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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어가면서 뉴스나 신문을 보는 행위 자체에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많아진다. 인간 사회가 동물들의 세계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배웠건만 약자가 보호받지 못하고 힘 있는 자에게 상처받고, 쫓기고, 빼앗기는 오늘의 현실이 케냐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양육강식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는 회의에 빠져들게 한다.

 

'여느 때처럼 아침 다섯 시가 되자, 기상을 알리는 신호 소리가 들려온다'는 솔제니친의 작품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의 첫 문장이자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의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문장이다.

 

그곳이 어디이기에 매일 같이 다섯 시가 되면 기상을 해야 하는가. 슈호프는 스탈린의 정치 이념에 반대하는 자들을 모아 수용하고 노역을 시키는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 그렇다면 주인공 슈호프는 과거 정치인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러시아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던 기자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데모를 하다가 붙잡혀 온 학생이나 노동자였을까.

 

주인공 슈호프는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3년 앞두고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이틀 만에 동료들과 함께 탈주에 성공했다. 그러나 단지 포로가 되었다 돌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조국을 배반하고 독일군의 첩보원 노릇을 했다는 누명을 쓰고 반역죄라는 죄목으로 이곳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게다가 슈호프는 현 러시아 정부에 반(反)하는 이렇다 할 정치적 이념이나 신념을 개진한 적도 없고, 애초에 정치니 사상이니 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거니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다. 이렇듯 비합리적이며 공정치 못한 처사는 비단 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소에 수감된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겪어야만 하는 부조리한 현실의 굴레이다.

 

저자 솔제니친은 이반 데니소비치라는 인물과 강제노동수용소라는 장소를 통해 발현하고픈 이야기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한 개인의 비극적 삶을 통해 바라본 약자에 대한 연민과 인간애일 것이며, 두 번째는 한 나라의 정치지도자가 독재정치를 할 경우 빚어지는 끔찍한 현실과 지배권력, 정치권력에 의한 무자비한 행태들을 고발하고 비판하고자 함일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책 속의 이야기가 1950, 1960년대 러시아의 현실 상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이 대한민국 땅에서도 벌어진 현실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정치권력의 온당치 못한 처사와 행위 아래 대한민국 다수의 약자들이 감내하고 있는 현실이다.
 
무엇이 농사를 짓고 목수일을 하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인이 된 이반 데니소비치를 수용소로 몰아넣었는가. 무엇이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유모차를 동반한 어머니들을 향해 정당치 못한 공권력을 행사하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삶의 터전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가장들의 심장을 불태웠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힘 있는 자, 가진 자, 정치권력자의 '오만'이다.

 

'눈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로 끝을 맺는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고단하고 비참한 하루 일과를 살아서 마칠 수 있다는 안도의 한숨이자 또 다시 내일의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약자의 비명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마음속에, 약자의 마음속에 반어법이 아닌 진정으로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이렇게 슈호프는 그의 형기가 시작되어 끝나는 날까지 무려 십 년을, 그러니까 날수로 계산하면 삼천육백오십삼 일을 보냈다. 사흘을 더 수용소에서 보낸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중 208쪽)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지음, 이영의 옮김, 민음사(1998)


태그:#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이반 데니소비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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