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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는 단 하나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남겼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77. 듣기에 더없이 아름답지만, 섬세한 기교를 요구하는 탓에 연주자로서는 적잖은 공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곡이다. 그러나 지난 130년 동안 이 음악을 둘러싼 바이올리니스트들의 고뇌는 까다로운 연주기법 때문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찌고이네르바이젠'의 작곡자로 유명한 사라사테(1844~1908)는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도 이름을 날렸다. 브람스는 사라사테에게 자신이 작곡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할 의향이 있는지 물은 적이 있다. 악보를 훑어본 사라사테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곡인 건 틀림없는 것 같군요. 하지만 오보에가 곡 전체에서 가장 들을만한 멜로디를 연주하는데, 나는 그동안 바이올린을 들고 멍청하게 서 있어야 하나요?"

 

사라사테의 치기 어린 불평이 좀 무례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투정은 아니었다. 2악장의 도입부는 오보에 독주로 시작되는데, 오보에는 그윽한 멜로디를 2분 넘게 연주한 후에야 바이올린에게 소리를 넘겨주기 때문이다. 무대 앞에 선 바이올린 독주자는 이 공백을 멀뚱거리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1악장 도입부에서도 2분 30초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사라사테가 살아서 장영주의 공연을 지켜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장영주가 '보여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2008년 11월, 매디슨의 오버처 연주홀. 장영주가 만석의 무대 위로 박수를 받으며 걸어 나왔다. 강렬한 녹색 드레스를 입고, 검은 머리는 오른쪽 가슴으로 단정히 모아내린 모습이었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박수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고, 에스토니아 출신 여성 지휘자 아누 탈리의 손짓과 함께 연주가 시작되었다.

 

사라사테의 염려와 달리, 장영주는 우두커니 서서 독주시간을 기다리지 않았다. 바순 연주로 1악장이 시작되자 장영주는 한 손을 뒤로한 채 음악에 맞추어 조용히 스텝을 밟았다. 가볍게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오케스트라 선율에 따라 가볍게 몸을 흔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잠시 후 관악의 고요한 선율이 안개처럼 사라지는가 싶더니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 소리가 한꺼번에 폭풍처럼 울려나온다. 그리고 장영주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비바람에 맞서 날갯짓을 하는 새처럼, 끊길 듯 한없이 가냘픈 소리를 내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거칠고 격하게 날개를 저었다.

 

먹구름 사라진 하늘에서 20분 넘게 곱게 노래하던 바이올린의 새가 힘찬 날개를 저어 관객 머리 위로 사라지자, 객석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온다. 이제 겨우 1악장이 끝났을 뿐인데 말이다. 악장 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관객들이 몰라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표정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는 장영주의 연주는 기어이 '악장박수'를 불러내고 만다.

 

2악장 아다지오의 그 '악명 높은' 오보에 연주가 시작되자, 장영주는 다시 눈을 감고 음악 속 산책을 시작한다. 이윽고 바이올린은 오보에에게 뺏긴 시간을 시샘하기라도 하듯 황홀한 멜로디를 연주한다. 거의 쉼 없이 연결되는 3악장에서 바이올린은 다시 빠른 알레그로로 돌아가고, 장영주는 이제 연주 도중에도 춤을 추기 시작한다.

 

힘이 실린 연주에서 표정은 아픈 듯 일그러지기도 하고, 이따금씩 스커트 밖으로 드러난 하이힐 굽이 무대를 치기도 했다. 장영주는 옷으로, 표정으로, 그리고 몸짓으로 음악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차례 활의 올이 뜯겨 나가고, 격정의 연주 속에서 발이 몇 번 더 무대를 구르자 감격한 관중의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장영주의 표정은 천진한 웃음을 띠는 앳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미 전 세계의 수많은 탄사와 갈채를 받았음에도, 장영주는 여전히 기립박수를 수줍어한다.

 

장영주의 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장영주는 필라델피아에 유학을 온 음악가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작곡가 어머니와 바이올리니스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소녀가 음악과 친해진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장영주의 눈부신 발전은 타고난 재능과 부모의 애정 어린 가르침 못지않은 훌륭한 교육제도의 덕이기도 하다.

 

미국 음악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교수법으로 흔히 '스즈키 교육법(Suzuki Method)'을 꼽는다. 한국에서 '음악영재교육'으로 잘못 소개되기도 하는 이 교육법은 결코 '영재'를 위한 것도 아니고, '거장'을 키우기 위한 방법도 아니다. 이 교수법을 창안한 신이치 스즈키는 제대로 가르치기만 하면 어떤 아이라도 훌륭히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스즈키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특정 목표를 향해 나가도록 다그치지 않는 것이다. 음악교육은 모국어를 배우듯 인성과 함께 '자라가는' 것이며, 교육자는 아이들이 즐겁고 능동적으로 이 과정에 참여하도록 도울 뿐이다. 음악교육은 종합적 전인교육의 일부이며, 교육의 목표는 세상을 이해하고 그곳의 평화에 이바지하도록 돕는 것이다.

