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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사 들머리를 지키는 천연기념물 제223호 은행나무
 영국사 들머리를 지키는 천연기념물 제223호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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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장하지도 평평하지도 않은 곳, 영동

단풍이 타고난 고운 빛을 아직 잃지 않고 있을 장성 백암산으로 갈까, 아니면 고요한 산사로 찾아가서 적요로움에 흠뻑 젖었다 올까. 한참 궁리 끝에 충북 영동으로 행선지를 정한다. 지금쯤 천 년을 넘게 산 영국사 은행나무도 황금색으로 물든 단풍을 자랑하고 있을 것이며, 영동 읍내 곳곳의 곶감 말리는 풍경도 볼만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 경덕왕 이전, 영동군(永同郡)의 이름은 길동군(吉同郡)이었다. 길 영(永)자인 '영'자를 음으로 읽던 것을 훈독으로 바꾼 것뿐이지 이름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산줄기가 길게 에워싸고 있다고 해서 길동으로 불렸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중환(1690~1752)은 <택리지>에서 영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영동은 속리산과 덕유산 사이에 있다. 동쪽에는 추풍령이 있는데 덕유산에서 뻗어나온 맥이 지나가다가 정기를 멈춘 곳이다. 비록 고개라 부르지만 실상은 평지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비록 산이 많다고 하나 심하게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으며 또 몹시 낮거나 평평하지도 않다. 바위와 봉우리가 윤택하고 맑은 기운을 띠었으며 시내와 산골 물은 맑고 깨끗하여 사랑할 만하며 조잡하거나 놀랄만한 형상도 없다. 땅이 기름진데다 물이 많으므로 물대기가 쉬워 가뭄으로 인한 재해가 적다. (永同在俗離德裕兩山之間東有秋風嶺嶺爲德裕過?息氣處名雖嶺也實則平地故山雖多不甚○壯亦不甚低平而石峯巒俱帶潤澤和淑之氣溪澗澄淸可愛無粗惡驚急之狀土地亦肥厚水多易漑少旱災). - 이중환의 <택리지> '팔도총론'중 충청도 편

이중환이 본 그대로 영동의 시내와 산골 물은 맑고 깨끗하여 사랑할 만하다. 그리고  "심하게 거칠거나 웅장하지 않"을는지 모르지만 곤천산·각화산·삼도봉 등 1000m가 넘는 산도 있다.

높이야 앞에 열거한 산들에 크게 못 미치지만 암반과 암릉 타기로 아기자기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천태산(714.7m)도 있다. 오늘(10일), 나의 영동 여행은 천태산에서 시작해서 영동읍내로 가서 곶감 말리는 풍경을 실컷 바라보다 오는 것이다.

적당한 긴장과 스릴을 즐길 수 있는 천태산 산행

영동 천태산(해발 714.7m).
 영동 천태산(해발 714.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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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객들이 암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등산객들이 암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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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산은 충북의 설악산으로 불릴 만큼 경관이 아름다운 산이다. 누교리에서 오르는 길도 있고 명덕리에서 오르는 길도 있다. 명덕리에서 오르는 산길이 호젓하다. 이중환의 말투를 빌리자면 '사랑할 만한' 길이다.

누교리에서 오르던 명덕리에서 오르던 영국사 옆으로 난 산길을 통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영국사 앞에 이르자, 먼저 은행나무에게로 가서 문안 인사부터 여쭌다. '그동안 기체후 일향만강하옵신지요? 오늘은 뭔 바람이 불어 여까지 온겨?'

아닌 게 아니라 오늘은 날씨도 흐린데다 바람까지 몹시 분다. 천태산 꼭대기까지 올랐다 하산하는 데 걸릴 예상 시간은 2시간. 그 정도 시간이면 이렇게 바람이 심한 날엔 잎이 많이 떨어져 나무의 아름다운 수형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미리 한 컷 찍어둘 일이다. '자, 찍습니다. 은행나무님, 절대 눈 감으시면 안 됩니다.'

암릉으로 이어지는 'A 코스'를 탄다. 단체 등산객이 많아 그 틈에 살짝 묻어간다. 암릉 하나를 타고나서 숨을 채 고르기도 전에, 또 하나의 암릉이 기다리고 있다. '오메, 징헌 거.' 그러나 천태산의 암릉은 절대 위험하지 않다. 적당한 긴장과 스릴만 줄 뿐이다.

시원한 조망과 산행의 맛이 그만이다. 저만치 아래에서 홀로 나라의 안녕을 비는 영국사의 고독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1시간 동안 밧줄을 탄 끝에 마침내 정상에 이른다. 저 멀리 갈기산이 보이고, 충남 금산 제원면 일대가 바라다 보인다.

