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콜로라도의 덴버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고 있나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는 콜로라도 덴버에 도착한 것은 22일 오후였다. 덴버는 록키산맥으로 가장 유명하다. 비행기 창 밑으로 상상했던 눈 덮인 장엄한 산맥의 모습을 기대했지만 보기는 어려웠다. 대신 황무지와 같은 느낌을 주는 끝없이 펼쳐진 벌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서 몇 백 년 전 인디언들이 말을 타며 소를 쫒으며 초원을 누볐으리라. 덴버는 6천 피트, 그러니까 대략 해발 1.5Km의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mile high city'(1마일 높은 도시)라고도 불린다. 잠시 이런 저런 공상을 하는 나를 현실로 되돌아오도록 한 것은 비행기 기장의 안내방송이었다. 기장은 덴버에 도착했음을 알리며 민주당 전당대회(DNC: Democrats National convention)에 오는 사람들에 대한 환영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는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2008년 미국 대선의 민주당 후보로 공식 지명된다. 덴버공항에 도착하니 곳곳에 민주당 전당대회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이번에 미국여행을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버락 오바마(Barack Obama)라는 인물 때문이었다. 사실 미국 대선이나 오바마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바마 열풍'에 대해 알고 싶어 왔다는 편이 더 정확하다.
오바마는 민주당 경선에서 흑인 대 여성의 대결에서 승리한 이후, 이제는 미 대선사상 최초로 '흑 대 백'의 대결을 펼치려 하고 있다. 그에 대한 얘기는 이제 세계적 화젯거리다. 그의 개인사 역시 극적이다. 아프리카 케냐인인 아버지, 캔사스 출신의 백인 어머니, 의붓아버지와 엄마와의 인도네시아에서의 생활, 하버드 대학 졸업 등 수 많은 얘깃거리가 그를 따라 다닌다.
그러나 그의 얘기를 단지 흑백 대결이나 개인적 성공 스토리로만으로 한정하기는 어렵다. 누구나 느끼듯이 이것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사회에 대한 '도전'의 낌새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오바마 스스로도 미국의 진정한 '변화'를 외치고 있으며, 흑인 출신의 최초의 대선후보의 도전이 어떤 내용일지 어렴풋이 추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것은 제러미 리프킨이 말한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일 수도 있고, 폴 크루그만 교수가 얘기한 '평등의 위기'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도전'이라는 것이다.
오바마가 얘기하는 진정한 변화가 무엇인지는 차츰 추적해 나가봐야겠지만 그것은 무너진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미국 사회 내부로부터의 거대한 울림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이번 미국 대선은 바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대중의 생명력'과 관련된 이야기가 될 것이며, 그것은 결코 한국 사회 내부의 문제와도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지난 2007년 대선에서 민주화로 상징되는 한국 정치의 한 축이 대중들로부터 외면 받고 무너져 내려 앉았다. 일단 이번 글에서는 그에 대한 해석이나 평가는 제쳐두기로 한다. 다만 사회를 지탱하는 '한 쪽의 가치'를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대중적으로 붕괴하게 되면 새롭게 집권한 정치권력과 그 반대편 입장에 서 있는 대중들과의 직접 충돌하게 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한국 사회 곳곳에서 충돌과 갈등, 그리고 분열이 시작되고 있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입장에 따라 그 싸움의 근원에 대한 시각은 다를 수 있다. '불온한 좌파들의 책동'일 수도 있고, '대중들의 삶의 위기'가 이유일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붕괴된 사회정의와 리더십의 오류로부터 기인한 '대중들의 삶의 위기'부터라면 우리가 2008년에 펼쳐질 '오바마의 전쟁'에 관심을 가져볼 만한 이유가 된다.
지금 오바마는 미국의 사회정의나 경제구조와 같은 근본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또한 인종, 정치, 지역, 문화, 가치 등으로 분열된 미국에 대한 화합을 외치고 있다. 그것은 '분열된 대중'에 대한 얘기이며, '공동체의 생존'에 대한 얘기이다. 그것은 분명 나의 관심사이다.
이번 여행에 앞서 오바마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베스트셀러가 된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Dreams from My Father)이나 <담대한 희망>(The Audacity of Hope)과 같은 본인의 저서는 물론 그의 연설문 모음과 <오바마의 나라>(The Obama Nation)와 같은 그를 비판하는 '안티 오바마' 책까지 다양했다. 또 샌프란시스코 공항 서점에서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오바마 경제>(Obamanomics)라는 책까지 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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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오바마를 다룬 책들, 그리고 현지 신문들. 미국에서도 오바마 열풍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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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그의 경쟁자인 공화당 후보인 존 맥케인(John McCain)에 대한 책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수 시간에 걸쳐 서점에서 발견해 낸 것이라고는 맥케인과 그의 보좌관이 수년 전에 함께 쓴 <인격이 운명이다>(Character is Destiny)라는 번역본이 유일했다. 그나마 반갑게 산 그 책은 찰스 다윈, 윈스턴처칠, 마크 트웨인, 만델라와 같은 유명인사의 얘기로 채워져 있어 맥케인을 탐구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했다.
