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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풍부한 유산

- 글 : P.라핀

- 옮긴이 : 오영숙

- 펴낸곳 : 성바오로출판사 (1991.5.5.)

- 판 끊어짐.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책.

 

 

 (1) 내 아이가 뒤집어쓴 굴레는

 

 자다가 때때로 깹니다. 머리를 나란히 하고 잠들었던 아기가 어느새 머리는 제 다리 쪽을 바라보고 다리는 제 머리 쪽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잠결에 뒤집기를 하면서 고 작은 다리로 바닥을 탕탕 칩니다. 그러다 드문드문 제 얼굴에 철푸덕철푸덕 와닿습니다. 얼결에 잠이 깨면서 원 녀석두 하는 말이 나오다가는, 새근새근 잠들기를 바라며 가슴을 토닥거립니다.

 

 옆지기가 뒷간을 갔다 온 다음 이부자리 끄트막에 옹크리고 눕는데, 아기는 어찌 알아챘는지 눈을 감은 채로 옆지기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가서 엎어집니다. 참 용하구나 싶으면서, 아기로서는 즐거운 발버둥이 아닌가 싶고, 이렇게 하루하루 커 가는 만큼 아기 돌보는 엄마가 더 애틋하게 느끼는 한편 힘들다고 느끼겠구나 싶습니다.

 

.. "아저씨들은 사람 죽이는 사람들! 악한들이란 말이에요." 소녀는 경멸과 호기심이 섞인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군인 아저씨들이 가는 곳엔 늘 말썽이 따른다구요!" 말가리다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군인들을 아주 멋있게 보는 친구들과는 달리 멋있는 군복과 번쩍이는 훈장과 모자에 꽂은 아름다운 깃털 뒤에 숨어 있는 군인들의 진면목을 이미 보았던 것이다 … 그 당시 기마병들은 정예부대로서 자부심도 대단한 데다가 잔인하기도 해서 농민들이 항거라도 해 오면 칼로 사정없이 베어 버리곤 하는 판국이었다. 하지만 이 조그만 소녀를 어떻게 할 것인가? … 그 당시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늘 전쟁이란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 번창하는 것은 군복 생산업체고, 그러다 보니 군복의 디자인이 너무 요란해져 희극배우 의상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이 군복과 군인들에 대한 선망은 상류층을 깊이 파고들었고, 농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려 온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더욱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두둑한 봉급과 멋진 제복, 미지의 모험에 대한 꿈으로 부푼 젊은이들은 죽음의 마당으로 밀려나갔다. 더욱이 그 당시 나폴레옹의 찬란한 승리는 이 전쟁의 비극을 잘 감추어 주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을 위해 24만 명의 이탈리아인들이 스페인에서 죽었고, 15만 명은 러시아에서 죽었다 ..  (13, 15, 17쪽)

 

 엊그제 남현동에서 인헌동을 거쳐 봉천동으로 걷는 언덕골목에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예전에 대안학교 아이들하고 글쓰기를 함께했을 때 제주섬 자전거마실도 함께 했는데, 그때 자전거를 함께 달리던 젊은 벗입니다. 요즈음 공익근무로 군대에 들어가 있다는 소식을 알려줍니다. '중학교 졸업장 없으면 군대 안 가지 않아요?' 하고 물으니, '이제는 그것도 없어졌어요.' 하면서 웃습니다. 그만큼 군대로 붙잡아 갈 젊은 사내 숫자가 줄었다는 뜻일 테지요. 그러나 젊은 사내 숫자가 적겠습니까. 제 아이를 군대에 보내지 않고자 한국 국적을 버리는 돈있는 집이 많을 뿐 아니라, 저처럼 육군보병 밑바닥으로 데려갈 숫자가 적을 뿐입니다. 돈에다가 힘에다가 이름이 있으면 얼마든지 널널한 곳으로 빼내니까, 밑바닥에서 총알받이 노릇 삼을 숫자만 적을 뿐입니다.