날씨가 잔뜩 흐리다. 시야가 멀리까지 미치지 못한다. 비가 오려나? 암반은 오르기보다 내려가기가 훨씬 어렵다. 산세가 완만한 D 코스로 하산하기로 한다. 길 곳곳엔 지난 2005년 4월 말에 일어났던 산불이 남긴 흔적이 남아 있다. 불에 타버린 채 앙상하게 서 있는 고사목들이 안쓰럽다. 다음 세상에 태어나거든, 그때는 나무로 태어나지 말고 산불이 나도 쉽게 달아날 수 있는 고라니 같은 산짐승으로라도 태어나렴.

앞으로는 영국(寧國)보다는 영산(寧山)을 비시라

규모는 작지만 불교문화의 흥취가 그윽한 천년 고찰 영국사
 규모는 작지만 불교문화의 흥취가 그윽한 천년 고찰 영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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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는 길은 호젓하다. 한가한 마음으로 편하게 오만 잡생각을 품고서도 너끈히 갈 수 있는 길이다. 등산로가 끝나는 곳에서 보물 제532호 영국사 부도를 만나러 낮은 산기슭을 올라간다. 지붕돌의 각 면에 판 기왓골과 처마의 곡선이 잘 어울려서 산뜻한 인상을 주는 부도다.

그동안 잘 있었나. 부도에게 눈인사를 건넨다. 2005년 5월 초, 이곳에 온 적이 있다. 천태산 산불이 일어난 며칠 후였다. 부도 옆 50m 지점까지 바짝 다가온 산불의 생생한 흔적. '산불이 조금만 더 진행했더라면 뜨거운 불 먹은 부도의 지붕돌이 산산이 깨어져 튀었을지 모른다'라는 생각에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던가. 보물 2점과 지방 유형문화재 3점 등 영국사는 규모에 비해 많은 문화재를 지닌 사찰이다.

영국사 경내로 들어서자, 보수를 끝낸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작아서 아름답고, 소박해서 돋보이는 건물이다. 영국사 대웅전에 들어 부처님께 말했다. '이젠 구국 기도 같은 건 하지 마시고 다시는 이 천태산에 산불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시라고, 영국(寧國)보다는 영산(寧山)을 비시라고.'

영국사를 내려오면서 다시 은행나무에게로 들리니, 거센 바람 때문에 그새 나무의 가지가 앙상해졌다. 은행나무 발아래 수북이 쌓인 황금색 이파리들이 고혹적이다. 생애의 한 단락을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 하는 걸 보니, 은행나무 네 일생이 얼마나 깨끗했는지 미루어 알겠다.

오후 1시. 망탑봉까지 들르고 나서 천태산을 내려간다. 일찌감치 영동으로 가서 곶감 말리는 광경이나 실컷 눈요기하다 가리라.

우리나라 음악의 발원지인 영동

부용리 산자락에 있는 난계국악당
 부용리 산자락에 있는 난계국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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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계국악단 연습실. 한 단원이 향피리를 불고 있다.
 난계국악단 연습실. 한 단원이 향피리를 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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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같이 달려 호탄교를 지나 학산을 지나 영동교에 이른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부용리 산자락에 있는 난계국악당에 들른다. 한옥과 양옥을 적당히 절충한 '퓨전식' 2층 건물인 난계국악당이 나그네를 맞는다.

이곳 영동은 우리나라 음악의 고향이다. 세종대왕 때 아악을 정리했던 난계 박연(1378~1458)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박연의 호를 따서 이름붙인 건물인 난계국악당은 개관한 지 올해로 꼭 20년이 되었다. 그동안 이곳은 국악 공연은 물론 각종 문화행사를 여는 등 영동 문화의 요람으로서의 구실을 톡톡히 해왔다.

국악당 왼쪽에 있는 작은 건물을 쓰고 있는 난계국악단을 찾아간다. 난계국악단은 군 단위 행정기구에선 우리나라 최초로 조직된 국악관현악단이다. 연습실을 둘러보려고 안으로 들어가니, 한 단원이 자리에 앉아서 향피리를 불고 있다.

"소리가 좋다"고 했더니 "고맙다"라고 응대한다. 국악을 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늘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 외래문화의 홍수 속에서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는 사람의 외로움을 능히 짐작하기 때문이다.

이번엔 난계국악단 좌측에 자리한 향토민속자료관으로 간다. 1층 전시실에 들어서자, 왼쪽에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발굴 현장 모형이 설치돼 있다. 1999년 9월 미국의 AP통신이 특종 보도함으로써 미군이 저지른 이 가증스러운 범죄인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은 비로소 청천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해골과 팔다리가 제멋대로 흩어진 풍경. 발굴 현장을 재현한 모형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린다. 모형 옆에는 '말하라! 그날의 진실을'이란 정삼일 시인의 시가 새겨져 있다.

