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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은 거리 -  생장 피드포르에서 론세스 발레스까지 약 25km

  지도
▲ 첫 코스 지도
ⓒ 문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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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4일, 서울을 출발해 일본 도쿄 나리타 공항을 숙박지로 경유하고 하루 뒤인 25일에 프랑스 샤를르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마음속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반반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북역으로 가서 환승해 오스테릴리츠 역에서 내렸다. 역사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노숙자 숙소 같은 침대가 있는 밤기차를 타고 26일 아침 7시 45분에 루흐드 역에 도착했다.

할 일이 없으니 하루 종일 도심을 방황했고, 늦은 시간에 기차를 갈아타고 드디어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출발지인 생장 피드포르 역에 도착했다.

조그만 이층집 같이 생긴 출발지 생장 피드포르역 전경
▲ 생장역 조그만 이층집 같이 생긴 출발지 생장 피드포르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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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장 피드포르에 저녁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공립 알베르게는 이미 사람들로 다 찼고, 비싼 사설 알베르게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 사설 알베르게는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소개를 받을 때는 아침식사를 포함해서 12유로라는 설명을 들었는데 막상 짐을 풀고 등록을 하려고 하자 15유로를 내라고 한다. 그렇다고 안 묵을 수도 없고.  

드디어 산티아고를 향해 출발한다는 설렘과 낯선 곳이라는 느낌 때문에 잠을 설쳤다. 3유로나 하는 아침식사라는 게 고작 마른 바게트 2조각과 비스킷, 커피 한 잔이다.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채 동이 트기 전에 길 위로 나섰다. 새벽별이 하늘 위에 떠 있다. 드디어 출발이다. 함께 걷게 된 사람은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의 여성회원과 해군대령 출신 남자.

알베르게 앞의 약간 가파른 골목길을 다 올라가면 아스팔트로 포장된 넓은 도로가 나오는데 거기서 길이 세 갈래로 나뉜다.  그 중 오른쪽 길은 우회하는 편안한 아스팔트 길이었지만 집 앞의 골목 방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 것 같아서 가지 않았고, 가운데 길은 피레네 산맥을 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포장도로라 생각해서 가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길이 왼쪽 생 미첼 성당 방향이었다. 표지판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도 아스팔트길만 나온다. 오르막길이 나와야 하는데 한 시간을 걸어도 나오지 않는다. 길을 잘못 든 것이 아닐까, 슬슬 불안해진다. 그런데 안개가 걷히면서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고 있다.

창문마다 덧문이 닫힌 채 예쁜 꽃들로 장식되어 있는 집
▲ 출발지 근처의 길가 예쁜 집 창문마다 덧문이 닫힌 채 예쁜 꽃들로 장식되어 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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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집은 창문마다 덧문이 달려 있다. 그 옛날 이슬람인들이 쳐들어 왔을 때 숨느라고 덧문을 달았나 했더니 한 여름의 뜨거운 햇빛을 막기 위한 것이란다. 길을 잘못 들었다면 나중에 길을 다시 찾으면 되고, 하면서 일출사진을 찍기 시작한다.

드넓은 목초지 끝에서 아침 해가 떠오른다. 아침형 인간과는 거리가 먼 올빼미형 인간인 내가 희뿌연 안개 사이로 올라오는 아침 해를 언제 보았던가. 가슴 깊숙이 맑고 신선한 아침공기를 양껏 들이마시고 나니 그제야 잘못 들어선 길에 대한 불안감이 슬슬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한다.

지도를 펼쳐 확인하니 이 길이 분명히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잘 모르겠다.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자동차를 세워 손짓 발짓 하며 나폴레옹 길을 물었더니 세 갈래 길 중 가운데 길이 그 길이라고 한다. 나폴레옹 길은 '나폴레옹 할배'가 스페인 쳐들어갈 때 넘은 길이라고 한다.

우리가 걷는 길은 생 미첼 성당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공원묘지를 지나 나폴레옹 길과 중간에 합류할 수 있단다.