맥케인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찾지 못해 찜찜해 하며 오른 비행기에서 한국 신문 대신 미국 신문을 집어 들었다. 마침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 8월 22일자 1면에 맥케인과 오바마의 여론조사 기사가 실렸다. 3%p차로 박빙(dead heat)이란다. 나중에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오바마가 민주당 후보가 된 이후 지지도 격차가 5%p 가량 표집오차 밖으로 벗어난 적은 있으나 그렇다고 그 이상 확실한 격차를 낸 적은 없으니 오바마가 특별히 위기에 처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지도자로서의 신뢰도에서는 맥케인이 더 앞선 결과라든지, 경선에서 힐러리를 지지했던 층들에서 상대적으로 오바마에 대해 낮은 지지도가 나타나는 것 등은 오바마의 지지도가 확실히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들이었다. 신문은 오바마의 정체현상의 이유를 몇 가지 들고 있었다. 지난 여름, 오바마가 유럽을 돌면서 미국 대중의 시각과 관심으로부터 멀어졌던 점, 그리고 힐러리 지지자들의 분열 등을 이유로 꼽고 있었다.
여론조사라는 잎을 갉아먹던 송충이였던 나는 이 지점에서 검증할 만한 중대한 가설 하나를 끄집어 들었다. 그것은 '도대체 제대로 된 책 한권을 찾기 힘든 인기 없는 맥케인이 어떻게 박빙의 승부를 내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거기다 외교도 그렇지만 특히 경제 부문에 있어 부시 행정부의 실패는 이미 기정사실화된 마당이다. 여기서 가설이란 다름이 아니라 '떨어질 이유가 있는데도 흔들리지 않는 지지도를 보이는 후보는 보이지 않는 숨은 지지를 가지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이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4년 부시와 캐리의 대선에서 이라크 전쟁에 대한 책임문제와 경제침체에도 불구하고 부시가 승리했을 때도 같은 논리로 부시의 승리를 몇몇 전문가들과 함께 예상한 적이 있었다. 다만 한국을 떠나올 때, 그리고 여기에서 만난 몇몇 교포들이 미국 국민들의 집과 차에 붙여져 있는 오바마 스티커 등을 얘기하면 이번 '오바마 열풍은 만만치 않으며 결국 이길 것이다'라는 얘기가 듣긴 했다. 어쨌든 성급하게 결론을 지을만한 시점도 실력도 아닌 상황에서 '떨어지지 않는 지지도에는 뭔가가 있다'라는 가설을 만지작거리며 덴버에 도착했다.
[둘째 날] '오바마 혁명'(Obamalution)이 미국을 흔들고 있다 덴버의 시내 중심은 느낌상 작고 아담했다. 높다란 빌딩으로 둘러싸여 있기는 했지만 중심거리인 16번가 옆으로는 높지 않은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 중간 계속 이어진 길에는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있었고 그 양편으로는 현대식의 무료 경전철이 오고 가고 있었다. 경전철은 주 의사당 건물이 있는 남동쪽 끝에서부터 이번 전당대회가 열리는 펩시센터가 있는 서북쪽 방향의 끝까지 몇 블록에 걸쳐 왕복했다.
이 곳 시내에서는 이미 민주당 경선 분위기가 물씬 났다. 거리 양쪽으로는 전당대회 개최를 알리는 각종 깃발들이 걸려 있었으며 곳곳에 포스터가 붙여져 있었다. 이 장면만 본다면 마치 덴버가 민주당의 아성 같다. 이 곳 지역신문에는 덴버가 전당대회로 인해 호텔이 가득 차고 수많은 인원이 몰려오는 것에 잔뜩 고무된 분위기이다. 근 100년 만에 전당대회가 열린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거리 곳곳에 민주당 전당대회 기념물을 파는 가판대가 눈에 띄었다. 대개 셔츠나 동그란 배지 등을 팔고 있었으며, 플라스틱으로 만든 오바마 인형을 팔기도 했다. 동그란 금속판에 각종 그림이나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배지가 많았는데, 그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붉은 주먹이 벽을 뚫고 있는 그림 가운데에 'Obamalution'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는 것이었다. '오바마 혁명'을 의미하는 것 같은데 오바마 현상이 가지고 있는 변화의 급진성을 상징하는 듯이 보였다. 한국의 보수진영 인사들이 보면 무척 불온하다고 느낄 만한 것이어서 쓴웃음이 나왔다.
오바마의 등장 자체가 혁명적인 것이 틀림없는 것 같다. 저녁에는 우연히 덴버 교외의 오로라에 정착한 교민의 가게에 들렀다. 30년 전에 한국을 떠난 강원도 평창출신의 전경우씨 내외가 경영하는 곳이다. 시가와 와인 등을 파는 아담하지만 고급스러운 실내 장식이 있는 '흡연자를 위한 즐거움'(Smoker's Delight)이라는 바였다.