서기만 하면 죽는겨
나오기만 하면 죽는겨
삶은
죽음보다 처절했다
반세기가 흘러도 쌍굴다리가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다
진실을 밝혀달라고…

- 정삼일 시 '말하라! 그날의 진실을' 일부

흔히 역사의 법정에선 시효가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시효란 기억이 가진 힘을 뜻한다. 망각하는 순간 시효는 끝나고 만다.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은 새로이 태어나는 세대에게도 이 죄악은 전해져야 마땅하리라.

전시장 안에는 그밖에도 박연의 초상화와 전통악기와 민속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내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등잔대들이다. 등잔대가 보여주는 조형성은 소박하면서 기품 있는 아름다움이다.

난계국악당 옆 골목을 조금만 올라가면 영동 향교가 있다. 향교는 250년 전, 구교동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다시 지었다고 한다. 제일 앞쪽에 자리한 건물이 명륜당이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니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제향 공간인 대성전은 굳게 닫혀 있다. 무엇을 수리하는지 한쪽에선 공사가 한창이다.

영동군 심천면 옥계리에서 태어난 난계 박연은 어려서 영동향교에서 학문적 소양을 닦았다고 한다. 당시엔 향교가 어느 곳에 있었는지 말 수 없지만.

아름답지만 사람의 기척이 들리지 않으니

계산리 금동마을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140호 규당고택(永同 圭堂 古宅).
 계산리 금동마을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140호 규당고택(永同 圭堂 古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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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를 나와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금동마을에 있는 '규당 고택'이다. 길게 늘어선 맞담이 이 집의 크기를 말해주는 듯하다. 그런데 도대체 대문은 어디 있는 것일까. 한 바퀴를 빙 돌고 나서야 겨우 찾았다. 관리인의 집으로 보이는 허름한 집 한 채가 입구를 가리고 있었던 탓이다.

아무튼 이만한 규모의 집에 솟을대문이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안채와 광채가 이마를 맞댄 'ㅁ'자 형을 이룬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안채는 사랑 공간을 덧붙인 'ㄱ'자 형이다. 안채 뒤쪽에 자리한 광채 역시 'ㄱ'자 형인데 뒤뜰을 둘러싸듯이 지었다.

창고로 쓰는 건물인데도 아주 고전적인 맛을 풍기는 건물이다. 이 집을 지은 규당 송복헌의 성품이 얼마나 깔끔한 분이었던가를 알 것 같다. 안채 건넌방 맞바라기엔 작은 초가지붕 건물이 하나 있다. 바로 뒷간이다.

장독대엔 크고 작은 장독이 여러 개 놓여 있다. 관람객들의 눈맛을 위해 놓은 것이리라. 장독대에 아주 큰 모과들이 뒹굴고 있다. 옆집 모과나무가 담장 곁에 바짝 붙어서 이 집의 아름다움을 위해 찬조출연하고 있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아름다움을 지녔음에도 이 집은 소슬하고 스산하다. 아무리 고급스럽게 치장한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란 허깨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옛 영동 사람들의 생업은 '목화 가꾸기'

아주머니들이 곶감을 손질하고 있다.
 아주머니들이 곶감을 손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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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당 선생 댁을 나서 곶감 말리는 풍경을 구경하러 간다. 양강에 곶감 말리는 건조장이 크다는 말을 들었지만 번거로워 그냥 읍내로 가는 것이다.

영동군 하면 우리는 으레 감과 곶감을 떠올린다. 우리나라에서 감이 언제부터 재배됐을까. 안압지에서 감꽃 가루가 발견되기도 했지만 감이 일반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 감이나 곶감을 깎는 건 아니다. 모양이 길쭉한 '장둥이'라는 감이 있는데 이 감이 바로 곶감 깎는 데 쓰이는 감이다. 어릴 적 살던 고향집에는 감나무가 수십 그루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파시'라 부르시던 납작한 반시와 배꼽 부분이 먼저 익기 시작하는 구례장둥이, 빛깔이 선홍색인 장성비단시가 고루 섞여 있었다. 홍시로 먹기는 장성비단시가 가장 달고 아삭아삭했다.

감이 영동군의 주소득 작물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영동군이 지난 1975년 읍내 주요 도로가에 2800여 그루의 감나무를 심어 조성한 이 가로수 길은 어느덧 전국적인 명물로 자리잡으면서 곶감의 주산지로 도약한 것이다, 이중환의 <택리지>는 옛날엔 영동 땅이 목화 주산지였음을 말해준다.