40여 일의 고난 장정 첫날부터 이 무슨 고생이람. 툴툴거리면서 생 미첼 공원묘지를 지나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길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한 시간여를 걸어 마을을 지나고 목초지를 돌아 나가다 드디어 길을 찾았다.

당신은 보았는가, 등 뒤에서 따라오며 나를 따뜻하게 비쳐주는 아침햇살과 해발 1500미터의 산 위의 푸른 목초지를. 완만한 능선을 따라 마을과 마을이 이어지고 있는 풍경은 달력 속의 사진에서 보던 그대로였다. 언덕을 다 올라가 나폴레옹 길과 합류되는 갈림길에서 잠시 쉬면서 올라오던 길을 돌아본다. 안개가 마을을 감싸 안아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잃고 헤매는 도중에 일출이...
▲ 목초지 끝으로 올라오는 아침 해 길을 잃고 헤매는 도중에 일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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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 산맥, 나폴레옹 할배가 그 옛날 스페인을 세 번씩이나 침략하면서 넘나들었다는데, 지금은 자동차들도 넘고 소 같은 가축들도 넘는다. 산 중턱의 전망대에 지도가 새겨진 동판이 있다. 산티아고 길을 처음 순례했다는 야곱이 걸어가는 모습도 새겨져 있다.

무려 이천 년 전인가. 서른을 갓 넘긴 나이로 세상을 구원하고 죽었다는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야곱. 그런데 과연 그는 당시 전쟁이 수없이 치러지던 이 길 위에서 어떻게 먹고 어디서 자면서 걸어갔을까?

예전에 순례자들은 순례를 목적으로 이 길을 걸었지만 이제는 여행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길이 된 산티아고. 그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걷는 것이 좋아 2007년부터 일 년 동안 대한민국 땅 4천여 킬로미터를 걸었다. 걷고나면 늘 무언가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남았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낯선 도시, 낯선 길이었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던 것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땅이어서 그랬을까? 우리 땅을 걷고 나면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 늘 갈증이 느껴졌다. 끝없이 펼쳐진 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다는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찾아온 길, 산티아고.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다.

첫 번째 알베르게가 나온다. 하룻밤 자는데 30유로를 줘야 하고, 그것도 선착순으로 예약을 해야하는 곳이라기에 예약을 할까 말까 노심초사했는데 안 하길 잘했다. 생장 피드포르를 출발한 지 두세 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 더 망설여졌던 것이다.

이곳은 늦게 도착해 침대가 없으면 텐트에서 자야 한단다. 알베르게에 있는 침대는 남녀 구분을 해서 배정하는데 텐트는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있단다. 이런 경우 한국 여자들은 참으로 난감할 것 같다.

전망 좋은 오리손 야외 카페에서 한잔에 1.5유로를 주고 카페 콘레체를 주문했다. 한국에서 마시던 맥심, 오리지널, 모카골드 1회용 커피 한 봉지가 그립다. 싸고 간단하게 마실 수 있지 않나. 커피를 한 모금씩 아껴가면서 마신다. 도보여행가 김남희는 이 곳을 제대로 못보고 지나쳐서 아쉬웠다고 했던가.

반드시 한국에서 예약 후 가야만 하는 곳
▲ 첫 알베르게 반드시 한국에서 예약 후 가야만 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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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이 길을 가시는 분들 중에 경비 걱정이 없다면 모를까, 가급적이면 이곳을 예약하지 말고 부지런히 지나치라고 권하고 싶다. 생장 피드포르에서 걷기 시작했다면 걷는 거리가 지나치게 짧기도 하고.   

사람들이 지나가도 별로 놀라는 기색 없이 멀뚱거리며 쳐다보는 양떼들과 소들.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평화로워 보인다. 천천히 여유롭게 걷는다. 이런 길을 어찌 바삐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아, 저 산 등성이를 한번 보라. 마치 어미 소의 잔등처럼 부드럽지 않은가. 하늘은 더 없이 높고 푸르다. 양들과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길을 걷는 나, 내일 아침에도 출근 걱정 없이 이 길을 걸을 수 있다. 으아악, 너무 신난다!

