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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5) 지루한 전철 : 인천에서 일산으로 전철을 타고 간다. 꽤 먼길이기 때문에 책을 두어 권씩 챙겨 들고 오간다. 인천에서 종로3가까지 한 권을 읽고, 종로3가부터 대화역까지 다른 한 권을 읽는다. 3호선 전철이 구파발을 지나 잠깐 햇볕이 비치는 땅위에서 달리는 동안, 내 옆에 서서 손전화 놀이을 하던 젊은 분은 누군가한테 전화를 걸더니 제법 큰소리로 "야, 3박 4일이나 걸린다!" 하며 전철길이 지루하다고 이야기한다. 젊은 분 손에는 가방이 없다. 책 또한 없다. 손전화 하나만 달랑 있다. 빈손으로 전철을 탔으니 멀뚱멀뚱 사람 구경 하는 데에도 지치고 손전화 놀이를 하는 데에도 지쳤나 보구나. 다음에는 모쪼록 책 한 권쯤은 챙겨서 전철 나들이를 해 보소서.

 

(096) 사진하는 사람한테 책이란 : 책거리라는 이름으로 책을 떠나보내는 일이 있다. 한 번 배우고 나서 다시는 그 책을 돌아보지 않을 듯한 마음이 되는 셈이라 할까 싶은데, 한 번 배웠기에 더 앞선 지식을 살피고자 하는 마음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는 한 번 읽은 책을 그대로 덮는 일이 없으니까. 학교를 다닐 때 1학년에서 2학년이 되고, 다시 3학년이 된다 할지라도, 1학년이나 2학년 때 배운 이야기를 낱낱이 머리속에 집어넣고 있지는 못한다고 느낀다. 또한, 낱낱이 머리속에 집어넣고 있다 하여도 다시 들추고 또 들추는 동안 새로운 눈을 틔우고 새로운 이야기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래서 교과서이든 신문이든 무엇이든 '한 번 다 떼었으니 버리자' 하고 생각할 수 없다. 나한테는 책거리란 없고, 언제나 다시 돌아보고 거듭 되새기는 책읽기만 있을 뿐이다.

 

사진강좌를 들었다는 어느 분이 강좌를 끝마치고 나서 그때 쓰던 교재를 다른 사람한테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깜짝 놀란다. 몇 번 되지 않는 강좌를 다 들었으니 교재는 없어도 될까? 그분은 한 번 듣고 읽으면 모든 사진 지식이 머리속에 속속들이 파고드나? 이제 강좌 한 번으로 사진찍기에 전문가라도 된 셈인가?

 

강좌를 한 번 들었기 때문에 그 책을 마르고 닳도록 가방에 챙겨 넣고 사진찍기를 하러 다니면서 거듭 읽고 다시 들추고 새로 살피면서 당신 사진길을 힘차게 걸어나가야 하지 않을는지?

 

 

(097) 술 마시는 값과 책 읽는 값 : 술값을 조금 아껴 책을 사 읽는 데에 쓰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이야기를 곧잘 듣는다. 이 나라 사람들은 술 마시고 옷 사입고 놀러다니는 데에 돈을 지나치게 많이 쓴다며, 이렇게 쓰는 돈 가운데 다문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낸다면, 그러니까 다달이 만 원이나 이만 원쯤이라도 책값으로 쓰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는 이야기를 제법 듣는다.

 

그러나 나는 달리 생각한다. 꼭 책 사 읽는 데에 돈을 더 들여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책 사 읽는 데에 돈을 들이려는 매무새가 되려면, 먼저 내 둘레 가난한 이웃하고 스스럼없이 돈이든 품이든 마음을 나누려는 매무새가 되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한다. 스스로 사랑과 믿음과 나눔으로 삶을 다스리고 난 다음에 책을 사 읽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한다. 스스로 참 사람됨과 아름다움과 빛줄기를 찾고 느낀 다음에 책을 사 읽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한다.

 

이럴 때에야 비로소 내 눈길과 생각줄기와 마음밭 살찌울 밥 한 그릇과 같은 책 한 권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고, 즐겨 읽을 수 있으며, 가슴에 고이 새길 수 있다고 느낀다.

