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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멀리 맨해튼이 바라보이는 뉴욕 허드슨 강 언덕 록펠로우 전망대로 오른쪽 소나무 뿌리에 친구의 유해를 수목장하였다고 했다.
▲ 뉴욕 허드슨 강. 멀리 맨해튼이 바라보이는 뉴욕 허드슨 강 언덕 록펠로우 전망대로 오른쪽 소나무 뿌리에 친구의 유해를 수목장하였다고 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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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통의 그림엽서

2005년 정초 나는 <항일유적답사기>를 쓰고 있었다. 중국 길림성 용정 윤동주 시인 생가마을 답사기 가운데 명동교회를 세운 독립운동가 김약연(金躍淵) 선생 이야기를 쓰는데 시인 김규동 선생이 나에게 김약연 선생과 당신 아버지 일화를 편지로 보내주신 적이 있었다. 그 편지를 찾는다고 그동안 모아둔 수백 통의 편지함을 뒤적거리는데 불쑥 그림엽서 한 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엽서를 보낸 이는 1961년 4월에 만난 나의 고1때 짝으로, 그가 1975년 11월 10일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보낸 엽서였다. 그는 내가 가장 가난했고 힘들었을 때 만난 친구로 시골에서 갓 올라온 촌놈을 감싸주고 보살펴 준 매우 인정 많은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의 뜨거운 우정에도 그때 내 처지가 절박하여 학교를 더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어느 하루 그는 고무신을 신고 절룩이며 신문배달을 하는 나를 보고는 군화를 한 켤레 구해 주어 그걸 보물단지처럼 여기며 신문배달하는 내도록 잘 신고 다녔다. 나는 1년 뒤 학교에 복교하여 그 친구보다 1년 늦게 졸업했다. 그런지 10년 후 내가 모교 교사로 있었을 때 그는 회사에서 네덜란드로 발령받아 그곳에서 나에게 엽서를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엽서 이후에는 그와 나는 소식이 끊어졌다. 내가 곧장 답장을 하지 않은 탓이었다.

1975년 로테르담에서 온 그림엽서(앞)
 1975년 로테르담에서 온 그림엽서(앞)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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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로테르담에서 온 그림엽서(뒤)
 1975년 로테르담에서 온 그림엽서(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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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꼭 30년 만에 그 엽서를 다시 보자 그 친구가 그리워지고 친구의 은혜에 보답치 못한 내가 미워졌다. 하지만 친구의 거처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사연을 담아 2005년 1월 30일 <오마이뉴스>에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냈다. 이튿날 이 기사가 화면에 뜬 지 불과 두 시간도 안 돼 다음의 댓글이 올랐다.

옛날 동창분의 주소는… 조회 수:396 , 추천:1, 반대:0
ID 동준아빠(malaikaang), 2005/01/31 오전 11:16:27

42-60,Main St. 5G flushing, N. Y  11355, U S A
TEL : 001-1-718-358-**** (집)
001-1-718-219-**** (직장)입니다. 뉴욕에 계시나 봐요.

출처는 연세대학교 동문회 주소록 2004 발간을 참조하였습니다. 혹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친구의 소식을 꼭 듣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 댓글을 보고 나는 곧장 뉴욕 전호번호를 눌렸다. 그런데 집 전화는 신호가 가다가 한참 후에야 영어로 뭐라고 말하는데, 내 짧은 영어 실력으로는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고(아마도 부재 중 메시지를 남기라는 말인 듯), 직장 전화는 근무시간이 아닌 듯 받지를 않았다. 마침 그 전해 백범 선생 암살배후를 찾고자 미국 방문 중 알게 된 재미 사학자 이도영 박사가 뉴욕에 살기에 그분에게 친구를 찾아달라는 부탁 메일을 보냈다.

뉴욕 한국일보에 사연이 실리다

안녕하세요, 이 박사님! 누리꾼의 도움으로 고교 때 짝이었던 양철웅이라는 친구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30년 만에 알았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걸었으나 잘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수고스럽지만 이 박사님께서 전화로 그 친구가 과연 그곳에 살고 있는지 알아봐주십시오.

한 출판사에서 '내가 만난 사람' 에세이 가운데 굳이 <로테르담에서 온 엽서> 이 야야기를 표제로 뽑아 책을 펴냈다.
 한 출판사에서 '내가 만난 사람' 에세이 가운데 굳이 <로테르담에서 온 엽서> 이 야야기를 표제로 뽑아 책을 펴냈다.
ⓒ 대교베텔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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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 뒤 이도영 박사로부터 메일이 잇달아 왔다.

