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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교회 담임으로 온지 올해로 5년째 넘는다는 이종호 목사님
▲ 추수감사 예배 등대교회 담임으로 온지 올해로 5년째 넘는다는 이종호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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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교회의 추수감사절 음식으로 놓인 호박이 이채롭다.
▲ 단상 옆에 놓인 추수감사절 음식 가난한 교회의 추수감사절 음식으로 놓인 호박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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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수는 작아도 피아노 치는 선생님은 계신다. 피아노 치는 선생님은 등대교회가 처음 생길때부터 함께 한 등대교회 산 증인이시다.
▲ 피아노 선생님 교인수는 작아도 피아노 치는 선생님은 계신다. 피아노 치는 선생님은 등대교회가 처음 생길때부터 함께 한 등대교회 산 증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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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특송을 부르는 분은 목사님과 동침하는 분이시다. 흔히 사모님이라 부른다. 오늘도 10여명 남짓 모여 예배를 드렸다. 아이들까지 17명 정도.
▲ 추수감사절 특송 앞에서 특송을 부르는 분은 목사님과 동침하는 분이시다. 흔히 사모님이라 부른다. 오늘도 10여명 남짓 모여 예배를 드렸다. 아이들까지 17명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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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3시 30분경 깨어 밥먹고 출근하였습니다. 오후 5시부터 특근 작업하기 때문입니다. 밤샘 일하고 일요일 아침 08시 퇴근 했습니다.

"오늘 추수 감사절이라 좀 늦게 올거예요"

퇴근하고 온 나에게 아내가 미리 말합니다. 아내는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있는 교회에 다닙니다. '추수 감사절이라...' 아내의 추수 감사절 이라는 말에 15년 전 내가 다녔던 교회가 생각 났습니다. 갑자기 그 교회가 궁금해졌고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제 인지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그 교회를 잊을수가 없습니다. 90년대 초 노동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을때로 기억됩니다. 그 때 나는 노조 선전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전지 내려고 밤늦게 인쇄소에 들렀는데 마침 그곳에 다른 한 분도 복사를 하러 들렀습니다.

"저도 노동문제 관심 많은데 언제 한 번 들러요"

인자하게 생긴 그분은 내게 복사된 주보 한장을 주고 인쇄소를 나갔습니다. 그분이 바로 등대교회를 세운 박충호 목사님 이었습니다. 그땐 전도사님으로 막 교회를 시작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교회에 별로 관심없던 나는 노동문제에 관심 많다는 그분의 말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교회 목회 하시는 분이 노동문제에 관심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받은 주보에 '등대교회'라 되어 있었습니다.

'와, 이런 교회가 다 있었네.'

어느 일요일 주소를 보고 예배 시간에 맞춰 찾아가 보았습니다. 10여명 남짓 교인이 예배를 보았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들은후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민중교회란 말도 처음 들었고 교회에 나가 설교를 많이 들어 보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 가슴에 와 닿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예배후 곧바로 점심준비에 들어갔다.
▲ 점심 준비 예배후 곧바로 점심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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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치는 선생님 지도로 어린이들 오카리나를 연습하였다. 점심 준비하는 중에 어린이 예배를 했는데 오카리나 연습을 했다.
▲ 오카리나 연습 피아노 치는 선생님 지도로 어린이들 오카리나를 연습하였다. 점심 준비하는 중에 어린이 예배를 했는데 오카리나 연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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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교회는 예배후 밥상공동체를 가장 중요시 여긴다.
▲ 밥상공동체 등대교회는 예배후 밥상공동체를 가장 중요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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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중에도 일반 찬송가와 민중가요를 같이 불렀습니다. 마음에 딱 들어 매주 참석 했었습니다. 등대교회는 일반 교회랑 달랐습니다. 일반 교회는 '예수믿고 천국가자'가 주요 관점인데 반해 등대교회는 사회문제,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는게 교회의 책임이라는 관점을 피력했습니다. 당시 사회문제, 노동문제에 관심 많았던 내게 신선하게 다가 왔습니다.

지역에서 노동자 집회가 있으면 교회 차원서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5.18 광주 항쟁 집회 땐 전교인이 버스를 빌려 참여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땐 정말 신나고 재미있게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다 직장 따라 울산을 뜨는 바람에 더이상 등대교회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거의 15년이 지난 오늘 다시 등대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서울 살다 다시 울산 내려와 지낸지 8년 넘었지만 먹고사는 일에 밟혀 마음으로만 떠올리던 등대교회. 오늘 추수 감사절을 맞아 피곤치만 가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어떻게 오셨어요?"