가게 위쪽 모서리 편에 걸려있는 TV에서는 미국의 뉴스채널이 틀어져 있었는데, 이 날 오바마 진영이 발표한 부통령 후보, 조셉 바이든(Joseph Biden)에 대한 얘기가 한창 나오고 있었다. 바이든은 6선 의원이며 외교안보통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또 그가 빈민 노동자 출신이라는 점 등이 언급되기도 한다. 오바마 측의 이번 지명은 대개 외교안보 분야에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 주된 평가이다.
그러나 전반적 분위기는 '잘 했다'는 평가보다 논란이 더 많아 보인다. 무엇보다 젊고 혁신적인 오바마의 이미지나 정체성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적이다. 경선 과정에서 오바마를 풋내기 취급하며 비판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각종 법안에 보수적 선택을 하거나 비록 실수라고 번복하긴 했으나 이라크전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보였던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앞으로 여론조사 결과가 더 많은 것을 보여주겠지만, 전반적으로 오바마 측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인 것은 사실이다.
사실 대통령 선거 등에서 개혁적 이미지가 강한 인물이 본선후보가 된 뒤에 자신의 불안정한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취하는 '중도화 전략'(Go To the Center)은 때로 후보의 경쟁력에 타격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200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이 본선후보로 결정된 후 자신을 흔드는 '후단협'의 공세가 본격화되기 이전까지 개혁이나 진보적 이미지를 멀리 했던 것도 그러한 유형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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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판대에서 팔고 있는 각종 오바마 뱃지. 'Obamalution'이라는 뱃지가 눈에 들어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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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선거에서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성도 강한 핵심지지층은 그 숫자가 다수가 되기는 어렵다. 문제는 대부분 새로운 인물이 부상할 때는 그들 핵심지지층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현상은 변화를 추구하는 개혁진보 진영에서 더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만일 변화를 지향하는 유권자들의 힘으로 부상한 후보가 전략적으로 중도를 지향하는 전략을 쓰게 되면 원래의 역동성을 잃고 지지를 잃어버릴 수 있다. 쉽게 말하면 진보적 유권자만으로는 당선될 수 없는 상황에서 본선 승리를 위한 중도화 전략이 실패할 경우 지지층만 붕괴시키는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이다. 오바마 역시 이번 부통령의 선택에서 이러한 '중도화 과정에 따르는 정체성 위기'를 피해가지 못하는 듯 하다.
어쨌든 이번 2008년 미국 대선이 뜨겁게 달궈져 간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TV에서도 온통 대선에 대한 보도로 넘쳐나 다른 뉴스를 찾기 힘들 지경이다. 양당의 후보가 지명되는 전당대회가 임박했음이기도 하지만, 역시 이번 대선이 사상 최초의 흑백대결이라는 점과 가치대결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무시하기는 힘들 것 같다.
오늘 방문했던 가게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우리들이 대화하는 과정에 '오바마'의 이름이 나오자 곧바로 관심을 가진다. 한국에서도 오바마에 대한 관심이 있는지, 그리고 한국 사람들은 누구를 지지하는지도 질문한다. 몇 가지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답을 듣더니 그중 한 사람이 별안간 "오바마는 공산주의자야!"라고 내뱉는다. 한 쪽 편은 잠시 머뭇거리다 "공산주의자는 아니고 그는 사회주의자"라고 중얼거린다.
하기야 주인 아주머니의 말이 지난 주에도 이곳에서 술 마시던 손님들끼리 크게 싸움이 났단다. 한국의 '좌익 빨갱이' 논쟁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곳 교민들로서도 이런 일이 흔하지 않단다. 이번 선거가 어느 때보다 뜨거워 질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내일이면 이 곳에서 뉴욕, 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의 김동석 소장의 일행과 조우하게 된다. 국내에서도 비교적 많이 알려진 분이지만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다시 김동석 소장을 소개하자면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출신 시민운동가이며, 2006년에는 오바마와의 단독 인터뷰를 하는 등 교포출신으로 누구보다 활발한 정치활동을 해온 분이다. 특히 위안부 관련 법안의 미 의회 통과, 미국의 투표용지에 한국어 포함, 그리고 한국 국민의 비자면제 프로그램성사(VWP)를 주도하는 등의 역할을 해왔다.
이번 여행의 상당 시간을 그와 함께 동행하게 될 것이다. 그를 통해 미국 정치에 대한 나의 무지를 보완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의 한인들이 보는 이번 대선에 대한 시각 등을 정리해 볼 것이다. 물론 나는 미국 대선 그리고 오바마 열풍을 보통 한국인들의 시각에서 관찰하면서 한국 정치나 선거상황과도 비교해 볼 생각이다. 밤늦게 한국의 뉴스를 보니 온통 답답한 뉴스로 가득 차 있어, 이곳에 있는 것이 마치 사치로 느껴진다. 다만 그 모습들을 볼 날이 한 두 해 일만은 아닐 것 같아, 길고 긴 탐험을 떠나는 마음으로 이번 여정을 시작한다.
남의 전쟁을 내 전쟁처럼 보는 것이 이번 탐험의 목적이다. 이번 여행은 한 편으로는 현실로부터의 도피 같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대중 알아가기'의 일부가 될 것도 같다. 어쨌든 이곳 덴버에서는 '오바마의 전쟁'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너른 지평선 너머로 가득 울려 퍼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