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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럭, 부스럭', 눈 감은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주변에서 계속 소리가 들린다.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잠든 주책 바가지, 떠지지 않는 눈으로 시계를 보니 오전 8시다.

"형 밥 먹으러 갈테니까 더 자라."

부지런한 창성 형님 뒷 모습을 보고, 그리고 또 잠을 청하려 하는데 몇 분 뒤, '쾅! 쾅! 쾅!', 이번엔 문을 두드리는 소리. 훈 형이었다.

"밥 먹으러 가야지. 씻고 내려와. 형 먼저 내려가 있을테니까."

마닐라 소피텔의에서의 아침식사 모습
 마닐라 소피텔의에서의 아침식사 모습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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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만 부실한건지, 씻고 지하에 식당으로 내려가니 이미 산소녀와 장미는 한바탕 식사를 끝내려던 참이었다. 먹을 건 많은데 영 넘어가질 않았다. 김밥(한국 사람들을 배려해서 였을까? 쌀이 엄청 찰졌다) 몇 개와 과일 몇 개를 먹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런데서 본전을 뽑아야 한다며 연신 포크질을 하는 산소녀와 쌀국수를 받으러 간 장미!

'촌 놈이라 그런가? 영 적응이 안되네', 하긴 생각해보니 요 몇 년 사이에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오전 11시가 되면 코닥 필리핀 출사단은 모두 마닐라 공항으로 이동한 후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때까지 자유시간이 있다는 것!

마닐라 소피텔의 야외수영장
 마닐라 소피텔의 야외수영장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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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소피텔 근처가 허허 벌판이라는 것. 다른 팀은 수영복을 챙겨와 야외 풀장을 주름잡고 있었지만, 바나우에와 사가다의 고된 행군이 예상된 우리는 물에 젖는 옷만 챙겨온 관계로 야외 풀장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뭘 하지?', 계속 고민하던 바나우에 출사단. 감자기 훈 형이 우릴 이끌고 어디론가 길을 나섰다. 지하로 내려가더니 어두컴컴한 라운지로 들어가는 훈 형. 헉! 카지노로 입성했다.

마닐라 소피텔의 카지노! 안에는 절대 카메라를 들고 들어갈 수 없다.
 마닐라 소피텔의 카지노! 안에는 절대 카메라를 들고 들어갈 수 없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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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입장 절차를 거친 뒤, 사진기는 압수당하고 기계 앞에 앉았다. 훈 형은 모두에게 500페소 씩을 쥐어준 뒤 도박(?)은 시작됐다.

룰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버튼 만을 눌러대며 시작된 게임. 놀랄 만큼의 배팅 금액을 걸며 귀찮다는 듯 버튼을 눌러대던 창성 형님. 이내 모든 자금을 탕진하고 호텔 방으로 먼저 올라가버리신다. 아마도 전경 사진 몇 장이 아쉬우셨을 것.

그나저나 장미의 돈이 심상치 않게 올라가기 시작한다. 원금에 두 배 되는 돈까지 번 것 같은데 모두들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다. 난 원금을 조금 넘어본 뒤 죽죽 돈을 잃고 있고, 훈 형은 마냥 제자리 걸음이다.

30분쯤 지났을까? 우린 모든 돈을 탕진하고 카지노에서 나오기에 이른다. 잠깐의 재미였지만 6만원쯤 되는 돈이 공중에 날아간 현장.

"역시 이래서 강원랜드는 위험한 곳이야!"

훈 형의 경험(?)섞인 말이 들려온다. 이런 데 오면 여자친구한테 혼 난다는 훈 형. 참 어색하면서 재미있는 사람.

드디어 마닐라 공항으로 향할 시간이 됐다. 다른 팀은 우아하게 여행용 캐리어를 끌고 로비로 나오는데 우린 속이 꽉찬 배낭을 들고 등장한다. 누구도 같은 일행이라 생각하지 못할 듯 싶다.

새콤하고 상큼한 그린망고 쉐이크!
 새콤하고 상큼한 그린망고 쉐이크!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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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우리팀은 호텔 커피숍에서 차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모두들 커피를 시키는데 큰 형님이 그린 망고 음료를 꼭 먹어보라는 권유가 생각나 난 그걸 시켰다. 그러더니 우르르 그린 망고를 시키는 우리팀. 쉐이크로 나온 그린 망고 새콤한 상큼함이 아마도 그리울 것이다.

