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ㄱ. 두 다리로 살면서 내는 책

 

 《아프리카 트렉》이라고 하는 책은 프랑스사람 둘이서 세 해에 걸쳐 아프리카땅을 두 발로 밟은 이야기를 담습니다.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책은, 뉴질랜드라는 땅에 살던 토박이를 괴롭힌 영국사람한테 맞서 어머니땅을 지키려고 하던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를 담습니다. 수백 쪽에 이르는 몹시 두툼하고 무겁기까지 한 《아프리카 트렉》을 펼치면서 '전쟁무기란 하나도 없이 맨몸으로 땅을 느끼려 한' 서양사람도 있다고 느끼는 한편, 고작 여든여덟 쪽 짜리 자그맣고 가벼운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을 넘기면서 '온갖 전쟁무기 앞에서 맨손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며 맞선' 살결 검은 사람들 삶을 느낍니다.

 

 오늘날 우리들 살결은 귤빛이나 살구빛이 아닌 흰빛이라 할 만합니다. 지난날 개화기라고 하는 때 서양사람이나 일본사람이 담은 한겨레붙이 모습을 보면 하나같이 '누런 살(황인종)'이 아닌 '검은 살'이곤 합니다. 왜냐하면, 나라살림 휘어잡고 여느 사람들 위에 올라선 몇몇 힘있는 사람을 뺀 거의 모든(95%가 넘는) 가난한 사람들은 땅에 발을 붙이고 몸을 누이고 손발을 놀리면서 땀흘려 일했기 때문입니다. 예부터 아프리카땅이든 아시아땅이든 흙에 뿌리내려 햇살과 함께 살아온 사람들 살결은 '까맸'습니다. 먼 옛날이 아닌 우리 어릴 적을 되뇌어 보아도, 허구헌날 바깥에서 온몸이 '새까맣게' 타서 벗겨지도록 놀던 일을 떠올리면, 우리 살결은 '누런' 빛조차 아닌 '까만' 빛이라 할 만함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책방마실 두 군데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온몸이 부서질 듯 힘겹고 고단합니다. 가방에 가득한 책을 바닥에 풀어 놓고 찬물로 씻고 빨래를 합니다. 빨래는 빨랫줄에 널어 놓은 다음, 집으로 오는 길에 펼치고 넘긴 책은 덮어놓고, 사진기 한 대 어깨에 걸치고 뒷주머니에 천으로 된 장바구니를 쑤셔넣고 밖으로 나옵니다. 잠깐 숨을 돌리자면서 골목마실을 하기로 합니다. 오늘은 창영동에서 유동으로 접어든 다음 율목동을 걷습니다. 정보산업고(예전에는 상업고) 울타리 옆으로 십 미터 남짓 파헤쳐진 길은 새로운 길을 닦는다고 공사가 한창입니다. 사람들 걷는 길은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지 오래이지만, '어차피 자동차길로 바꿀 텐데 뭐하러 거님길을 판판히 다지느냐'면서 내팽개쳐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내팽개쳤기 때문(?)에 공사터와 거님길 사이 아주 작은 틈바구니에 씨앗 하나가 뿌리내리고 줄기를 올려, 어느새 1미터쯤 되는 높이로 자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군요. 나무를 보며 깜짝 놀랍니다. 넌 언제부터 이렇게 자란 채 있었느냐?

 

 한 시간 남짓 골목골목 천천히 걸으면서 돕니다. 늘 돌던 길이지만 돌 때마다 새롭고, 돌 때마다 새롭게 사진을 찍습니다. 한 시간 사이에 예순 장쯤 사진을 찍었고, 집으로 돌아와 오늘 찍은 사진을 보며 혼자서 코끝이 찡합니다. '그래, 우리는 프랑스사람이 아프리카를 세 해에 걸쳐 돌았던 이야기를 읽지 않아도, 바로 우리 스스로 살아가는 자리에서 이토록 아름다운 삶을 느낄 수 있지 않겠니? 마오리족이 영국사람한테 짓밟힐 때 남긴 이야기가 무엇이었겠니?'

 

 그렇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풋풋하고 살냄새 나는 사람 삶터'가 그립다며 비행기 타고 나라밖 나들이만 멀리멀리 떠납니다.