"다만 논이 적어서 주민은 목화 가꾸는 것을 생업으로 삼는다. 목화를 팔아서 얻는 이익이 기름진 논의 소출과 맞먹는다. 그러므로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위에 적은 네 고을보다 전혀 모자라지 않으니, 참으로 고인(高人) 일사(逸士)가 살만 하다." (但水田少故居民專治綿爲業而貿遷之利足以抵當膏○水田故生利亦不減上四邑眞高人逸士之所居處也). - 이중환의 <택리지> '복거총론' 중 산수편

이제 곶감은 영동군 전체 460가구에서 50만 접가량의 곶감을 생산해 연간 250억원의 수입을 올릴 정도로 지역 경제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영동군 홈페이지 참조)

화덕에 연탄불을 피워 곶감을 말리고 있다.
 화덕에 연탄불을 피워 곶감을 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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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당 선생 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곶감 건조장을 보았다. 주인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옥상에 설치된 건조장으로 올라갔다. 말리고 있는 곶감의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햇빛에 반사된 곶감들의 선홍빛이 나를 감동시킨다. 주인에게 들으니 20동이라고 한다. 한 동은 100 접이요, 한 접은 100개이다.

주인의 말에 따르면 이곳에선 다른 지역보다 바람이 잘 불어 곶감을 건조하는 데 이점이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옥천의 북쪽이다. 영동교 근처 시장과 도롯가에는 박스에 담긴 '장둥이'들이 즐비하다.

이곳 영동에도 '영동먹감'이라는 토종 감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 감은 껍질에 검은 반점이 있는 것이 특징인데 길이가 3cm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고 한다. 설령 이 토종감이 아직 어디선가 재배되고 있다고 한들 곶감용으로 쓰기엔 너무 작을 것이다.

읍내 번화가로 더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감따는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봉고 차 위에 올라가서 따는 사람, 간짓대로 따는 사람 등 감따는 풍경도 가지가지다. 천태산 등산길에 만난 영토 토박이라는 30대 청년에게서 10월 31일 자정이 지나면 가로수로 심어진 감나무에 달린 감을 개인이 마음대로 따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시간이 어느새 황혼에 가까워지고 있다. 시방, 저 감나무들에게도 역시 생의 황혼인가.

한국인의 원초적 기억 속에 둥지를 튼 풍경 '말리기'

건물 옥상에 지은 건조장에 매달아 놓은 곶감들이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다.(용두공원 근처)
 건물 옥상에 지은 건조장에 매달아 놓은 곶감들이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하고 있다.(용두공원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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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공원 아래서 1층과 2층을 온전히 곶감 건조장으로 쓰는 곳을 찾았다. 어마어마한 규모에 입이 떡 벌어진다. 한국인에게 있어 무언가를 저장하려고 말리는 풍경은 원초적 추억이다. 무나 호박 썰어 말리기, 시래기 말리기, 생선 말리기, 김이나 파래 말리기 등. 그것들은 아주 오래 된 그리움의 세계이다.

마당에선 아주머니 몇몇이 앉아 기계로 곶감을 깎고 있다. 나도 가을이면, 할아버지와 함께 장둥이 감을 돌려가며 칼로 깎아 곶감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겨울 밤이면, 할아버지 무르팍을 베고 누워 우는 아이의 울음도 그치게 한다는 '호랑이와 곶감'이라는 전래동화를 들으면서 곶감을 먹었다.

모두 엊그제 있었던 일 같은데 벌써 까마득하게 40년 세월이 지나 버렸다. 어렸을 적, 할아버지 할머니의 일을 많이 도운 덕에 내겐 이렇게 나보다 많은 추억이 남아 있다. 어머니, 아버지의 일을 도울 시간이 없는 요즘 아이들에겐 그만큼 추억 거리도 줄어든 셈이다. 추억이란 단순히 기억이 아니다. 기억에는 사랑이 스며 있지 않지만, 추억엔 마치 곶감의 겉에 묻어난 하얀 분(粉) 같은 사랑이 묻어 있다.

그러므로 추억은 생의 쓸쓸함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이야기꾼에다 손재주가 많으신 분이셨다. 저승에서도 대바구니를 엮으며 곶감을 깎으실까. 고마우신 할아버지. 오늘 바라보는 황혼은 왜 이리 붉은가. 붉어서 이리 가슴을 뛰게 하는가.

옛 사람 이중환의 말대로 영동에는 백두산이나 지리산만큼 큰 산도 괴이한 풍경도 없다. 그래서 가슴 가득 밀물처럼 밀려드는 벅찬 감동도 없다. 그러나 영동은 늘 나에게 잔잔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여운이 되어 길고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다.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가만히 내 유년시절의 애창곡을 부르며 영동을 떠난다.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그립구나, 추풍령 고개." (남상규 노래 '추풍령')

덧붙이는 글 | <'테마'가 있는 나만의 여행 >응모글



태그:#가을여행, #천태산, #영국사, #곶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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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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