 

(098) 같은 책 또 사기 : 헌책방마실을 한 오늘, 집에 틀림없이 있는 줄 알면서 같은 책을 또 산다. 집에 틀림없이 있는 그 책은 '1권' 하나이고, 오늘 헌책방에서 만난 책은 1권부터 4권까지 짝이 모두 맞는 네 권이기 때문이다. 집에 1권이 있어 2∼4권만 장만하면 되지만, 이렇게 되면 헌책방에는 짝잃은 1권이 달랑 남게 된다. 이처럼 짝잃은 1권 하나만 애타게 찾을 책손이 있을 수 있으나, 헌책방으로서는 자칫 '팔기 어려운 애물단지' 하나가 짐처럼 늘어날 걱정이 있다. 그래서 이럴 때에는 겹으로 갖추게 된다 하여도 한 권을 더 장만하고, 나중에 이 한 권을 이웃한테 선물해 주곤 한다. 굳이 네 권을 모두 읽지 않고 한 권만 읽어도 마음이 푸근해진다고 하는 분을 찾아서.

 

 

(099) 책 많은 사람은 집을 옮기고 볼 일 : 책 많은 사람은 집을 옮기고 볼 일이다. 첫째, 집을 옮겨 봐야 자기 집에서 쓸데없이 모아만 두고 있는 짐덩이가 어떤 책인지 알아내어 덜어낼 수 있다. 둘째, 집을 옮겨 봐야 책 묶고 나르는 일이 어려운 일임을 깨닫고 헌책방 임자들이 얼마나 애먹는지를 헤아리는 한편, 이 땅에서 땀흘려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고단함을 터럭만큼이라도 느낄 수 있다. 셋째, 집을 옮겨 봐야 집임자, 이삿짐 센터 사람들, 이웃사람들 삶자락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좋고 나쁜 모습 모두. 넷째, 집을 옮겨 봐야 책 갈무리가 된다. 어지럽게 꽂아 놓고 뒤죽박죽 있던 책들이 가지런히 제자리를 찾아간다. 다섯째, 집을 옮겨 봐야 집에서 잃어버린 책을 찾을 수 있다. 그동안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던 책이 이삿짐을 묶고 나르는 동안 비로소 보인다.

 

(100) 책 읽을 틈 : 책은 틈을 내어 읽어야 한다. 틈이 없다면 쪼개서라도 읽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 꼭 하고픈 일을 할 때, 반드시 가야겠다고 다짐한 여행을 떠날 때, 축구든 영화든 무엇을 본다고 할 때, 새우잠을 잘 때 …… 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라. 돈이든 틈이든 무엇이든 넉넉하거나 넘친다 해서 이런저런 일이나 놀이를 할 수 있지 않다. 돈이 많다고 사랑을 더 잘하나. 널널하게 시간이 있어서 사랑을 더 애틋하게 할 수 있나.

 

돈이 없고 틈이 없어도 쪼개고 나누고 모으면서 알뜰살뜰 살림을 꾸리고 사랑을 하고 나들이를 떠나며 아이를 키우고 학교를 다니는 가운데 책 하나도 장만하여 읽는다. 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책읽기가 아니다. 없기 때문에 더 좋아할 수 있고 한껏 사랑할 수 있으며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책읽기이다.

 

 

(101) 한국땅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 : 출판사로 전화를 걸어 그 출판사가 참으로 좋은 책을 펴냈다고 칭찬을 하고 아주 고맙다는 인사치레를 한 뒤, 이번에 어느 매체에 그 출판사에서 낸 어느 책을 소개하고자 하니까 고 책들을 좀 보내 달라고 말하는 사람. 이런 말도 다소곳하거나 얌전히 고개숙이는 매무새로 말하지 않고 아주 마땅히 거저로 받아야 한다는 듯이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길로 말하는 사람. 그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 주면 어깨를 들썩들썩 우쭐하게 여기는 사람. 그 출판사가 책을 보내지 않으면 쫀쫀하다고 여기는 한편 그 출판사를 나무라고 꾸짖고 해코지하는 말을 글로 써서 괴롭히는 짓을 일삼는 사람. 이들이 바로 이 나라에서 출판평론가입네 도서평론가입네 하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사람들.