 

장영주는 이 스즈키 교육법의 수혜자였다. 장영주는 일곱 번째 생일을 맞던 해에 줄리아드에 입학했지만, 주중에는 계속해서 일반 학교에 다녔다. 스즈키 교육법은 미국 어린이들을 즐거운 음악의 세계로 안내했으며, 그중 많은 이들이 전문음악인이 되는 길을 택했다. 장영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과 조슈아 벨도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장영주와 힐러리 한 : 이민자의 아름다운 딸들

 

1979년생인 힐러리 한은 미국이 낳은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다. 두 번의 그래미상 수상은 그녀가 쌓아 온 경력의 일부만을 보여줄 뿐이다. 힐러리 한과 오랫동안 작업을 해 온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제프리 카헤인은 그녀를 "젊은 몸에 성숙한 영혼이 깃든 연주자"로 평한다.

 

젊은 나이면 기교를 한껏 과시하고 싶을 만한데도, 힐러리 한의 연주는 절제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번스타인에서 이사이, 그리고 바흐에서 쇤베르크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가 보여주듯, 결코 편한 자리에 안주하지 않는 자세도 놀랍다. 오랫동안 음반계약을 맺고 있던 소니를 떠나 도이체그라모폰으로 옮겨간 이유도 대중에게 잘 알려진 곡 위주로 녹음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힐러리 한은 독일문학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10살에 커티스음대에 들어간 힐러리 한은 그곳에서 바이올린 연주뿐 아니라 문학도 공부했다. 물론 그녀의 훌륭한 독일어 실력은 자신의 독일계 뿌리와도 관련이 있다. 성이 말해주듯, 힐러리는 독일계 이민자의 후손이다.

 

그런 면에서 힐러리 한의 밀워키 공연을 지켜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밀워키는 독일 이민자들이 건설한 도시로, 오늘날까지 독일건축양식과 문화, 그리고 음식으로 가득 찬 '작은 독일'로 남아 있다. 이 도시가 자랑하는 밀러 맥주와 할리데이비슨도 독일 이민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2008년 5월, 힐러리 한은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고 나흘간 밀워키를 찾았다. 독일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밀워키 시청 옆에 자리한 마커스 센터의 일라인 연주홀. 독일계 미국인이 많은 도시지만, 그날은 특히 독일어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객석을 채운 대다수의 관객들이 머리가 희끗하거나 숱 적은 노인들이었으나, 모국어는 세월이 지나도 잊기 어려운 듯했다. 앞에도 노부부가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가 부인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묻는다.

 

"오늘 굉장한 '독일계 꼬마'가 연주하는데, 당신은 자랑스럽겠네?"

 

부인이 독일 이민자인 모양이었다. 할머니는 반쯤 무시하며 대꾸한다.

 

"어디서 왔든, 미국인이니 당신이 더 자랑스러워야지."

 

그 '미국인' 할아버지의 조상 역시 다른 나라 어디선가 이주해 왔을 테니, 결국 그날 앉아있던 사람은 모두 이민자의 후예들이었다. 넉 달 후, 매디슨에서 장영주 공연이 있었을 때, 객석 여러 곳에서 들려오는 한국어를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온 관객들은 장영주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겠지만, 다른 이민자의 후손들 역시 '미국인 장영주'를 자랑스럽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다문화 : 미국이 누린 가장 큰 축복 중 하나

 

조상의 국적이나 인종이 중요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자신들이 속한 곳에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정확히 독일 이민자의 딸인 힐러리 한과 장영주가 누린 축복이었다.

 

힐러리 한의 스승이었던 브로드스키는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생전에 한국인 제자도 여러 명 두었다. 장영주의 스승이었던 들레이 여사는 이스라엘 출신 이작 펄만, 일본 태생의 미도리 등 세계 전역에서 온 학생들을 가르쳤다. 물론 자신도 이민자의 후예였다.

 

미국에서 가장 입학하기 어려운 학교로 알려진 줄리아드와 커티스음대는 이민자의 어린 딸 장영주와 힐러리 한을 장학금을 주며 가르쳤다. 훌륭한 음악적 재능과 성품을 지닌 성인으로 자라난 이 둘은 다시 탁월한 음악과 교육의 선물로 사회에 진 빚을 갚고 있다.

 

아직 풀어가야 할 숙제가 많긴 하나, 다인종, 다문화 사회는 미국이 누려온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다. 미국의 음악교육 역시 이들로부터 나온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종합하고 숙고한 결과였다.

 

한국에서도 파키스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나오고, 필리핀 출신의 명창이 나오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태그:#장영주, #힐러리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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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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