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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ㄱ. 겨울을 난 책

 

 겨울을 난 나무는 새잎을 틔우거나 새꽃을 피우면서 봄을 맞이합니다. 날은 한껏 풀려 겉옷을 벗어 반소매 차림으로 다닙니다. 반바지까지 입고 싶으나 사람들은 아직 두툼한 차림이라 조금 더 기다립니다. 그러나 다른 이 눈길이 아닌 내 몸에 맞추어 입어야 할 옷입니다. 다른 이가 읽는다고 따라 읽는 책이 아니라, 내 눈길에 맞추어 읽는 책이요 내 마음결을 살피며 읽는 책입니다. 다른 사람이 즐겨먹는다고 따라 먹는 밥이 아니라, 내 입맛에 맞추어 먹는 밥이요 내 몸결을 살피며 먹는 밥입니다. 다른 이가 산다고 따라 사는 집이 아니라 내 살림과 식구에 맞추어 사는 집이며, 다른 사람이 타고다닌다 하여 따라 타는 자동차가 아니라 나한테 쓸모가 없으면 거리낌없이 안 타도 되는 자동차입니다.

 

 추운 겨울을 또 한 번 난 나무는 다시금 싱그럽고 푸른 잎사귀를 내어놓습니다. 골목길 꽃나무든 아파트 꽃나무든, 꽃나무는 그 모습 그대로 모두 아름답습니다. 올봄은 지난봄과 또 다른 봄입니다. 지난겨울은 올겨울과 또 다른 겨울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맞이한 봄에 이어 거듭 찾아올 여름이며 가을은 지난여름과 지난가을하고 사뭇 다른 새로운 여름이며 가을이 될 테지요. 2008년에는 2008년이라서 좋았던 봄이고, 2009년에는 2009년이라서 반가운 봄입니다. 비록 나날이 더러워지는 물과 바람이라 해마다 잿빛이 더해 가는 하늘이며 땅이지만, 이러한 가운데에도 따뜻한 숨결을 맛볼 수 있으니 고맙습니다.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는 골목꽃과 골목풀과 골목나무를 골목마실을 하면서 만나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지난주에 헌책방 나들이를 하며 만난 책 《청빈의 사상》(1993)을 펼칩니다. 나카노 고지라고 하는 일본사람이 쓴 책으로, 언젠가 읽은 다른 책에서 '나카노 고지'라는 이름을 보았다는 생각이 들어, 이분 삶이나 생각이나 발자취를 잘 모르면서도 선뜻 집어들었습니다. 줄거리를 미리 헤아리지 않고도 책을 사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세상에서는 '청빈'을 생각하는 일에 마음을 쏟아야 하지 않느냐 싶기도 합니다. 눈에 뜨이는 꼭지부터 하나하나 읽습니다. "자가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는데, 자가용 따위 어떤 것을 몇 대 가졌다고 해서 생의 충실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257쪽)" "세상일에 바삐 뛰어다니고 있는 사람을 보면 일에 마음을 빼앗겨 가장 소중한 것을 망각한 점에서는 모두가 마찬가지다.(139쪽)" "중요한 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내재하는 규율이다.(37쪽)" "많이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탐욕스러운 자를 경멸하고 가난하면서도 맑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자를 사랑하는 풍조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보편적인 것이었다.(233쪽)"

 

 우리한테는 어떤 문화가 '얼마 앞서까지'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오늘날은 무엇이 우리 문화일는지 헤아려 봅니다. 우리한테 문화가 있었는지, 오늘 우리는 무엇을 우리 문화랍시고 가꾸고 있는지, 문화란 없어도 돈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지는 않는가를 곱씹어 봅니다. 봄을 맞아 자전거 타고 책방마실을 하며 되돌아봅니다.