 

 부디 몸 다치지 말고 잘 지내라는 인사를 남기고 헤어지면서, 우리 아이가 아들내미 아닌 딸내미임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새삼 느낍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없도록 하면서, 사람한테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따스함마저 걷어내 버리는 군대라는 곳은 얼마나 끔찍한가요. 평화를 지키려 한다는 군대라지만, 사람 역사를 거슬러 볼 때, 이제까지 어느 한 번 평화를 지켜 준 군대가 있었습니까. 언제나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는 군대였습니다. 고구려든 고려이든 조선이든 나라땅을 넓혔다고 하는 일도 하나같이 '침략'이었지 '영토확장'이 아닙니다. 이런 '침략'에 얼마나 많은 '미개하고 힘없는 소수부족'이 죽어없어지고 마을이 불타야 했을는지요. 이러는 동안 우리네 젊은피는 얼마나 많이 애꿎게 흘러야 했는지요.

 

.. "우리는 총도 없이 도둑을 쫓아냈구나. 그 사람이 그렇게 놀라서 도망친 것은 자기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  (54쪽)

 

 죽은 대통령을 기리려 하는 사람들 발길과 몸길을 가로막는 전투경찰 무리를 봅니다. 볼일 때문에 광화문 일민미술관으로 가는 길목, 수없이 많은 전경이 길가에 버스를 바싹 댄 채 늘어서며 담배를 빼어물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걸어다니며 담배 태우는 사람들' 때문에 골머리가 아픈데, 광화문 둘레에는 아예 전경들이 대놓고 담배를 줄줄이 피워대니, 숨쉬기 괴롭습니다. 그러나 저 젊은 넋도 얼마나 고달플까요. 푹푹 찌는 더위에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려니 심심하고 답답하겠지요. 자유를 잃고, 아니 자유를 버려야 하고, 또 평화와 민주를 잊어야 하며, 통일과 사랑이란 걷어내면서 사람들을 윽박질러야 하는 저 어린 넋들은 얼마나 고단하고 슬프겠습니까. 담배라도 태워야지요. 이 넋들이 길에서 술을 마실 수 있겠습니까, 책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손전화로 어디에 하소연이라도 하겠습니까. 담배를 태울밖에요. 그저 한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그 옆을 스쳐 지나갑니다.

 

.. 요한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고, 말가리다는 요한 신부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만을 하게 되도록만 바라고 있었다. 말가리다는 요한의 '성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  (93쪽)

 

 그런데 남녘 군인과 전경 못지않게 북녘 군인과 과학자가 불쌍합니다. 그나마 끼니를 굶지 않는 북녘사람은 군인이라지만 그 군인조차 요사이는 제대로 밥먹기 힘들다는 소리가 터져나옵니다. 이러면서도 새 미사일 만드는 데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습니다. 그도 그럴밖에 없는 까닭이, 남녘이나 북녘이나 평화와 민주와 사랑으로 이어가는 정치권력이 아닌, 돈과 힘과 가방끈으로 지키려는 정치권력인걸요. 북녘은 군인 숫자로는 남녘보다 훨씬 많을 테지만, 남녘에는 미군이 있고 미국한테서 사들인 엄청난 무기가 몹시 많습니다. 북녘에 전투기가 더 많다 하여도 북녘 전투기는 넣을 기름이 모자랍니다. 기름 없는 전투기는 깡통하고 다를 바 없습니다. 더구나, 전투기 한 대를 만드는 데에 들어가는 돈이라면 북녘사람 모두한테 하루 끼니를 배불리 먹이고 남는 돈입니다. 어떻게 보면, 먹고사는 살림을 아껴 무기 키우는 데에 쓴다 하겠지만, 무기란 사 놓기만 해서 끝이 아니라 간수하는 사람이며 기름이며 전기며 끝도 없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먹고사는 살림을 조금 아껴 사들이고 갖추는 무기가 아니라, 굶주리면서 사들이고 갖추는 무기가 되고 맙니다. 게다가 무기란 전투기 한 대가 끝이 아닙니다. 총이 있고 총알이 있으며, 전차가 있고 구축함과 잠수함이 있습니다. 짐차가 있고 지프가 있으며, 폭탄과 레이더가 있습니다 …….

