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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통 장남, 아버지의 부름에 응하다

사실 가기 싫었습니다. 으레 '민족의 명절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온가족이 모여 웃음꽃을 피웠다'는 말이 추석 연휴를 장식하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희 조부모님 댁은 밤과 감을 키우고 계십니다. 벼농사를 하시다 힘에 부쳐 논에다 감나무 밭을 가꾸게 되셨죠. 하지만 밤농사, 감농사도 농사인지라 그것을 관리하는 일은 아버지와 그 아들인 저희 형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바쁘신 와중에도 틈틈이 농약과 비료를 주러 내려가셨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생도 덩달아 같이 내려가곤 했습니다. 올해 초 갓 전역한 저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상익아~ 시골 가자."
"(속으로는 눈물 흘리며)네, 당연히 가야죠!"

추석 연휴 전에도 선산의 벌초 때문에 큰 고생을 한 저는 보름 만에 시골을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지난 번에 농약을 치시다 언덕에서 미끄러져 엉덩이를 크게 다치신지라, 엉거주춤한 아버지의 걸음을 보곤 도저히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없으면 언덕에서 골골대는 경운기를 밀 사람도, 긴 농약 호스를 잡아줄 사람도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잠깐 땀 흘리는 것이 힘들다고 불효를 저지를 순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섬진강을 생각하며 먼저 시골로 내려가 일하시는 아버지께 내려간다는 전화를 드리고 전라선 입석 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서당골 밤을 누가 주워가부렀어야!

알밤 한 가마(더플백), 마실 물(수통), 낫(개인화기), 책(야전교범)
 알밤 한 가마(더플백), 마실 물(수통), 낫(개인화기), 책(야전교범)
ⓒ 박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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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진 느지막한 오후에 집에 도착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셨고, 친척 어른 몇 분들이 먼저 오셔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서울로 돌아올 시간을 계산하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추석 당일뿐. 나이는 제일 어린 녀석이 집안일에 큰 도움도 주지 못한다니, '먹고 대학생'이 따로 없습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맛있는 저녁을 먹으니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날아든 아버지의 호출.

"너 갱변(섬진강변) 밤나무 밭에 내려가야겠다."
"네? 왜요?"
"요새 밭에 몰래 들어가 밤을 훔치는 놈이 있다. 얼마 전에 서당골 밭에도 어떤 놈들이 싹 쓸었단다. 지켜야하지 않겠냐."

연휴 특선 영화를 볼 생각에 느긋해진 제게 난데없는 '특명'이 떨어진 셈입니다. '어느 인삼밭이 털렸다더라 농산물 도둑이 기승이더라' 하는 뉴스를 보기만 하다가 우리 집안이 그 피해자가 됐다는 말에 당황스러웠습니다. 특선 영화를 보고자 했던 나의 꿈은 어느새 물거품이 되어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리고, 졸지에 야간 경계근무를 서게 된 것입니다.

매복 중이다, 도둑들아 조심해라

이미 달이 뜨기 시작한 밤. 밤나무밭에는 할머니와 삼촌이 비닐천막을 깔고 누워계셨습니다. 할머니를 집으로 모시려 했지만 손주와 이야기하시겠다는 통에 결국 셋이 밤나무밭에 누웠습니다. 모기향을 피우고 플래시와 몽둥이를 챙기니 정말 매복 작전이 따로 없더군요.

군대를 면제받았던 삼촌은 제가 군대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들어주십니다. 군대에서 이렇게 밤을 지새워봤냐는 말씀에 혹한기 훈련이 생각났습니다. 강원도 화천의 추위는 정말 살인적이죠. 엄살이라고 타박하실지 모르겠지만 영하 10℃를 밑도는 실내온도에서 잠을 청하다 새벽에 일어나 경계작전을 나갈 때면 살아있다는 것이 저주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건 정말 야영 아니겠습니까.

