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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밥이다!

 

뭐라고? 이렇게 황당할 때가…. '제는 내 밥이야'라는 말은 가끔 들었어도 이런 말은 처음이다. 요즘같이 각박한 세상에 투항하듯이 '내가 너의 밥이다'라고 말할 바보가 어디에 있을까?

 

그 바보들은 사단법인 한 살림이 만드는 잡지 <살림이야기> 창간호에 나온다. 35년째 친환경농업을 고집하고 있는 충남 당진의 정광영씨, '최대한 요리하지 않는' 전국의 스님들, 먹을거리의 안전을 위해 수시로 단식 농성을 하는 강기갑 의원, 어려운 세상에 남편인 무위당 장일순을 찾아온 손님들의 밥상을 모두 차린 이인숙씨, 그리고 창간호의 주인공들인 벼와 쌀까지….

 

창간호 인터뷰에 응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의 말처럼 ‘밥이라는 게 본래 공양, 자기희생이라는 뜻’인 것처럼 나만 먹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너의 밥이다’라고 외치는 바보들이다.

 

밥에 대한 이야기, 한상 푸지게 차려

 

<살림이야기> 창간호는 그런 밥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상 푸지게 차렸다. 열아홉 개의 글들, 구십 쪽의 지면에 밥에 대한 온갖 이야기들을 적었다. (잡지 전체는 160쪽)

 

서울의 어떤 두 주부가 차린 밥상들 비교, 세계의 밥상들을 비교한 책 <헝그리 플래닛>과 밥책 열아홉권 소개, 강기갑 의원, 한국 주부이며 미국 사람인 원 아일린, 스님, 주부, 작가들의 밥에 대한 수다와 요리법들, 밥의 말뜻과 역사적 의미, 벼의 재배 과정과 토종만 350여 종이 넘는 벼의 종류들, 외국의 밥 교육과 음식쓰레기에 대한 생각, 밥상을 지키는 세계의 운동들에서부터 식량안보가 무너진 미래 2020년을 무대로 하는 콩트까지… 아주 푸짐하다.

 

 

밥맛도 좋다. 구수하기도 하고, 달콤 쌉사름하기도 하다. 밥이 너무 넘쳐서 불행하게 된 세태를 꼬집고, 밥에 대한 태도를 바꾸고 밥상을 단순하게 차리라고 촉구하지만 너무 무겁지도, 너무 딱딱하지도, 너무 관념적이지도 않다. 주부들 처지에서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벼 이야기와 쌀 이야기 같은 것은 아이들에게 해주면 좋은 교육이 될 것 같다. 그리고 곳곳에 살림에 써먹을 만한 지혜도 많이 눈에 띈다. 해외의 이야기들도 제법 있다. 이탈리아 초등학교의 미각 교육, 독일에서 열린 타이식 벼농사 행위 미술, 밥상을 지키는 해외의 시민운동들, 일본의 로컬 푸트 사례 등이 읽을 만하다.

 

우리 살림에 대해 생각할 이야기들

 

쓴 맛도 있다. 잡지를 발행하는 한살림의 몸에 쓴 맛이다. '먹을거리 말고 삶의 방식을 바꿔야한다'라는 한살림 사업에는 조금 '불리'한 이야기도 적혀있고, '장일순 선생의 뜻을 따라 시작된 한살림이 장일순 장학재단이나 장일순 평화기금 같은 기념사업을 왜 하지 않느냐? 한살림이 농산물 직거래를 넘는 활동을 왜 하지 못하느냐?'라는 질타도 그대로 실렸다.

 

그러고 보니 용감하다. 그런 쓴 소리가 계속 나올텐데 잡지를 낼 생각을 했으니. 하지만 비판을 감수한다는 것은 일이 가야할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이다.

 

사실 <살림이야기>는 지난 2월에 0호가 나왔다. 창간 준비호였다. 그때는 특집으로 소비 이야기를 다뤘고 살림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실험적으로 실었다. 0호답게 자유분방한 기획을 했고 그만큼 앞으로 어떤 잡지가 될지 좀 묘연하기도 했다.