 

 북녘에서 굶주리는 사람이 수백만에 이르는 까닭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독재자 한 사람 때문이 아닌, 군대 때문입니다. 어쩌면, 군대를 이끄는 독재자 때문이라고 해야 올바를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남녘에 비정규직이 넘치고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힘이 넘실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또한 남녘을 주름잡고 거머쥐고 뒤흔드는 군대 때문입니다. 군대를 앞세우는 독재권력자 때문이라고 해야 옳을까요.

 

 우리는 왜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돈 걱정'을 하면서 다녀야 할까요. 우리는 왜 입시지옥에 갇혀 살아야 하나요. 우리는 왜 건강보험이니 국민연금이니를 그토록 쏟아부어야 할까요. 다름아닌 군대를 지키고 키워야 한다는 까닭 하나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쏟아부은 돈에다가 오늘도 쏟아붓는 돈에다가 앞으로도 쏟아부을 돈 때문입니다. 육해공군만 군인이 아니라 전투경찰도 군인입니다. 의경도 군인입니다. 공익근무도 군인입니다. 모두들 평화와 민주와 사랑하고는 동떨어진 자리에서 젊음을 바치도록 되어 있고, 이들은 젊음만 바칠 뿐 아니라 숱한 세금을 바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제아무리 수출을 많이 해서 '껍데기 경제대국'은 될 수 있다고 하여도, 사람이 살기 좋은 '앞선나라'가 될 수 없는 까닭은 군대에 있습니다.

 

 

.. "이분은 저의 어머니십니다. 그리고 이곳 모든 아이들의 어머니시기도 합니다." "아, 어머님이 요리까지 하시는군요." 백작의 감탄한 듯한 말에 말가리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천국에 있는 집을 마련하려면 어떤 것이든 다 할 줄 알아야 한다우." "아이들에게 주는 음식은 몇 가집니까?" "몇 가지라구? 우리 형편에는 빵과 국만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라오." "그러면 보스코 신부에겐 어떤 음식을 해 줍니까?" "더 간단합니다. 빵과 수프를 다 함께 넣어서 주면 되니까." "그건 너무한데요! 아마 특별 요리인가 보군요." "그런지도 모르죠. 내 아들 신부는 그것을 목요일까지 계속 먹는다우." "목요일까집니까? 그럼 다른 날은 다른 것이 있습니까?" "금요일과 토요일은 단식하는 날이라우." "아……아, 금식을 하는군요." 뚱뚱한 백작이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  (127쪽)

 

 곰곰이 살펴보면, 우리 아이가 딸내미라 하여 그리 기쁘거나 고마울 일이란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사내가 되든 계집이 되든 군대라는 굴레가 온나라를 옴팡 뒤집어씌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도권 입시교육이 손길을 뻗치지 않은 자리가 하나도 없는 우리 터전이듯, '돈먹는 군대'가 발길을 뻗치지 않은 데는 하나도 없는 우리 터전입니다. 입시지옥과 군대는 한동아리이며, 한미자유무역협정이나 이라크파병은 동떨어진 일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 문화와 복지가 없는 일은 입시지옥과 군대하고 끈이 닿아 있으며, 비정규직을 낳는 회사 얼거리와 착한마음 없는 재벌 틀거리 또한 입시지옥과 군대에 줄을 닿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왜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집시법이 왜 허울좋은 껍데기로만 남아 있겠습니까. 노동조합을 왜 아직까지도 빨갱이 눈길로 바라보겠습니까.