건물 4층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낑낑 거리며 올라가니 물걸레질 하던 한분이 반깁니다.

"오마이뉴스에 등대교회를 좀 소개 하려고 왔습니다"

그 사이 다른 목사님이 시무중이었습니다. 교인수도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게 없이 보였습니다. 몇몇은 15년 전에 보던 그 분들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15년 전 처음 교회를 세운 목사님은 강원도 어느 지역에서 활동 중이라 했습니다. 두번째로 시무 했던 목사님은 울산노회에 들어가 활동 중이라 했습니다. 이번에 세번째로 오신 목사님도 예전에 보았던 목사님과 성향이 같았습니다. 첫 인상이 참 털털하고 소박해 보였습니다.

예배후 교인들은 서로 도우며 밥상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추수 감사절이라 그런지 푸짐한 밥상이 차려졌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밥상공동체를 지향하는 것도 그때랑 달라진게 없습니다. 예전에도 꼭 예배후 밥상공동체란 이름으로 밥을 함께 먹었었습니다.

두분 모두 털털하시고 소박하신거 같다. 등대교회 이미지랑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 목사님과 사모님 두분 모두 털털하시고 소박하신거 같다. 등대교회 이미지랑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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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이 차려지는 사이 나는 새로 오신 목사님과 잠시 대화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 어떻게 등대교회 오시게 되었습니까?
지난 2003년 전도사 시절 포항 제철 공장 근처에 있는 한 교회에 교육 전도사로 일했어요. 계약직 전도사로 1년 시무하고 집에서 휴식 중에 있었습니다. 다른 자리 찾아 보려고 경산에 있는 영남신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을 살펴 보던중 등대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경산에 있는 영남신학교가 제 모교거든요. 거기 구인광고가 났더군요. 임시설교자 구함. 이렇게요. 2004년 1월 4일 첫 예배를 본후 교인들과 교감이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 후 2년 정도 울산과 포항을 오가며 일주일 한차례씩 주일 설교를 맡아 했지요.

- 포항과 울산은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이유가 뭘까요?
그 당시는 제가 영남신학교에 재학중에 있었거든요. 일주일 한번 10만원 받고 주일 설교를 했는데 적은 돈이 아니었지요. 1시간 설교하고 10만원이면 큰 돈이었습니다. 저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어요.

- 큰 교회 부목사 자리 같은 곳을 찾아가도 될텐데 이런 작은 교회를 택한 이유가 뭐죠?
큰 교회에 자리가 있긴 하지요. 하지만 나이 제한이 35세 전후 입니다. 늦게 신학 공부한 저로서는 나이 제한에 걸려 큰 교회를 선택할수 없었습니다. 그보다 등대교회 시간 예배하는 2년간 교인들과 정이 많이 들었어요. 인원수는 적지만 모두 정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는 분들이더라구요. 그래서 등대교회를 책임지고자 마음먹게 되었습니다.

- 언제쯤 담임 목회자로 오셨고 어떻게 교회 운영을 하실건가요?
2004년 1월 초부터 2005년 12월 말일까지 근 2년간 주일 예배만 해오다 좀 힘들고 어렵지만 등대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하기로 결정 했어요. 그래서 지난 2006년 1월 초 등대교회 공식 담임목사로 재직하고자 가족들과 함께 울산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등대교회는 기존교회와는 다른 민중교회에 뿌리를 두고 생겨난 교회인 만큼 그런 부분을 존중해 주려고 합니다. 저 또한 민중신학에 깊이 공감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다른 사회 현상이 나타나고 있고 세상도 많이 변한 감이 있어 그에 맞게 운영해 나가려고 합니다.

15년전 그 치열했던 민중교회의 이미지는 많이 퇴색된 느낌은 어찌할수 없었습니다. 민중가요 책도 없고 민중신학에 대한 자료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실감할수 가 있었습니다. 15년전 30대 초반이던 내 나이도 이제 40대 후반이 넘어서고 있으니.
하지만 간만에 가본 그 등대교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감 넘치는 분위기는 똑 같았습니다. 또 새로 부임한 목사님과 사모님은 참 소박한 분이었습니다. 시간 날때 마다 찾아 가 보고 싶어 집니다.

화초는 싱싱했다. 이 화초처럼 사회를 푸르게 하기를 바란다.
▲ 교회에 있는 화초 화초는 싱싱했다. 이 화초처럼 사회를 푸르게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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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등대교회, #밥상공동체,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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