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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의 독립자금 모집

경성 잠입에 성공한 정화는 신규식의 조카 신필호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매우 솔직하게 그녀를 대했다. 그녀는 신규식의 지시대로 일경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세브란스 관사에서 머물렀다.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신 박사는 그녀에게 사람을 하나 붙였다. 정화가 직접 사람을 만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섯 사람의 국내 유력인사를 만나 상해의 암호 편지를 전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보잘 것 없었다. 자금은 예상보다 턱없이 적게 걷혔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시아버지의 친구인 민영달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우당 민영달은 갑오경장 후 김홍집 내각 때부터 시아버지와 동료였으며, 30년 동안 가장 가까이 지낸 친구라고 했다. 게다가 그는 장안의 거부였다. 시아버지는 그를 꼭 만나라고 했다.

그녀는 시아버지의 지시대로 친척 오빠 병흥과 함께 서강에 있는 민영달의 저택을 방문했다. 연로한 어른에 대해 예를 갖춘 것이었다. 어린 아낙네가 대감 나리를 직접 만나 얘기하는 것은 아무래도 외람된 일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안채에서 초초하게 기다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병흥이 방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의 표정에 감돌고 있는 허탈한 기운을 읽었다. 민영달은 떠나는 그들의 차비조차도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뒤탈이 겁났기 때문이었다.

정화는 알게 되었다. 시아버지와 우정을 나누던 인사들이란 그녀가 생각했던 만큼 순수한 지사들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독립협회 간부들치고 지금 고생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순진한 시아버지는 그들에게 이용만 당한 것이었다. 시아버지는 그들이 세웠다는 독립문의 휘호까지 써 주지 않았던가?

그녀가 아는 대로라면 시아버지만큼 친구들에게 많이 베푼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시아버지는 국내에서 계몽, 자강 운동을 할 때만 친구였다. 상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가가 된 시아버지는 친구는커녕 경계의 대상이었다. 나중에 민영달은 동아일보에 거액의 자금을 내놓았다. 정화가 훗날 조선일보는 물론이고 동아일보에도 의구심을 떨칠 수 없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녀는 상해의 지시 때문에 친정과 접근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녀의 큰오빠가 옥중에 있으니 접근하지 말라는 상해의 지침은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친정 대신 두고 온 시어머니를 찾아갔다. 시어머니는 예상과 달리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남편과 아들의 안부를 물었다. 정화는 20일 정도 국내에 체류하며 나머지 임무를 수행해 갔다.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나름대로의 성과가 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돈이 상해에서 얼마나 요긴하게 쓰일지를 잘 알고 있었다.

광화문과 경복궁을 강의하는 김영세

김영세는 <동아일보>에 실린 ‘헐려 짓는 광화문’이란 수필을 인쇄하여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이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 까닭으로 헐리고 총독부 정책 덕택으로 다시 지어지리라 한다. 원래 광화문은 물건이다.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며, 노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밟히면 꾸물거리고 죽이면 소리치는 생물이 아니라,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의식 없는 물건이요, 말 못하는 물건이라, 헐고 부수고 끌고 옮기고 하되, 반항도  회피도 기뻐도 설워도 아니한다. 다만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땅을 같이 한 조선의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아까워하고 못 잊어 할 뿐이다. 오백 년 동안 풍우를 같이 겪은 조선의 자손들이 그를 위하여 울어도 보고 설워도 할 뿐이다.

석공의 망치가 네 가슴을 두드릴 때도 너는 알음이 없으리라마는, 뚝닥닥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가슴 아파하며, 역군(役軍)의 연장이 네 허리를 들출 때에 너는 괴로움이 없으리라마는, 우지끈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허리를 저려할 것을 네가 과연 아느냐, 모르느냐.

팔도강산의 석재와 목재와 인재의 정수를 뽑아 지은 광화문아! 돌덩이 하나 옮기기에 억만 방울의 피가 흐르고, 기왓장 한 개 덮기에 억만 방울의 눈물이 흘렀던 우리의 광화문아! 청태 끼인 돌 틈에 이 흔적이 남아 있고 풍우 맞은 기둥에 그 자취가 어렸다 하면, 너는 옛 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남아 있으며, 너는 그 신세 그대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친 것이다.(중략)

다시 옮기는 그곳은 북악을 등진 그곳이 아니며, 다시 옮기는 그 방향은 구궁을 정면으로 한 옛날의 그 방향이 아니다. 서로 보지도 못한 지가 벌써 수년이나 된 경복궁 옛 대궐에는 장림(長霖)에 남은 궂은비가 오락가락한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 하는 망치 소리는 장안을 거쳐 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달파하는 백의인(白衣人)의 가슴에도 부딪친다.
 
김영세는 학생들에게 이 글에 대해 느낀 바를 말했다. 누구나 명문이라고 회자되던 이 글에 대한 김영세의 평가는 의외로 부정적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학생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김영세의 강의를 경청했다.

"여러분, 저는 이 글이 안고 있는 문제와 이 글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해 보고자 이 교재를 만들었습니다. 일본이 광화문을 부순다는데 우리는 속수무책입니다. 그나마 유감을 피력하는 글이 있어서 여러분에게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글의 필자가 누구입니까? 이 글의 필자는 인정받는 한국의 언론인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식민지 조선 사회를 이끌고 있는 지식인이란 겁니다. 그런데 이 글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여러분이 정확히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논조가 지닌 문제점이 무엇인지 여러분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 하면 이 글이 갖고 있는 문제점은 바로 한국 지식인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 글은 광화문이 왜 훌륭한 문화재인지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수필이라고 해도 이렇게 근거가 없다는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게다가 이 글은 광화문이 헐린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슬프고 안타깝다고 영탄하고 있습니다. 광화문을 허는 일본의 행위가 얼마나 비문화적이고 비윤리적인가를 지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헐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한 마디도 담고 있지 않은 겁니다.