 

 시늉이나마 참된 공익근무를 펼친다면, 이 젊은이들은 시골 논밭에서 농사를 짓도록 보내기라도 해야 하며, 바닷가 고기잡이를 하도록 보내기라도 해야 하는 가운데, 산골짜기 탄광에서 석탄을 캐도록 보내기라도 해야 합니다. 이래야 맞습니다. 산지기 노릇을 하든, 등대지기 노릇을 하든, 청소꾼 노릇을 하든 하면서, 젊은 넋이 우리 삶터를 찬찬히 느끼고 돌아보는 일자리에서 젊음을 보내도록 해야 '군 의무'라는 짐이 조금이나마 참다이 사람을 살리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2) 우리 스스로 뒤집어쓴 굴레를

 

 엊저녁, 서울 신촌에서 일산으로 들어오는 빨간버스를 탔습니다. 빨간버스 모는 아저씨는 120킬로미터가 넘는 빠르기로 거침없이 내달리며 옆길에 나란히 달리는 차를 모두 앞질렀습니다. 신호를 기다리며 멈춰 있는 다른 차들과 달리 빨간버스 아저씨는 네거리에 오가는 차가 없음을 알고는 그예 가로질렀고, 이십 분 만에 꽤나 긴 거리를 달려 냈습니다.

 

 대화역에서 시내버스를 갈아탈 때에도 버스 모는 아저씨는 신호를 지킨 적이 얼마 없습니다. 이제까지 차와 차가 부딪히지 않고 있는 모양이 용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건널목 푸른불이 들어와도 거리끼지 않고 가로지르는 차는, 몇몇 버스기사들만이 아닙니다. 자가용을 몰건 짐차를 몰건 마찬가지입니다. 인천 우리 집 둘레에 있는 건널목에서도 사람들이 절반쯤 건넜는데 미친 듯이 가로지르는 차를 늘 봅니다. 걷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손가락질을 해대어도 멈추지 않고 그치지 않습니다. 마땅히 사람들이 멈추겠거니 하고 생각하는구나 싶고, 사람을 쳐도 그만 죽어도 그만 보험이 알아서 할 테지 하고 여기는구나 싶습니다.

 

.. 말가리다는 그 산들과 그 산속에 있는 오솔길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산들을 잘 아는 것만 아니라 깊이 사랑했으므로 평생을 그 산속에서 살라고 해도 기뻐할 정도였다. 이탈리아사람의 전형적인 기질인 말가리다에게 산은 먹을것을 주고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안락한 집'과도 같았다 … 지금 말가리다가 서 있는 주위에는 조상들이 공들인 작품들이 펼쳐져 있었다. 수확철마다 옷을 갈아입는 줄줄이 서 있는 검은 뽕나무들 하며, 연두색 수양버들, 그리고 한 줄로 늘어선 삼나무들이 마치 융단자락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자연은 그보다 더 풍성한 선물을 주고 있었다 … 아이들도 씩씩하고 행복하게 자랐다. 아이들에게는 그곳이 낙원이었다. 산과 언덕, 넓은 들판으로 이어진 마을은 매일매일 새로운 탐험과 모험, 즐거운 놀이를 가져다주어 아이들의 얼굴은 늘 싱싱하였고 기쁨으로 넘쳐 있었다 ..  (22, 38쪽)

 

 

 무시무시하게 달리는 버스나 자가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차에는 어김없이 아이들이 타고 있습니다. 아이들 태운 노란 학원버스가 함부로 길을 휘젓는 모습도 어렵잖이 찾아보곤 합니다. 아이들은 나중에 저마다 자동차학원에서 면허를 따겠지만, 스스로 면허를 따 차를 몰기 앞서 제 부모나 이웃 아저씨 아주머니 차를 얻어타면서 '차란 이렇게 몬단다' 하고 시나브로 몸으로 익힙니다. 누가 딱히 가르쳐 주지 않으나 '차란 이렇게 몰아야 하는구나' 하고 저절로 몸에 배고 맙니다. 어쩌다가 건널목 앞에서 걸려 기다려야 할 때에는 '웬 사람들이 이렇게 천천히 건너? 빨간불로 바뀌었는데 왜 천천히 걸어?' 하고 느끼고 맙니다.