통화가 안 됩니다. 두 개 전화번호 모두 잘못된 번호라고 합니다. 주소로 한 번 편지를 띄워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없으면 돌아오든지, 아니면 이사 간 곳으로 따라가니까요.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도영 올림

뉴욕 한국일보에 잘 아는 분(Dr. Kim)이 있어서 부탁했더니만, 찾기에 힘써 주신답니다. 기사로 내보낼 예정이라고 합니다. 박 선생님께서 <오마이뉴스>에 올린 기사도 복사해서 드렸습니다. 그리고 연세대 동문회 연락책도 찾고 있습니다. 또 이곳 한국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에게도 연락하려고 합니다. 다방면으로 찾아봐야죠.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요. 도영 올림

내가 친구를 찾는다는 기사가 <오마이뉴스>에 나간 지 꼭 일주일 만에 이도영 박사로부터 친구의 소식을 받았다.

선생님…. 제가 며칠 동안 장거리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 사이에 박 선생님이 친구를 찾는다는 <오마이뉴스> 사연이 뉴욕 한국일보에 기사로 나갔나 봅니다. 서너 곳에서 전화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는데, 확인한 결과 양철웅씨는 10여 년 전에 고인이 되었다는 슬픈 소식입니다. 중동고 동창인 이동호씨 메시지도 있었습니다. 1-718-939-XXXX (댁) 또 한 분 여자 분인데요, 1-845-365-XXXX 입니다. 좋은 소식이 아니라서 선생님 마음 아프시겠습니다. 도영 올림

순간 뒤통수를 뭐로 맞은 기분으로 한참을 멍하니 지내다가 이 박사가 전해준 두 곳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랬더니 동창 이동호씨는 통화가 안 되었고, 친구의 따님이라는 분과는 통화가 되었다. 그분이 전하는 말도 이 박사의 메일 내용과 같았다.

슬픈 사연과 만남들…

이동호씨와 직접 통화 방금되었습니다. 양철웅씨는 1992년 식도암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이용호 목사님이 장례식을 치렀다고 하더군요. 여러분들 얘기를 종합하여 보니, 운명 직전에는 이동호씨만 만났다고 하고, 다른 분들과 일체 연락을 끊고 지냈다고 합니다. 비참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고 합니다. 이동호씨는 박 선생님을 잘 기억하고 있더군요. 제가 이번 박 선생님 친구 찾는 일에 동참하면서 마치 소설 같은 이야기 속에 빠진 듯합니다. 이참에 친구의 영혼도 위로할 겸 꼭 뉴욕에 오십시오. 두 손을 들고 기다립니다. 어서 오십시오. 도영 올림

뉴욕 플러싱에 있는 친구가 생전에 살았던 아파트로 왼쪽 꼭대기라고 했다.
 뉴욕 플러싱에 있는 친구가 생전에 살았던 아파트로 왼쪽 꼭대기라고 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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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나는 2005년 11월 27일 인천공항에서 ‘친구 찾아 3만 리’격으로 뉴욕 행 여객기에 올랐다. 이튿날 뉴욕케네디 공항에 마중 나온 이도영 박사의 안내로 친구를 끝까지 지켜준 동창 이동호와 친구의 장례를 집례해 준 이용호 목사님을 만났다.

이 목사의 안내로 친구가 마지막 살았던 플러싱을 찾았다. 플러싱은 10여 전 전까지만 해도 한인 타운이었는데 이즈음은 중국인들이 더 많이 몰려 산다고 했다. 친구가 살았던 아파트는 6층 붉은 벽돌건물이었는데, 오래 전부터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여 먼 곳에서 바라보며 묵념만 드렸다.

이 목사는 친구가 운명할 때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자기 육신은 화장을 한 뒤 유해를 산에다가 뿌려달라고. 그런데 막상 장소가 마땅치 않아 교통이 편리한 뉴욕에서 뉴저지로 가는 길목으로 허드슨 강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팰리세이드 인터스테이트 파크웨이 록펠로우 전망대 근처의 강 언덕 소나무 뿌리에다가 한 줌 친구의 뼛가루를 뿌렸다고 하면서 이 목사는 나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평생 독신으로 정갈하게 살다가다

허드슨 강 언덕 록펠로우 전망대에서 이 목사(왼쪽)와 함께 그의 명복을 빌다.
 허드슨 강 언덕 록펠로우 전망대에서 이 목사(왼쪽)와 함께 그의 명복을 빌다.
ⓒ 이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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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28일 정오, 나는 이 목사와 함께 맨해튼이 바라보이는 허드슨 강 언덕 친구의 유해를 수목장한 소나무 그루터기 앞에서 고개를 숙여 그의 명복을 빌었다.  이용호 목사가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우리들의 발걸음을 사랑하는 양철웅 형제가 있는 곳으로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특별히 크신 은혜를 주셔서 그동안 서로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서 그리워하던 박도 형제가 이제 때가 되어 고국에서 수륙만리 머나 먼 미국 뉴욕까지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심에 감사합니다. 이제 양철웅 형제가 우리와 육신으로는 함께 같이 있을 수 없지만,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줄 믿습니다.