 

 

 ㄴ. 선생님이 읽는 책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어른을 두고 '스승'과 '교사'와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낳아 기른 어버이를 가리키는 한자말 '부모' 뒤에 '-님'을 붙여 높이듯, 우리를 가르치는 분을 가리키는 한자말 '선생' 뒤에도 '-님'을 붙여 높입니다. 가만히 보면, 토박이말 '스승'과 '어버이' 뒤에는 '-님'을 안 붙입니다. '스승님'이라고 말하는 분이 있으나, 따로 '-님'을 붙이지 않아도, 이 낱말 그대로 높이고 받드는 느낌을 나타냅니다. 지난날 여느 사람을 내리누르던 힘이 대단했던 '임금'한테 '임금님!' 하면서 고개를 숙였지만, 오늘날 '선생님'은 사뭇 다릅니다. 사람을 가르치는 자리가 높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한편, 어렵고 힘들고 걱정되는 일이기 때문에 이처럼 말하는구나 싶습니다.

 

 대입시험을 앞둔 고등학교 아이들이 스스로 '책읽기 모임'을 꾸려 '느낌 나누기'를 했던 발자취를 그러모은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삼인,2009)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아이들은 깊은 뜻이나 생각이 없이, '대입시험에서 논술 잘 치르자'면서 책읽기 모임을 꾸렸고, 저마다 책을 읽은 느낌을 아낌없이 나누었습니다. 아이들 하나하나를 살피면 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는 무리에 듭니다. 아이들이 쓴 글을 읽으니 '공부 잘하고 책 좀 읽는 티'를 내겠다며 부러 어려운 말을 골라 쓴 대목이 곧잘 보입니다.

 

 제가 이 아이들 나이였을 때를 떠올립니다. 저라고 이 아이들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저는 많이 모자라고 어줍잖다고 느끼지만, 그때에는 더 모자라고 어줍잖았으며, 제 둘레에 '책 좀 읽는' 동무이든 어른이든 보이지 않았기에 우쭐거리거나 잘난 척해 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옛말은 '낡은' 말인 듯 생각하면서, 익었으니 고개 빳빳해야 하는 양 꼴값을 떨었습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시절 3년을 보내면서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은 다 안다 … 나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제대로 된 '생각하기'의 방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130, 141쪽)

 

 논술 준비를 한다지만, 학교 안쪽에서 선생들이 이끌어 배우는 책읽기 모임 느낌 나누기가 아닌, 아이들 스스로 모임을 꾸리고 저마다 읽을 책을 생각했다는 일은 퍽 놀랄 만합니다. 우리 나라로서는 혁명일 수 있습니다. 비록 접시물에서 이루려는 혁명이지만.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다치고, 선생님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생각없는 바보로 자라도 괜찮을까요. 선생님들 스스로 아이들을 바보로 키우고 가르쳐도 되는가요. 아이들 스스로 '우린 생각할 까닭 없이 시험만 잘 쳐서 대학 가면 그만이야' 하도록 내모는 당신들한테 '선생님'이라는 거룩한 이름이 알맞습니까. 달삯 잘 나오고 연금 넉넉하고 방학 길고 심심풀이로 손발운동(체벌) 하는 월급쟁이로만 있고자 하는 분들한테 '선생님'이라는 이름이, 그나마 '교사'라는 이름이 어울리나요. 교재가 아닌 '참다운 좋은 책'을 읽는 스승길을 걷는 분이 있기는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든 고등학생이 대학교에 가지는 않으며, 모두 다 대학교에 갈 까닭은 없음을 되새기면서, 아이들한테 생각힘을 북돋우고 당신 스스로도 생각날개를 펼치려는 '선생님 노릇'을 계급장 떼면서 해 보고자 소매 걷어붙이는 분은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덧붙이는 글 | -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는 글입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세실 모지코나치.클로드 퐁티 글, 조엘 졸리베 그림, 백선희 옮김, 산하(2009)


노란잠수함, 책의 바다에 빠지다 - 책 읽고, 놀고, 대학도 가고, 일석삼조 독서토론기

조원진.김양우 지음, 삼인(2009)


아프리카 트렉 - 희망봉에서 킬리만자로까지 걸으며 만난 아프리카와 아프리카 사람들

알렉상드르 푸생 & 소냐 푸생 지음, 백선희 옮김, 푸르메(2009)


태그:#책, #책읽기, #책이 있는 삶, #책삶, #독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