 

 얼음과자 껍데기를 길에 버젓이 버리는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제 어버이나 이웃 어른한테서 이런 모습을 보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강아지 새끼 송아지 새끼 도야지 새끼' 같은 말을 조그맣고 여린 입술로 주절주절 내뱉는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제 어버이나 이웃 어른한테서 이런 말을 듣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지 않고 밥풀을 잔뜩 남기는 아이들은 어린 날부터 제 어버이나 이웃 어른한테서 늘 지켜보면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살아가는 대로 아이들한테 물려줍니다. 우리는 우리 꿈꾸는 대로 아이들 생각과 마음을 이루어 놓습니다. 우리는 우리 바라보는 대로 아이들 눈길과 눈높이를 다스려 줍니다. 좋은 모습이든 궂은 모습이든 훌륭한 모습이든 엉터리 모습이든, 우리 삶은 고스란히 아이 삶으로 옮아 갑니다.

 

.. 말가리다도 행복했다. 매일 밤 쌔근거리는 아기들의 숨소리를 들을 때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그녀는, 아무리 뛰어난 예술작품도, 또 그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대리석 미술관조차도 시간이 흐르면 먼지로 돌아가지만, 말가리다와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걸작품인 이 어린이들은 자손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살게 될 것이며,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다른 이들의 삶을 넉넉하게 만들어 주고 창조주께 영광을 드릴 것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말가리다의 마음 그 깊은 곳에 깔린 하나의 신념이었다 ..  (35쪽)

 

 아이들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말을 저절로 높입니다. 아이들도 낮추고 저도 낮출 수 있는데, 아이들도 높이며 나 또한 높여도 괜찮다고 느낍니다. 아이들이 먼저 스스럼없이 여느 말씨로 다가온다면 저 또한 여느 말씨로 다가갑니다. 아이들이 먼저 높임말로 다가오면, 저 또한 높임말로 다가갑니다. 나이를 몇 살(이 아니라 여러 곱 더 먹었을 테지만) 더 먹었다고 해서 제가 아이들한테 높임말을 들을 까닭은 없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저를 높여 준다면 저 또한 아이들을 높여 주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다 하여도 내가 가르치는 만큼, 또는 더 크게 내가 아이들한테서 배웁니다.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보여주고 저 책을 읽어 준다 한들, 내가 아이들한테 건네는 지식과 깜냥만큼, 또는 더 크게 내가 아이들한테서 보고 느끼고 배웁니다.

 

 꾸밈없이 물어 보거든요. 있는 그대로 물어 오거든요. 어떤 다른 속셈이나 꿍꿍이로 물어 오지 않거든요.

 

 그러나 꾸밈없던 아이들이 한 해 두 해 사라지고, 있는 그대로 물어 오던 아이들이 나날이 자취를 감춥니다. 다른 속셈을 품는 아이가 생겨나고, 무언가 꿍꿍이를 키우는 아이들이 늘어납니다. 모두들 제 어버이한테서 다른 속셈을 배우고, 저마다 제 이웃 어른한테서 온갖 꿍꿍이를 익힙니다.

 

.. 말가리다는 아이들에게 온순할 것을 가르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시어머니를 공손히 대함으로써 아이들이 그 모범을 따르도록 하였다 … 아이들의 친구들은 이 말을 들으면 믿을 수 없어 했다. 할머니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기운이 없으셔서 붙잡지도 못할 텐데…… 왜 도망을 가지 않지?"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친구들을 더 놀라게 했다. "엄마가 아시면 슬퍼하시기 때문이야." 말가리다는 아이들을 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한 번도 회초리를 들거나 때리려고 손을 드는 일도 없었다. 말가리다는 매를 들 때 아이들의 사랑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벌을 주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일지라도 그녀는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벌을 줄 때는 먼저 왜 벌을 받아야 하는지를 아이들에게 설명하여 주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벌을 받기 전에 먼저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했다. 말가리다는 벌을 주기보다는 아이들이 자기 잘못을 반성하게 하는 방식을 더 좋아하였다. 말가리다의 교육방법 중 하나는 되도록이면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무슨 이야기든 어미에게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말가리다는 아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해 오든 귀찮아하지 않고 잘 들어 주었고, 그 이야기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또 아무리 지루해도 끝까지 들어 주었다 … 말가리다는 아이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쉽게 용서하고 잊어버려 주면서 스스로 깨달아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  (51∼52, 125쪽)