 

(102) 내가 책을 쓸 때에는 : 내가 책을 쓸 때에는 누구보다도 내가 첫 읽는이가 된다. 나 스스로 내 글을 눈물겹도록 읽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한테도 내 글을 내보일 수 없다. 내가 먼저 내 글을 웃음꽃 터뜨리며 즐기지 못한다면 아무한테도 내 글을 보여줄 수 없다. 남들이,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글이라든지 반갑게 맞아들일 글을 써야 책도 팔리고 돈도 번다고 하지만, 팔리는 책이나 벌리는 돈보다는 내 삶을 내 손으로 일구거나 가꾸거나 돌보는 데에 더욱 마음이 끌린다. 나 스스로 내 글 하나로 내 삶을 가꾸지 못한다면, 이런 글로 벌어들이는 돈이 얼마나 보람이 있겠는가. 이런 책이 팔려 보았자 뭇사람한테 무슨 도움이나 보탬이나 이바지를 하겠는가.

 

(103) 좋은 책 하나와 책벌레 한 마리 : 나를 깨우치고 일깨우는 책은 내가 태어나기 앞서에도 나왔으나 내가 태어난 뒤에도 나왔다. 나는 이 책들이 나온 줄 모르고 살았다. 그럴밖에 없겠지. 책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늘 새로 나오는 책만 말하지, 예전에 나왔던 훌륭한 책을 도서관이나 헌책방을 찾아가서 하나하나 살피고 읽으라고 말하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내 책삶을 돌아보면 그지없이 바보 같은 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데 이렇게 뒤늦게 알아챈 좋은 책들, 일찌감치 세상에 나와 우리 곁에 있어 왔던 그 좋은 책들 가운데 어느 책도 나를 나무라거나 탓하거나 꾸짖지 않는다. 언제나 내가 스스로 알아보아 주기를 조용히 기다린다. 내가 그 책을 알아보지 못했고, 사서 읽지 않았으며, 이름조차 몰랐어도 나를 꾸중하지 않았다. 그러려니 하거나 거듭 기다렸을 뿐이다. 모르는 일은 잘못이 아니라고 하면서. 언젠가는 알겠지 하면서. 이제부터 알아가면 된다고 하면서. 또한, 그 좋은 책을 몰라보거나 꼭 읽어내지 않았다 하여도 세상을 훌륭하게 살며 아름다이 사랑하고 넉넉하게 믿음을 나누는 사람이 많다고 토닥거려 주기까지 하면서.

 

 

(104) 무거운 책가방 : 내 무거운 책가방에는 책이 가득 들어 있다. 책방마실을 한 번 할 때마다 더 무거워지는데, 책가방에 넣지 못하는 책은 끈으로 묶거나 천가방에 따로 담아 두 손에 나누어 든다. 이렇게 하며 어깨에 사진기를 걸치고 걷다 보면 뒤뚱걸음이 되곤 하는데, 걷고 걸어 집까지 돌아와 가방을 내려놓으면 등판은 온통 땀투성이인 가운데 등짝이 없어진 듯한 느낌이다. 요사이는 허리가 제법 쑤시기까지 하다.

 

터질 듯한 가방을 열어 우르르 쏟아지는 책을 주섬주섬 갈무리하여 닦고 손질한다. 텅 빈 가방을 돌아본다. 가방 등판 자리는 내 땀이 흠뻑 배어 있다. 가방이 임자를 잘못 만나 몹시 애먹는다고 느낀다. 끈을 몇 번 기우고 손보고 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이고 다닐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한두 해 더 버티어 주기만 해도 고맙다. 몇 달에 한 번씩 가방을 빨 때마다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맨 먼저 가방으로 다시 태어나야겠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태그:#책말, #책이야기, #책삶, #책,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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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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