이 글은 시종일관 감정과 동정과 연민에 호소함으로써 분노하고 있는 조선인의 감정을 카타르시스 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필자의 의도는 아닐 겁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위험이 큰 글입니다. 여러분, 일본의 문화정치가 바라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글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기교와 재치를 무기로 필자가 멋지게 보이도록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다운 지식인이 되기란 어렵습니다. 먼저 실력을 갖추어야 하고 동시에 냉철한 역사의식까지 지녀야 합니다. 이 둘은 똑같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조선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최고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의 역사 실력이 일본의 총독부 관리들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용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부작용과 후유증은 우리 사회에 아주 길고도 심각하게 망령처럼 드리워져 여간해서 걷히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김영세는 내친 김에 경복궁까지 강의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오늘은 광화문까지만 하고 다음 시간쯤에 하려던 경복궁 강의를 내처 하기로 작심한 것이었다. 그것은 학생들의 수강 태도가 의외로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왕조의 수도 한양에는 다섯 개의 궁궐이 있었습니다. 초기 천도 당시에 경복궁을 건립한 후, 태종 때는 창덕궁을 별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성종 때에 창경궁이 신축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인들은 경복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경희궁을 지었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덕수궁을 황궁으로 조성했습니다. 모든 궁궐이 각기 자연의 산세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경복궁은 유교적 전범에 가장 충실한 대궐입니다.

경복궁의 정문은 여러분이 잘 알듯이 광화문입니다. 이 광화문이 요즘 문제가 되고 있지요. 광화문을 들어서면 단아한 홍례문과 아름다운 영재교가 있습니다. 다리를 건너 우리가 맨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건물이 근정전인데, 바로 이 근정전이 경복궁의 정전입니다. 전 총독 데라우치가 옥좌에서 연설했던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근정전은 조선의 국왕이 관료의 조회를 받고 국가의 의식을 거행했던 중심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가장 공력을 많이 들여 지었습니다. 근정전은 근엄과 우아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반면에 살짝 치켜 올려진 처마는 북악산과 어울려 상쾌한 자태를 만들어 냅니다.

건물 내부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습니다. 호사스런 닫집 아래 임금의 용상이 있고 용상 뒤로는 왕조의 발전을 상징하는 일월오악병풍을 둘렀습니다. 또한 앞마당에는 품계석을 두어 정일품부터 종구품에 이르는 문무 관료들이 조회하도록 했습니다.

근정전 뒤로는 국왕의 집무실인 사정전과 국왕의 침소인 강령전 그리고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이 일렬로 배치되었습니다. 바로 이 세 건물을 일본은 얼마 전 부숴버렸습니다. 그곳에 총독부 건물이 들어선 것이지요.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의 후원에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굴뚝이 있는데 그것을 아미산 굴뚝이라고 합니다. 조선의 세련된 궁중 문화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굴뚝입니다.

근정전의 동쪽에는 왕자들이 거처했습니다. 그래서 세자를 동궁이라고도 불렀던 겁니다. 동쪽은 봄을 의미하므로 동문을 건춘문이라고 했습니다. 근정전의 서쪽 구역에는 중요 관청이 있었습니다. 비서실 격인 승정원과 학술 연구기관인 홍문관의 건물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이것들도 일본이 모두 헐어냈습니다.

경복궁의 북쪽 깊숙한 자리에는 왕과 왕비가 한적할 때 보내는 침소가 있었는데 이것이 건청궁이었습니다. 여러분, 을미사변 아시지요? 그때 고종 왕비가 일본의 칼잡이들한테 참혹하게 죽고 석유 불에 태워진 장소가 이 건청궁입니다. 이 건물도 일인들이 없앴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로는 자경전이 있습니다. 고종이 대비를 위해 지은 이 건물은 남아 있는 유일한 왕비 침소입니다. 자경전을 둘러싼 행랑과 담장은 격조 있는 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10장생 문양으로 장식한 굴뚝도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커다란 대청이 있고 좌우에는 넓은 온돌방을, 옆으로는 누마루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앞뒷면에는 작은 온돌방과 툇마루가 있습니다. 모두가 조선의 세련된 조형미가 돋보이는 곳입니다.

이렇듯 경복궁은 유교 왕실 문화를 가장 온전히 간직했던 최상의 대궐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이 경복궁을 흉물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벌써 근정전 앞의 건물들을 전부 허물어 총독부 건물을 세웠습니다. 건물의 아름다운 대리석들은 모두 금강산에서 캐어온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광화문마저도 들어내려 하고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기품 있는 건물이었던 강령전, 교태전 자리에는 이제 맨땅뿐입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전국 각지에 있는 절의 탑과 부도들을 이곳에 옮겨 놓아 뒤섞어 버림으로써 유교 전통을 교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옳은지 생각해 봅시다. 이번 주 과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은지 각자 글로 써내기 바랍니다. 좋은 의견이 나오면 그대로 우리 모두 실행해 봅시다."

김영세는 무표정한 얼굴로 교단에서 내려왔다. 교실 창밖의 나무에서 넓은 잎 하나가 지고 있었다. 비틀비틀 창유리를 스치며 낙하하는 그 잎은 반쯤 탈색된 병든 잎사귀였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태그:#광화문 , #경복궁, #민영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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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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