 

그래서 창간호를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기다렸다. 한살림이 농산품만 공급하는 게 아니라 생각들도 공급한다고 하니까 '이제야 할 일을 하는구나'라는 기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친환경 농산물뿐만 아니라 그만큼 진실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 이야기를 소개하고, 우리 살림에 대해 생각할 이야기들을 꺼내는 일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창간호의 점수는? 잡지로는 80점, 기관지로는 50점이다. 창간호 앞부분에 소개된 충남 당진의 농부 정광영씨의 아내가 ‘남편으로는 80점, 농사꾼으로는 50점’이라고 평가를 내린 것과 비슷하다.

 

"왜 50점만 준 줄 알어유? 친환경 농사를 고집한 건 존경하지만 일손 바쁠 때 (가톨릭 농민회 일에 간다고) 뻑하믄 나가서 그래유."

 

밥 이야기들을 잡곡도 섞고 콩도 섞어서 잘 지어냈지만 아직 잡지로서의 완성도는 떨어져서 80점이다. 오타가 많고, 사진이나 그림 설명 자료의 출처도 분명하지가 않다. 섬세한 마무리가 더 필요하다.

 

기관지로서는 50점. 물론 <살림 이야기>는 한살림 소식지나 회사홍보지 같은 기관지는 아니다. 소식지는 따로 있다. 그래도 한살림과 관련이 있다. 그런 상황을 생각하면 이번호에서는 한 살림이라는 조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50점이다.

 

독자들의 허기와 갈증 달래주기를…

 

하지만 이 점수가 내려가야 더 많은 사람들이 읽으려고 할 거다. 한살림에 대해 비판적인 얘기도 싣고, 생활과 자치, 그리고 협동 운동에 참여하는 실력 있는 필자도 많이 발굴하면 좋겠다. 하지만 무위당 장일순 이야기처럼 한살림이 자신 있게 할 수 있고 꼭 알리고 계승해야 할 이야기는 계속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살림이야기>이가 웹진까지 합쳐 1,500개가 넘는 한국의 다른 잡지들과 다른 점은 뭘까?

 

말랑말랑한 생활교양지? 너무 말랑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런 주부 잡지들은 많다. 환경 잡지? 야무진 잡지는 없지만 그런 잡지는 있고, 한살림이 환경 문제까지 다루면 편집실 사람들은 살림할 틈도 없이 바쁘겠다. 비평잡지? 비평지들이나 그런 역할을 하는 시사 잡지들은 그래도 좋은 것들이 많다.

 

생명 관점의 비평은 <녹색평론>이 더 열심히 하게 밀어주면 좋겠다. 그러면 주부들과 생활, 자치, 협동 운동에 참여하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과 지식인들을 한 밥상에 초대하는 잡지일까? 답은 독자들이 알 것이다.

 

창간호 표지에 쌀 한 톨의 그림이 크게 있고, 제호와 호수는 작게 들어간 것이 참 신선하다. 구구하게 목록을 적어놓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 앞으로도 고정 꼭지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독자들을 지루하게 하지 말고 매호 특집 주제에 초점을 맞춰서 독자들의 허기와 갈증을 달래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강기갑 의원이 가슴에 사무치게 그리는 그런 밥상을 차려 주기를 바란다. 

 

"하얀 쌀밥에 간장과 깨소금을 섞고, 거기에 참기를 몇 방울 떨어뜨려 비빈 다음, 한 숟가락을 떠서 김치 한 쪽을 척 걸쳐 먹으면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 강기갑 의원 글에서

덧붙이는 글 | <살림이야기> 웹 블로그 : www.salimstory.net


살림이야기 2017.4 - 59호

한살림 엮음, 한살림(월간지)(2017)


태그:#살림이야기, #한살림, #생협, #밥,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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