할머니와 삼촌은 집안 대소사(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부부싸움 이야기와 유산 정리 이야기,  거기에 장남의 학교 성적 이야기 등등)를 두고 몇 시간 동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실 저는 그 시간에 여자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거기 멧돼지 조심해~'

여자친구가 멧돼지를 조심하라고 문자를 보냈지만, 섬진강변에 멧돼지가 출몰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바로 옆 국도를 씽씽 지나는 트럭이 더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또래들이 시골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혹은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야영을 하고 있다니, 새로운 경험을 한다는 특권 아닌 특권을 톡톡히 누린 셈이지요. 하지만 감기 기운이 다 떨어지지 않은 탓에 저는 자정이 조금 지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5시간 동안 경계근무는 이상 없이 했으니 밥값은 한 것 같습니다.

밤나무밭 경계 근무 중 이상 무!

남들은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느라 분주한 아침. 저는 가족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다시 밤나무밭으로 내려갔습니다. 바람결에 우수수 떨어진 밤들을 정신없이 줍다보니 열 가마는 나왔습니다. 이것들을 운반할 경운기는 감나무밭에서 농약을 뿌리고 있으니 오후까지는 고스란히 밭에 가만둬야 할 노릇입니다.

도둑들이 그 달밤에 산을 타가며 밤을 털기도 하는데, 도로근처 밭에 가마로 있는 밤자루를 본다면 얼씨구나 하겠죠. 이번엔 주간 경계 근무입니다. 다리를 다쳐 산으로 움직이기 힘든 저를 배려해주신 아버지의 지시였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밤나무 밭에 누웠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웠습니다. 이리저리 햇볕을 피하며 책을 읽다보니 슬슬 잠이 옵니다. 미국 민중사. 수면제가 따로 없네요. 책을 읽다가 졸고, 일어나서 떨어진 밤을 줍고, 다시 책 읽기를 3시간 정도 반복하려니 지겨움의 파도가 몰려옵니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군대의 경계 근무는 1시간 뒤에 교대자가 내려오지만 여기선 아무도 내려올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 그날 하루 종일 밤나무 밭에 누워 해가 움직이는 것을 보며 동서남북 방위를 몸으로 확인했습니다. 그 대가는 모기떼의 습격과 그을린 얼굴, 땀에 젖은 옷이었습니다.

하루종일 빈둥거린 놈, 하루종일 땀 쏟은 분

섬진강의 모습은 가을이 살짝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섬진강의 모습은 가을이 살짝 다가왔음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 박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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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움이 괴로움으로 변해갈 즈음에 멀리서 털털거리는 경운기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부지! 아버지께서 농약을 다 뿌리고 밤 자루를 옮기러 내려오셨습니다. 아버지의 몸에선 농약 냄새가 풍기고 경운기 한쪽엔 흙투성이 마스크가 보입니다. 나는 하루종일 책이나 보며 친구와 문자로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을 때 아버지는 독한 농약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고생을 하신 겁니다.

군데군데 나뉘어있는 밤자루를 싣고 짐칸에 올라탔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와중에 아버지를 찍었습니다. 아버지의 뒷모습은 어느새 많이 늙으셨더군요. 그동안 제가 아버지께 웃음보다 걱정거리만 안겨드렸는데…. 아들은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는데…. 빨리 효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버지는 화살보다 빠르게 세월의 흔적을 담아가고 계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가 갈아입으실 옷을 챙겨드리고 오늘도 밤나무 밭에 내려가야 하는지 여쭤봤습니다. 아버지는 그냥 쉬라고 하셨습니다.

"냅둬라. (도둑이) 밤나무밭을 뒤지든 밤나무 위에 올라가 흔들어대든. 그러다가 밤나무에서 떨어져 머리 깨져도 지 팔자니까."

덧붙이는 글 | <우리 가족의 특별한 추석 풍경> 응모글입니다.



태그:#추석, #섬진강, #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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