우리가 다시 그를 만나게 해 주시옵소서. 양철웅 형제가 우리에게 남긴 ‘영원’에 대한 교훈과 원죄에 대한 참회의 교훈을 오늘 이 자리서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면서, 그 교훈을 깨닫고 실천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하나님, 유명을 달리한 옛 친구가 그리워 먼 길을 달려온 박도 형제의 아픈 마음에 위로와 평안을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가 돌아가는 길도 보살펴주시옵소서. …

그날 밤 맨해튼의 한 한식집에서 친구와 이 세상 마지막까지 가깝게 지냈던 평생 단짝 친구 이동호, 이 목사 내외와 함께 저녁밥을 나누며 친구 생전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나는 친구가 참 다복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못했고, 평생 독신으로 가까운 혈육도 없이 외롭게, 청교도처럼 정갈하게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맨해튼 한식집에서 친구의 추모 모임을 마치고(왼쪽부터 이동호, 필자, 이용호 목사님 내외)
 맨해튼 한식집에서 친구의 추모 모임을 마치고(왼쪽부터 이동호, 필자, 이용호 목사님 내외)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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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카페로 온 메일

철웅 삼촌의 조카입니다 | 카페 멤버 동정
2008.09.13 19:51
mko9000 

안녕하세요! 박도 선생님. 먼저 감사하단 말로 인사 올립니다.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사랑하는 삼촌의 소식을 이렇게 선생님의 글을 통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삼촌이 너무 그립고 저도 딸들에게 외할아버지 소식도 알려주고픈 마음에 인터넷을 뒤지다 선생님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을 읽으니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시울이 붉어지는군요! 참, 저는 철웅 삼촌 누나 아들로 서재열이라고 합니다.

이동호 삼촌은 기억이 생생하고요. 어릴 적 삼촌이 읽던 책들, 그리고 남겨놓은 턴테이블과 LP판들을 보고 들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후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삼촌은 예쁜 카드를 보내주셨습니다. 저도 어느덧 마흔하나가 되어 혈육이 그리워 삼촌을 찾았는데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지난해 가을 내 카페에 올라온 글이었다. 이렇게 친구의 혈육 소식을 알게 될 줄이야. 뉴욕에 있는 이동호 친구와 이 목사도 가까운 혈육의 생사는 전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나는 반가운 마음에 곧장 그에게 답장을 보냈고, 서로 몇 차례 통화 끝에 그들 가족이 내가 사는 안흥 산골마을로 찾아오겠다고 하여 쾌히 승낙했다. 그의 가족이 찾아온 날은 하필이면 우리 고장의 명물 안흥찐빵 축제가 열리는 10월 3일이었다. 그날 나는 주최 측의 요청으로 작품전시회 및 사인회를 가졌던 바, 바쁜 행사장으로 네 식구가 찾아왔다.

우리 곧 다시 만날 때까지

이 세상 유일한 형육인 친구조카 서재열 가족과 필자(오른쪽)
 이 세상 유일한 형육인 친구조카 서재열 가족과 필자(오른쪽)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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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빵 축제 행사로 어수선한 틈틈이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대충 들었다. 그는 가까운 혈육이 모두 세상을 다 떠나고 이 세상에는 자기만 남았다고 했다. 차라리 어수선한 행사장 분위기가 좋았다.

조용한 장소였다면 친구 가족의 살아온 이야기가 너무 슬픈 나머지 대성통곡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는 가족과 함께 행사장을 한 바퀴 돈 뒤 점심을 먹고는 떠날 차비를 했다. 아내가 미리 준비해둔 찐빵 상자는 받았지만 내가 준비한 차비봉투는 한사코 거절했다.

“이 차비는 하늘에 있는 삼촌이 준 거요.”

그는 그제야 받아갔다. 그의 가족이 떠난 뒤 한동안 내 마음이 아팠다.

친구가 다녔던 한인교회 그의 자리에 앉아 그의 명복을 빌다.
 친구가 다녔던 한인교회 그의 자리에 앉아 그의 명복을 빌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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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촌이 보고 싶을 때는 대신 선생님을 찾겠습니다.”

하지만 그가 떠난 지 여태 넉 달이 지나도 그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대접이 소홀했는지, 그가 세상사는 게 여유가 없는지? 하기는 요즘 나도 세상 살기가 점점 힘 드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청춘은 희망에 살고, 백발은 추억에 산다”는 말을 곱씹으며 이 글을 마치는데 내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흐른다. 아마도 그 친구에게 진 빚을 이 세상에서 다 갚지 못하고 친구를 보낸 회한의 눈물인가 보다.

우리 곧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하시게, 친구야!

덧붙이는 글 | 관련 기사 -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2005. 1. 31

'오마이뉴스때문에 생긴 일' 응모글

친구를 찾아준 동준아빠와 재미동포 이도영 박사님에게 뒤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태그:#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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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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