마닐라 공항으로 가는 길
 마닐라 공항으로 가는 길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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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우등고속버스와 꼭 같은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 메트로 마닐라의 전경을 마음속에 담아두려고 연신 창문을 보지만 도시의 전경이 낮설다. 다시 한번 라이스 테라스와 동굴, 그리고 꼬불꼬불 산골마을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연신 우리 행선지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장미와 사진을 살펴보는 창성 형님, 우울해 보이는 훈 형과 산소녀까지.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이라 짐작하고 있다.

마닐라 공항. 여길봐도 저길봐도 한국 사람이 정말 많다
 마닐라 공항. 여길봐도 저길봐도 한국 사람이 정말 많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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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마닐라 공항, 여길 둘러봐도 저길 둘러봐도 한국 사람들 천지다. 어쩌면 바나우에와 사가다가 좋았던 건 나와 같은 한국인들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나만 이 곳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아서 일지도 모른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오른 비행기. 기내식이 나오고 어느 새 빵에 고추장을 발라먹는 내 모습. 현지 음식이 좋은 건 사실이었지만, 못내 느글거리는 속이 한국 음식을 애탓게 찾고 있는 탓이었다.

창성 형님은 창문가에 자리를 기웃거리시며 하늘 풍경을 앵글에 담는데 여념이 없으시고, 훈 형은 어제 못다한 잠을 실컷 보충중이다. 산소녀와 장미, 그리고 나는 이제까지 찍은 사진을 보고, 또 다시 보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간 뒤 카메라 리뷰, 사진 제출, 수기 등에서 1등을 하면 필리핀 여행권을 쥐어준다는데 우린 사진에선 창성 형님, 수기에선 장미를 적극적으로 밀기로 했다.

"뭐 1등하면 우리 다 같이 오도록 추진한다는데 나야 좋지!"

3시간여를 오고, 시차가 한 시간 더해져 저녁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우린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출발할 땐 몰랐는데 마닐라 공항과 비교해서 보니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세삼 실감이 났다. 특히 산뜻한 공항 내부 전경에 잠재된 민족의식이 마구마구 꿈틀거리려고 했다.

입국 심사가 끝나고 수하물을 찾으려 기다리는 순간. 대구로 떠나는 차 시간 때문에 맘졸이던 장미가 짐을 들고 서둘러 버스정류장으로 달려간다. 다행히 그녀는 버스를 탔다. 바나우에 필리피노들이 즐겨신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서.

산소녀는 마중나온 이와 함께 먼저 떠나고, 창성 형님, 훈 형, 난 각각 버스를 타고 헤어지기에 이른다. 이 부분을 쓰는 지금도 가슴 속에 아련한 아쉬움이 묻어나오려 한다.

손을 내밀며 악수를 하는 훈 형과 나. 7월 12일날 서울에서 보기로 한 약속을 꼭 지키자며 웃으면서 헤어진다. 그리고 난 대전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다.

운 좋게 선발되서 다녀온 필리핀, 경비도 공짜, 카메라도 준다기에 기분 좋게 출발한 필리핀. 하지만 나에게 없는 삶의 여유가 있고 좋은 이들과 함께한 여행이 내 인생의 커다란 모멘텀으로 자리잡은 5일여.

자정에 도착하여 쓰러져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출근을 하려 준비를 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필리피노와 큰 형님도, 훈 형과 창성 형님도, 그리고 산소녀와 장미. 마지막으로 필리핀이 나에게 준 정답은.

"네가 하고 싶은 것을, 네가 잘 하는 것을 하라."

당신, 앞으로 철부지 젊은이의 당찬 미래를 위해 기꺼이 희망의 미소 한 모금을 지어주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필리핀 관광청'과 '야후'가 함꼐하는 '코닥 사진 원정대'의 후원으로 작성됐으며 casto와 푸타파타의 세상바라보기(http://blog.daum.net/casto)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CASTO, #소피텔, #마닐라,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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