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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난 일요일의 외출은 친구녀석이 약속을 펑크냈기 때문이다. 일정은 미리 잡아놓았고, 아침에 삼계탕을 먹자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사양했는데, 친구녀석은 연락이 없었다. 어쩌면 처자식이 있는 친구녀석은 어젯밤 늦은 귀가에 바가지를 긁혔을 수도 있으니, 내가 먼저 그 가족에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은 법이다.

막바지 무더위 속 모자란 잠에 '방글라대시'던 나는 이미 세운 일정을 혼자라도 지키고 싶었다. 느즈막히 일어나 역근처 단골집에서 머리를 깎고, 잠시 후더운 공기에 망설이다가, 맥주 두 캔과 담배를 사들고, DMB 수신기와 카메라를 챙겨 들고, 뻔히 궁상스런 몰골이지만 그렇게 혼자 한강변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선 길인데, 이게 웬 행운인가? 내게 오늘은 황금같은 일요일이었다. 늘 반복적이고 단순한 휴일일 뿐이었던 나의 일요일. 반쯤 억지스레 나선 산책길에는 '그들'이 있어 정말 황금같았다.

무슨 공연이지? 음. 실력은 프로급은 아니지만 듣기가 좋다. 매우 다듬어진 실력들이었다. 음악은? 잘 모르겠다. 무슨 상관이야. 저들이 있어 고마울 뿐.

▲ 피아노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
ⓒ cheori27
잠시 그들의 연주를 감상하다가 그들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주변에 둘러앉아있던 사람들 중에 '관계자'가 있으면 물어볼까 했는데 마땅히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가 구경꾼들 틈에서 조금 멀찍이 걸려있는 플래카드 하나를 발견했다. 그들의 정체는 '피사빠'

▲ 피아노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
ⓒ cheori27
내 앞쪽에는 스케치북을 들고 나온 학생들(만화수련생 또는 회화과 학생?)이 있었는데, 그들끼리의 대화를 옮긴다.

"근데 저 사람들 뭐야?"
"피사빠! (플래카드를 가리키며) 저기 있잖아."
"허걱. 그런 무지막지한 표현을 쓰다니!"
"왜 어때서? 줄이면 그렇잖아!"
"함부로 줄이면 예의가 아니지. 말이 이상하잖아."

그런가? 글쎄…. 내겐 '피사빠'가 별로 이상하지 않은데. 아래 사진의 연주자는 저물어가는 오후의 시간들 중 가장 황금같은 장면을 연출해 주었다. 흐린 하늘 아래, 미미하지만 서쪽으로부터 전해오는 붉은 노을빛이 63빌딩에 아련히 부딪치면서,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흘러나오는 꿈결같은 피아노 소리를 연출하는 최상의 타이밍을 도맡아 주었다.

▲ 피아노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
ⓒ cheori27
드디어 어둠이 빛을 압도하기 시작하면서, 붉은 노을빛이 동쪽하늘의 구름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들은 결코 취미클럽의 서투름만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아래 연주자도 매우 훌륭한 연주와 함께 멋진 저물녘의 그림을 연출해 주었다.

▲ 피아노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
ⓒ cheori27
아득하게 밤이 밀려오는 한강가의 푸르름은 희뿌연 구름 때문에 더욱 처연하다.
엿들은 얘기를 공개해도 될까 모르지만, 아래 연주자는 클럽 내에서 연애를 하는가 보다. 애인은 8살 아래의 여성인가 보다. 회원들이 여러번 외쳐댔다. "애인하고 몇살차이죠?" 자기들이 묻고 자기들이 대답한다. "여덟 살?"

연주자는 애인과 함께 연주하던 추억이 담긴 곡이라면서, 오늘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당당히 사랑을 자랑한다. 부러움이 밀려오는 순간 시작된 그의 연주는… 너무나 훌륭했다. 아마도,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리고 맨 위 사진 이전의 연주는 못들어 봤지만, 오늘 연주의 백미가 아니었나 싶다. 경쾌하면서 짜임새있는 리듬의 곡명은 과문해서 모르겠지만, 리듬과 강약이 살아있고 절로 몸을 함께 흔들거리며 만끽할 수 있는 연주를 해주었다.

피아노와 사랑에 빠진 친구여! 사랑도 피아노도 영원히 그대와 함께 하기를 기원하노라!

▲ 피아노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
ⓒ cheori27
드디어 한강가에 어둠과 함께 달빛이 드리웠다. 이 친구들, 아니 이 클럽, 너무 멋지다. 이런 장면을 연출하는 카페나 모임이 있었나? 몰라봤다면 죄송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들처럼 멋진 장면을 자기들끼리만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보여준 클럽은 없는 듯하다.

피아노 배우기를 유보한 지 어언 20여년. 이거 다시 병이 도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저들과 함께 하지는 못하겠지만 언젠가는 나도 미뤄둔 피아노 배우기를 시작할 거다.

▲ 피아노와 사랑에 빠진 사람들
ⓒ cheori27
홀로 뻘쭘하게 나섰다가 행복에 겨워 돌아오는 길, 저 달은 내 사소한 행복을 이해해 줄지 모르지만…거기서 날 보고 있었다.

▲ 여의도의 달
ⓒ cheori27
이런 멋진 공연을 산책길에 우연히, 그것도 공짜로 감상하고 난 감동은 어떤 식으로든 내 삶에 새로운 활력이 되어 줄 것이다.

연락없던 친구 녀석, 잠시 열받았지만, 차라리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렇게 황금같은 일요일의 추억을 하나 만들 수 있었던 오늘을 감사한다. 물론, 이 우연의 중심에 서서 멋진 하루를 연출해 준 '피사빠'님들에게 모든 감사를 전해야지.

"님들, 피아노와 영원히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세여, 참 아름답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무브온21 moveon21.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피아노, #연주회, #여의도, #피사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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