면, 지금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혹시나 내가 잃어버리고 있는 나만의 생활방식이 없는지 되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나 역시 지금 '원주민' 돼버렸다는 사실이다. 단, '대한민국 원주민'이 아닌 'MB원주민'이라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들의 반대편에는 민주주의라는 체제에 익숙해 있다가 느닷없이 닥쳐온 파도에 밀려 끝없이 떠돌아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다. 예상은 했지만 이정도일 줄은 몰랐던 정권의 흐름에 휩쓸려 마치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 소용도 없는 대화를 시도하며 답답한 가슴을 쥐어뜯어야 했던 사람들. 그들을 키웠던 민주주의는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의 일상이었던 것들은 3년 반 아니, 어쩌면 그 이후로도 만나 볼 수 없게 돼 버린 사람들. 나는 그들을 'MB 원주민'이라고 이름 붙였다."

 

앞선 작가의 말을 조금 변용해 'MB 원주민'을 정의하면 이 정도가 될 거 같다. 그러니까 하루가 다르게 변화는 이 사회 속에서 난 내 생활 방식 몇 가지를 반강제로 빼앗겼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관심이 많은 내가 우울하고 짜증 나는 일을 접하지 않기 위해 신문을 펼쳐드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평소 반골인 성격 탓에 어떤 일이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넘어지던 내가 요즘은 그냥 입 다물고 사는 '순한 양'이 돼버렸다.

 

혹시라도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면 나는 학창시절 때보다 더 적은 최저임금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 어쩌면 앞으로 내가 좋아하는 개그프로그램과도 작별의 인사를 나눠야 할지 모른다. 한 생수에서 '잠재적 발암물질'이 검출됐음에도 정부(넓은 의미의 정부, 여기에는 사법부와 입법부, 그리고 일부 언론까지 포함된다)는 기업의 명예훼손을 이유로 업체명을 밝히지 않아, 난 생수마저 마음 놓고 사먹을 수 없게 됐다. 이래저래 지금껏 생각 없이(자유롭게) 살아온 삶의 방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게 된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내 몸을 감싼다.

 

도시화 과정에서 전통적 가치를 가지고 살아온 '대한민국 원주민'은 그나마 시간이 흐른 뒤 그 시절을 추억하고, 지난 일이라며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이 시대 'MB 원주민'은 시간이 흐른 뒤, 무엇을 추억하고 또 무엇에 대해 웃을 수 있을는지 아둔한 내 머리로는 도저히 감이 안 온다.

 

잘못된 정책은 정부와 국민이 대화로써 입장 차를 좁히고, 모두가 인정하는 '상식'이라는 준거 기준을 가지고 토론하는 그런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한가 보다. 법이라는 집행 기준을 가지고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그런 일상이 또 누군가에는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한가 보다. 여론이라는 국민적 합의나 세간의 공통된 의견을 바탕으로 문제를 지적하고 또 주의·환기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역시나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한가 보다. 그래서 그렇게 뜯어 고치려 안달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부도 검찰도 경찰도, 몇몇 언론도, 결국은 국민의 재산을 보호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보장하고 국민의 질서 유지를 위한 '옷'에 지나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들 스스로가 마치 '사람'인 것처럼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 듯 국민을 취사선택하는 것은 권력남용을 넘어 개념 상실에 가깝다. 국민을 뜯어 고치려는 발상 자체가 '개콘'을 능가하는 코미디다.

 

맞지 않는 옷은 다시 치수를 채고 줄일 곳과 늘릴 곳에 대한 관찰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수선은 그 다음 일이다. 물론 다시 옷을 사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그러니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 같은 'MB원주민'으로서는 이 몸에 맞지 않는 정권이라는 '옷'을 어떻게 수선할 것인지 생각하는 게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물론 수선해야 될 부분이 너무 많아 혼자로는 벅차니, 혹여나 자신도 'MB 원주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언제나 환영이다.

 

아! 그나저나 이 글은 <대한민국 원주민>이라는 만화를 읽고 느낀 점을 적은 '독후감'에 불과한데, 혹시나 오해하는 사람이 생기지는 않을는지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대한민국 원주민> / 최규석 / 창비 / 1만1000원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창비(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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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원주민,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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