 

 

 ㄴ. 봄을 맞이한 책

 

 엊저녁, 일산에서 인천으로 전철을 타고 오는 길에 서울 종로3가와 광화문에 들러 볼일을 본 다음, 연세대 건너편에 있는 헌책방에 책 나들이를 하러 갔습니다. 글로는 한 줄로 적는 움직임이지만 여러 시간에 걸쳐 바삐 보낸 한나절을 돌이켜보면 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루나 이틀, 또는 한 달이나 한 해쯤 지난 다음 돌이키면 너무도 오랜 일처럼 떠올려지거나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까마득히 잊혀지는 하루하루로 여겨지곤 합니다.

 

 어제 들른 헌책방에서 책값을 셈하기 앞서 한 번 더 골마루를 둘러보다가 《말괄량이 삐삐》(종로서적,1982)를 만났습니다. 이제는 사라진 '종로서적'에서 낸 어린이책으로, 《말괄량이 삐삐》는 그무렵 책으로뿐 아니라 연속극으로도 몹시 사랑받던 작품입니다. 이 사랑은 오늘날에도 그치지 않습니다. 헌책방에서 만난 책은 제가 국민학생 때 보았던 책이고, 그무렵 텔레비전으로 보던 연속극을 환히 떠올려 줍니다. 이 책은 새로운 옮김판에다가 말끔한 판짜임으로 다시 나왔는데, 저로서는 빳빳하고 반들거리는 새책에는 그리 손이 안 가 되읽지 않고 책꽂이에 모셔 놓기만 했는데, 어릴 적 보던 책을 헌책방에서 만나게 되니, 책방에서 집으로 오는 길까지 내내 손에서 이 책을 뗄 수 없습니다.

 

 집에 닿아 무거운 짐가방을 내려놓고 허리를 펴면서 생각합니다. '삐삐는 '1982년판 종로서적 책'으로만 읽어야 제맛이 아니다. 1996년판 시공주니어 책'으로 읽어도 제맛이 난다.'고. 그러나, 책꽂이에서 찾아내어 들추는 1996년판 새 옮김책에 실린 그림은 제 눈에 낯선 그림이고, 새 옮김책 이야기는 글자가 어지러이 춤을 추며 제 눈에 와닿지 않습니다. 제가 낡은 사람인 터라 낡은 책에 익숙한지 모르나, 삐삐라는 아이는 어릴 적부터 이웃집 동무처럼 느끼던 아이였고 처음 삐삐를 만난 뒤로 스무 해가 훨씬 지났어도 똑같은 어린 동무로 느끼는데, 요새 판 삐삐에서는 그 느낌을 살릴 수 없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습니다.

 

 

 지난달에 장만해서 읽고 옆지기와 처제한테도 읽힌 만화책 《퐁퐁》(대원씨아이,2008∼2009)을 바라봅니다. 오늘 저녁이면 다 읽고 덮을 《티베트 승려가 된 히피 의사》(호미,2009)를 건너다봅니다. 요 보름 동안 제 마음을 크게 움직이는 작은 책 《영원한 것을》(성바오로출판사,1964)과 《만리무영》(성바오로출판사,1971)을 들여다봅니다.

 

 마음에 와박히는 책과 살짝 스쳐 가는 책이란 세월을 이겨낸다는 느낌이, 아니 세월과 함께 고이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2009년에도 싱싱하게 살아숨쉬는 1964년 번역이 있고, 2009년 이맘때에만 살아 있는 듯 느껴지는 번역이 있으며, 2054년에도 기쁘게 거듭 읽을 번역이 있습니다. '종로서적'도, '종로서적에서 낸 1982년판 책'도 모두 사라진 오늘날이지만, 그무렵 책 하나 만들고 간수하고 다루던 사람들은 그때부터 비롯하여 먼먼 뒷날까지도 사랑할 책을 꿈꾸고, 스러지지 않고 밝게 타오르는 촛불 같은 책을 바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새로 맞이해도 기쁘고 반갑고 따뜻한 봄날과 같은 책을 꿈꾸고, 이 책을 움켜쥔 우리들한테 앞으로도 고이 빛날 책을 만들라고 구슬 하나 남기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시민사회신문>에 함께 싣는 글입니다.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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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의 사상

나카노 고지, 자유문학사(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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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 좋은 사람, 좋은 말

태그:#책, #책읽기, #책말, #책이야기,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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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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