누군가 신고 가던 신발이 헤져 더 이상 신고 갈 수 없어서였을까. 나무 기둥에 신발 한짝이 매달려 있다. 돌무더기로 만든 길 안내 표시들. 내 앞을 지나쳐 걸어가는 순례자들.

햇살이 너무 좋아 풀밭에 드러누워 오늘 넘어가야 할 높은 오르막길을 올려다본다.

피레네 산맥 정상 부근에 있는 나무로 된 길 안내 표지판
▲ 길 안내 표지판 피레네 산맥 정상 부근에 있는 나무로 된 길 안내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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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 만들어져 있는 순례자들의 쉼터
▲ 순례자용 토굴 돌로 만들어져 있는 순례자들의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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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길을 올라가다 보니 무덤 하나가 나온다. 오래 전에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무덤이다. 사진을 보면서 저 길을 지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는데 지금 그 길 위에 서 있다. 이 분, 무덤 안에서 순례자들과 교감을 나누고 있을까? 고이 잠드소서.

토굴이 보인다. 처음에 순례에 나섰던 사람이 묵었던 곳일까? 임시 숙소가 된 뒤 지나가던 순례자가 자고 갔던 토굴일까? 안을 들여다보니 최근까지 사람이 잤던 흔적이 남아 있다. 불을 피운 것도 같고. 지붕은 어지간한 비바람을 막아줄 것 같다. 비록 초라하지만 이곳에서 하룻밤을 잔다면 산등성이를 지나가는 바람소리나 짐승의 울음소리, 혹은 비라도 내린다면 그 소리가 무척이나 감미롭게 들리지 않을까?

산 정상에 다 오른 뒤 완만한 능선을 걷다가 내려가는 길에 식수대를 만나게 된다. 아주 고즈넉한 숲속 오솔길을 한참 걸으면 나오는 곳이다. 이렇게 높은 곳에 이런 식수대를 마련한 사람들, 복 받을지니. 여기도 순례자를 위한 가리비 조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드디어 스페인 땅이 시작된단다. 나라와 나라 사이인 국경을 통과하는 산을 넘는다고 생각을 했을 때는 사뭇 비장한 느낌이었는데 이렇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나갈 수 있다니 신기하기만 하다. 남북으로 갈라져 마음대로 오가지 못하는 우리나라를 생각하니 더 그렇다.

드디어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섰다. 엄청나게 큰 달팽이 녀석이 겁도 없이 길에 나와 있다. 얼른 숲으로 숨을 것이지,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밟히면 어쩌려고. 사진을 찍고 지팡이를 댔더니 금세 몸을 움츠린다. 해치려는 게 아니란다. 숲으로 옮겨주고 다시 걷는다. 오래 오래 살거라.

순례 첫 숙소인 스페인 땅의 론세스 발레스 공립 알베르게
▲ 알베르게 순례 첫 숙소인 스페인 땅의 론세스 발레스 공립 알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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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걸어서 도착한 첫 숙소는 론세스 발레스 알베르게인데 백여 명이 넘게 잘 수 있는 대형 알베르게다. 지붕은 터널처럼 둥글다. 안에는 2층 침대 수십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연인들은 이런 숙소에서도 진한 애정행각을 해서 침대를 삐걱거리게 만든다.

알베르게 정보
순례자 저녁식사 예약 10유로/숙소 6유로(4시 오픈)/ 다른 식당이나 가게 없음/부엌 없음/접수 테이블에  따끈한 차 있음/언덕길 다 내려와 마을을 끼고 돌아 나와 길 건너에 알베르게 있고 맞은 편에 등록하는 협회가 있음/보통 걷는 속도로 도착하려면 9시간 정도 소요되는 코스(아침 일찍 출발해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는 게 여러모로 여유가 있음)  

유명한 성당이 있는데 8시에 미사/마을 광장에 성지 재탈환 기념탑/이곳은 스페인 교회 역사에서 의미가 깊은 곳이라고 함/1212년에 나바라 지역의 왕 산초 엘 푸에르타(Sancho El Fuerte)가 이슬람 군대를 물리치고 기독교 성지 재탈환의 신호탄이 되었다고 함.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 카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산티아고, #도보여행, #생장 피드포르, #알베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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