 

 우리 식구가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우리 아이를 보는 눈결 못지않게 다른 아이를 보는 눈결이 달라집니다. 우리 아이 앞에서도 옳고 바르고 착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어버이여야 하지만, 다른 아이들 앞에서도 옳고 바르고 착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이웃 어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한테만 좋은 밥과 옷과 집을 마련해 주는 어버이로 그쳐서는 안 되며, 다른 아이들 앞에서도 저마다 좋은 밥과 옷과 집을 얻으며 누릴 수 있도록 돕거나 어깨동무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만 생각하며 다른 아이들 밥그릇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만 사랑하며 다른 아이들 밥그릇을 줄일 수 없습니다. 우리 아이만 돌보면서 다른 아이들 밥그릇은 나 몰라라 할 수 없습니다. 없는 살림에도 한 숟가락을 더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모자란 형편에도 한 숟가락 거듭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이웃집에서도 우리를 이런 숟가락나눔으로 도와주었구나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못 느꼈을 뿐, 언제나 우리는 이런 숟가락나눔을 받으면서 하루하루 우리 살림을 이을 수 있었구나 싶습니다.

 

.. "결정을 내리기 전에 아주 조심해서 잘 생각하거라. 그러나 내가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뿐이다. 내 걱정은 말라는 것이지. 나는 네게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다. 결코 네게 기대지도 않을 테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가난했고, 가난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또 가난한 가운데 죽기를 바라고 있다. 내가 한 말을 잘 기억해 두어라." 어머니(말가리다)는 다음에 할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잠시 쉬었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요한 보스코)가 재속신부가 되는 것을 나는 반대하진 않는다. 다만 네가 부자가 된다면 나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게다!" 요한은 재속신부의 길을 택했는데, 이것은 누구의 권유보다도 자신의 특별한 계획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가난을 강조하던 그 놀라운 말씀은 요한의 앞으로의 인생에 등불이 되어 줄 것이었다 … "내 아들이 그런 부잣집에서 산다고요? 그렇게 많은 돈을 받으면서요? 그 돈을 어디에 써야 할까요? 나도 그렇지만 내 아들 요셉도 제 땅이 있으니 다른 돈은 필요없어요. 그리고 내 아들 요한의 영혼은 어떻게 될까요?" 말가리다는 그 부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지도 신부들의 삶이 엉망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83, 86쪽)

 

 그런데 요사이는 나눔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가난'하게 살자고 다짐하고, 또 가난하게 살기는 해도, 다른 식구들보고 함께 가난하자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말을 꾸준히 하기는 하여도 한쪽 귀로 흘려보내십니다.

 

 말가리다 보스코라는 어머님이 요한 보스코라는 아들한테 늘 얘기하던 "네가 부자가 된다면 나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게다!" 하고 외칠 줄 아는 어머님들이나 아버님들을 만나지 못합니다. 모두들 당신 딸아들이 부자가 되기만을 바랍니다. "내 아이 넋은 어떻게 될까요?" 하고 걱정할 줄 아는 어머님들이나 아버님들을 만나지 못합니다. 모두들 당신 딸아들이 나라안에서 손꼽히는 대학교에 척척 붙기만을 바랍니다. 커다란 집과 자가용을 얻고, 당신들보다 돈 더 많고 이름 훨씬 높은 짝꿍을 만나 더더욱 높고 큰 밥그릇을 거머쥐기만을 바랍니다.

