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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이다. 70년대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학교 선생님이 정말 무서웠다.  많이 맞고 많이 기합도 받고 많이 혼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견디어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그 때를 생각하면 씁쓸한 미소가 떠오른다.

전북 진안의 마이산 북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ㅁ중학교를 다니던 그 때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학교는 달랑 전 학년이 9학급이었다. 학년 당 3학급씩이다. 여학생이 한반이고 나머지 두 반은 남학생이다. 한 학년이 200여명이 조금 못됐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영어 알파벳을 배웠다. 영어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할 때 꼭 "자~, A, B, C, … " 로 시작한다. 영어시간이 재미있었다. 목이 터져라 "에이, 비, 씨이~"를 따라 하던 아이들의 빨개진 얼굴이 떠오른다.

무조건 1등, 친구도 없고 우정도 없었다

2학년이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악명 높았던 아무개 선생님이셨다. 물론 좋은 의미로 말하면 열정이 많으셨고, 나쁜(?)의미로 말하면 이해할 수 없는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의 타인에 대한 경쟁의식은 남달랐다. 달랑 3학급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공부도 일등을 해야 하고, 체육대회도 일등을 해야 하고, 환경정리 심사도 일등을 해야 직성이 풀리시는 선생님이셨다.

체육대회는 전 학년 9학급이 토너먼트로 축구도 하고, 농구도 하고, 배구도 하고, 핸드볼 경기도 한다. 3학년이 유리한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도 일등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작살(?)이 났다.  그 때만 해도 학교에 군사문화가 팽배해 있던 때였다. 모의고사를 보고 나거나 정기고사를 보고 나면 성적순대로 운동장에 집합을 시켰다.

일등에서 꼴등까지 조회대 앞에 줄을 선다. 그리고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그리고 나서 선생님이 몽둥이로 1등한 학생의 엉덩이를 내리치신다. 정말 세게 때렸다. 이어서 1등한 학생에게 그 매를 주고 2등한 학생부터 꼴등한 학생까지 매질을 시켰다. 조금이라도 봐주는 기색이 보이면 선생님은 매질한 학생에게 다시 혹독한 시범(?)을 보였다.

이때부터는 친구도 없고 우정도 없다. 내가 살기위해 별 수 없었다. 이런 과정이 계속됐다. 결국 성적이 제일 아래인 학생은 60여대를 맞아야 한다. 바로 한 때 군대에서 자주 행해졌던 '줄빳따'다. 80년대 초에 군대를 갔을 때에 군대에서도 이런 구타행위는 없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기합이었다.

그때 성적이 좋지 않아서 맞았던 학생들의 기억 속에는 이런 일들이 과연 어떤 추억으로 떠오를까?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추억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선생님이 출세를 위해 그러신 것은 아닌 것 같다. 선생님의 어긋난 성취욕이 아니었을까 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편안한 차별대접을 받은 것이고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가혹한 차별대우를 받은 것이다.

또 하나의 차별대우는 바로 영어단어와 본문 암기였다. 담임 선생님은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영어의 중요성을 이미 예견하셨는지도 모른다. 영어 교과서에 나오는 각 단원의 새로운 단어와 숙어를 다 암기를 해야 한다. 칠판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 판서를 해야 한다. 하나라도 틀리거나 누락하면 불합격이다. 그러면 집에 갈 수가 없다. 해가 떨어져도 암기해야 한다. 심지어는 한밤중까지도 남아서 암기를 해야 했다.

그렇지만 단어와 숙어를 다 알고 있는 학생은 바로 집에 갔다. 조금 영어를 하는 학생은 일찍 귀가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학생은 늘 컴컴한 밤에 집에 가야했다. 전기불도 드물던 시절 어둔 시골길을 어린학생이 가는 것은 정말 무섭고 두렵운 일이었다. 귀신도 흔하고 도깨비도 흔했던 시절에 밤길은 그야말로 무서움 그 자체였다. 세상에 이런 차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단어와 숙어 암기가 끝나면 이제는 본문을 암기해야 한다. 3페이지 가까이 되는 영어문장을 보지 않고 암기를 해야 한다. 중간에 멈추거나 더듬거리면 처음부터 다시 외워야한다. 정말 고역이었다. 읽을 줄도 잘 모르는 학생에게 영어본문을 암기하는 것은 참으로 버거운 일이었다. 발음기호를 전혀 모르는 학생들은 영어를 잘하는 학생에게 과자를 사주면서 우리말로 발음을 써 달라고 부탁을 해 영어는 보지 않고 우리말 발음만 외웠다.

그 때 암기했던 영어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좋은 학습 방법은 아니었지만, 시골학생에게 카세트도 없고 원어민도 없었던 시절 오로지 영어 선생님의 수업에만 의존했던 학생들에겐 참 도움이 많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영어에 흥미가 없었던 학생들은 아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엉덩이가 시퍼렇게 얻어맞고 팔다리가 얼얼할 정도로 기합을 많이 받았던 시절이었다.

탈락하면 한밤중까지라도 남아서 암기해야

그래도 한달에 한번씩 파티를 했다. 각자 준비한 음식으로 학급 파티를 했다. 학생들은 옥수수 튀밥도 가져오고, 보리와 쌀 튀밥도 가져온다.  고구마, 감자도 삶아오고, 어떤 학생은 과자와 음료수를 사오기도 하고, 시루떡도 해오는 아이도 있었다. 이렇게 가져온 음식을 먹을 때면 모두가 즐거운 표정이었다. 선생님에 대한 나쁜 감정을 가진 학생들도 이 때만큼은 모든 것을 잊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학교를 그만 두거나 다른 반으로 옮겨간 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3학년이 되면서 남녀공반이 편성이 되었다. 여학생 14명과 나머지 남학생이 한반을 이룬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열반이었다. 수준별 수업이 아니라 분명한 우열반이었다. 지금의 수준별 수업도 사실상의 우열반으로 '차별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때는 더 심했다. 물론 고등학교 진학하는 학생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도 분명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때는 느끼지 못했던 차별의 추억이었다.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수준별 수업도 먼 훗날 하급반에서 수업을 받은 학생들은 아마 '지독한 차별의 기억'으로 남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앞선다. 결코 교육적이지 못한 수준별 수업 아니 우열반 수업이 학생들에게 줄 심적인 고통은 결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 당시에 다른 반에서는 숙제도 내지 않고 시간나면 축구시합을 많이 했다. 그러나 진학반인 우리 반에서는 오로지 공부만 했다. 기숙사 없었던 시절에 각자 두툼한 이불을 학교에 가져와 교실의 책상과 의자를 침대로 만들어 교실에서 잠을 자면서 강제적인 야간자율학습도 했다.

운동은 단지 체력장 검사를 위해 하는 체육이 전부였다. 공을 차고 싶어 학교에 오는 아이에는 엄청난 고통이었을 게다. 그래도 많은 학생이 좋은 성적으로 명문고에 진학하고 지금에 사회에서 각자 열심히 생활하고 있다는 '나만의 위안'이 고개를 내미는 것은 이기적 유전자의 얄궂은 장난이 아닐까?

그때 그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게다. '차별의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던 아이들에겐 미안하지만 그 때 외웠던 영어가 지금 영어를 가르치고 있는 나에게는 참으로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차별의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고마운 추억'인 것을.

덧붙이는 글 | '차별의 기억' 응모글입니다.



태그:#차별대우, #우열반 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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