 

 

 (3) 굴레 아닌 넉넉한 사랑 보여주는 《풍부한 유산》

 

 이야기책 《풍부한 유산》은 서양종교에서 '거룩한 사람'으로 모시는 '요한 보스코'를 낳아 기른 '말가리다 보스코'라는 어머님 삶과 발자취를 담아 놓습니다. 종교만을 말하는 책은 그리 내키지 않아 거의 안 펼치지만, 말가리다 보스코라는 어머님 삶과 발자취를 담은 《풍부한 유산》에는 종교 이야기란 하나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아니, 참다운 종교 이야기란 '예수 천국 불신 지옥' 같은 말마디만 주워섬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책처럼 '그저 조용히 제 삶을 수수하고 가난하고 알뜰하고 곱게' 다스리는 데에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 이들은 조상 대대로 전해진 관습을 따라 투박하게 살면서, 다만 바라는 것은 마음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화였고, 그들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군인들 봉급을 위해 무거운 세금을 내지 않는 때가 오도록 해 달라는 것뿐이었다 ..  (31쪽)

 

 제 손으로 땅을 일구면서 곡식을 알맞게 거두어 먹으면 넉넉하다고 느끼는 기쁨이 예부터 이어온 삶이요, 이 삶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이며, 이 보람이란 다름아닌 하느님이 내려준 선물이라고 받아들이는 매무새입니다. 이들한테는 낫과 쟁기만 있으면 되지, 총이나 칼이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쟁반과 반짇고리만 있으면 되지, 펜이나 종이란 굳이 없어도 됩니다.

 

 말가리다 보스코는 학교라는 데를 몰랐고, 학교 문턱은 구경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높은 학교를 다녔다고 하는 사람은 가 닿지 못한 자리에 마음으로 가 닿았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당신 몸하고 하나로 맞추면서 슬기롭고 아름답게 살아 냈습니다.

 

.. "하느님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들을 만드셨으니, 하느님도 아름다운 분임에 틀림없단다." ..  (53쪽)

 

 산마을에서 태어나 산마을을 아름답게 느낀 말가리다 보스코는 '산이란 하느님이 내려준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느꼈습니다. '논밭 또한 하느님이 베푼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아이 또한 하느님이 보내준 아름다운 선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당신한테 아름다운 선물을 베푼 그분처럼 당신 삶을 가꾸어 가고자 했습니다. 당신한테 아름다운 선물을 베푼 그분 넋을 당신 아이들한테 고이 물려주고자 했습니다.

 

.. "지금 너에게 고백소에서 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싶구나, 요한아 … 남에게 멋있게 잘 보이려고 하지 말아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일을 하여라. 또 가난이 네가 하는 일의 기초가 되게 하여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가난함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만 가난을 실천하게 만드는 거야. 그러나 가장 큰 가르침은 남에게 요구하는 것을 본인이 먼저 실천하는 것이다 … 아이들을 잘 가르쳐라. 그 아이들이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직분에 따라 잘 살도록 말이다. 신부가 되거나 수도자가 되지 않는다면 농부로서 살아가겠지만 정직하게 살도록 가르쳐라. 너무 욕심을 부리다간 이마에 땀을 흘려 애써 번 돈마저 다 잃을 게다. 내가 지금 한 말을 잘 새겨들어라. 그럴 때, 내가 지금 힘이 들어 다 할 수 없는 이야기들도 다 알게 될 게다." ..  (166∼167쪽)

 

 돈 한 푼 남기지 못했고, 옷 한 벌 남기지 못했습니다. 땅 한 뙈기 남기지 못했고, 책 하나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가리다 보스코는 우리한테 딱 세 가지를 남겼습니다. 하나는 사랑입니다. 둘은 믿음입니다. 셋은 나눔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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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유산

P.라핀, 성바오로출판사(1991)


태그:#책읽기, #하느님, #종교, #보스코, #말가리다 보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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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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