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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친구들을 방문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얼마 전에 54회 결혼기념일을 맞이했었다. 남편이 작업용 부츠 바람으로 집 안에 들어와서 티없이 깨끗한 부엌 바닥에 흙덩어리를 남겨 놓았다. 그의 아내가 불쾌하리라 기대하면서, 내가 말했다. "그의 부츠가 틀림없이 흙을 끌어들이는군요." "그래요." 그녀는 미소를 띠고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빗자루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그 부츠가 그이도 데리고 오지요."

자전거 여행은 작게는 고장이나 궂은 날씨를, 크게는 도난사고나 교통사고처럼 여러 가지 문제점들과 직면해 있다. 하지만 반면에 그것은 그보다 더 큰 가치들을 끌어들이는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다. 숙소 문제에 직면했던 나에게 베풂이라는 더 큰 가치를 만나게 해 준 것처럼….

▲ 오대호 중에 하나인 온타리오 호수(Ontario lake). 6월 8일.
ⓒ 문종성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사물을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지, 사물 자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 칼 융

화씨 100도, 타는 목마름, 물동냥...

전 세계 어디서나 대도시를 빠져나가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몬트리올을 벗어나는 도로 역시 그랬다. 그래서 몇 번이나 길을 헤맨다. 표지판도 간헐적으로 있을뿐더러 불어권으로 불어를 사용하는 덕분에 의지하는 건 나침반과 탈출본능뿐이다.

점심은 시골의 쇼핑센터 근처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서 식빵에 참치를 발라 먹는다. 참치 한 캔을 따 듬뿍 바르면 참치 샌드위치 두 개는 너끈히 만들어 먹을 수 있다. 빵에 개미가 달라붙기에 하나 휙 던졌더니 어느새 새들이 모여들어 먹이 다툼을 벌인다. 이 순간 맞은 편 레스토랑에서 고풍스레 고기를 썰고 있는 그들이 결코 부럽지 않다.

▲ 식빵과 참치, 그리고 포도주스로 점심을 때운다. 여행의 대부분이 이런 식단이다.
ⓒ 문종성
오전엔 제법 선선했지만 오후 들어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덥다. 속도계를 통해 확인해 보니 화씨 100도까지 육박한다. 일기예보에 나오는 대기기온과 복사열을 받아 데워진 도로의 기온은 그 차이가 상당하다. 오후 5시가 넘어서도 여전히 화씨 95도를 유지하고 있다. 화씨 95도면 섭씨로 치면 35도란 얘기다. 오랫동안 햇빛을 받아 달리니 현기증도 나고 두통까지 생긴다. 하지만 사람 욕심이란 게 조금이라도 달릴 수 있을 때 달리자는 생각 때문에 쉽게 멈출 수도 없다.

끝도 없을 것만 광활한 대륙의 도로. 타는 목마름. 물도 다 떨어지고, 더 피곤하게 만드는 건 상점도 없다는 것. 하는 수 없이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굳게 닫힌 가정집 문을 두드려본다.

"자전거로 캐나다 동부 횡단하고 있습니다. 물 좀 있습니까?"
"물론이죠!"

용기를 걸어본 한 마디 물음에 물은 물론 음료수와 치킨, 과일까지 딸려 나온다. '얼씨구나 좋구나' 마음 속으로 어깨춤을 들썩인다. 얼마나 급했던지 자리를 잡지도 않고 선 채로 치킨과 과일, 음료수를 한 입에 가득 넣는다. 지금 이 순간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광활한 대륙에선 영양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기에 치킨도 고기라며 배에 기름이 들어가는 순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행복하다. 생각해 보니 오는 내내 레스토랑을 찾지 못해 점심을 빵 한 조각으로 겨우 때웠는데 날씨가 너무 덥다 보니 끼니를 챙기지 못했다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된다. 음료수를 되도록 먹지 않겠다는 처음 약속과는 다르게 자꾸 음료수에 손이 간다. 작년에 수술한 잇몸 때문이라도 가급적 물을 마시자고 자신과 약속했는데 말이다. 이성이 사실에 접근하기도 전에 본능은 이미 그 사실을 유린시켜 판단을 흐리게 하고 만다. 이것이 중독이다. 콜라 중독.

가끔 날은 뜨거운데 도로에 상점은 없고 인가만 드문드문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목이 마르면 도무지 방법이 없다. 물동냥을 해야 된다. 물동냥이야 어느 곳에 가도 인심은 좋고, 사실 말이 물이지 주스나 콜라, 과일, 빵 등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들은 초라하거나 혹은 대단해 보이는 대륙횡단 자전거 여행자들에게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기뻐한다. 그리고 한적한 시골에서는 심리적으로 내가 아니면 이 친구를 도와줄 사람이 없겠구나라는 책임감까지 덧붙여진다. 그래서 더 필요한 거 없느냐는 질문이 항상 대동되기 일쑤다.

단돈 $3짜리 숙소도 내겐 사치다

▲ 파란 호수는 하늘을 담은 듯하다.
ⓒ 문종성
▲ 캐나다에는 바이크 트레일(bike trail)이 잘 정비되어 있다. 시원한 숲 속을 달리다가.
ⓒ 문종성
길을 가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오늘 밤 폭풍이 올 거라는 얘길 들었다. 사실 비가 온다는 얘길 일기예보를 통해 얼핏 본 듯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터였다. 하지만 단순한 비(Rain)가 아니라 폭풍(storm)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도 저도 고려하지 않고 무대포로 달리는 동양 청년이 조금 걱정이 되는지 어디서 잘 거냐고 물어왔지만 나그네의 길을 가는 나조차도 어디서 하룻밤을 유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저 모른다고 미소만 지을 수밖에.

▲ 토요일에 진행되는 야드 세일(Yard sale). 쓸만한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다.
ⓒ 문종성
오후 6시. 이제 슬슬 숙소를 정해야 할 때다. 하지만 북반구의 여름은 해가 길고 길다. 더구나 내일 비가 온다는 얘기가 있었기에 최대한 많이 가 두는 게 상책. 저주스런 태양빛이 점차 사그라진다. 서쪽으로 향하기에 기울어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가며 숙소를 염두해 두고 달리다가 눈을 의심할만한 표지판을 보았다. 캠핑 장소가 단 돈 CAD $3. 빨래와 샤워까지 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하지만 좋은 조건에도 아직 시간이 6시밖에 안 되었고, 한 시간 정도는 더 전진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지나쳤다. 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이상하리만큼 거부감이 들었다.

▲ CAD $3의 가격을 자랑하는 환상적인 캠핑장의 표지판.
ⓒ 문종성
'과테말라 아이들은 하루에 $1로 생활하는데 넌 $3짜리 방에서 편히 자겠다고? 고생하러 나왔다는 녀석이… 쯧쯧.'

별안간 과테말라 아이들 생각이 드는 건 왜인가? 또 자전거 여행을 고생이라는 틀 속에 자신을 너무 잡아 가둔다는 생각까지. 비약이 심한 상상들은 언제나 줏대없는 판단을 낳는다. 해서 눈 딱 감고 미련없이 돌아섰다. 그렇게 몇 분을 달렸을까. 지나쳐 온 그 숙소가 여전히 가슴에서 옹알거리는 걸 발견했다. 숙소가 사람도 아닐 텐데 어쩐지 그 숙소가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놓치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 말이다.

'그만한 숙소가 드물지. 모텔 같은 곳은 기본 $50인데.'

다시 돌아가자! CAD $3의 매력적인 숙소를 포기하는 건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표지판 앞에 다시 섰을 때….

아… 왜 그러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까닭 없이 과테말라의 아이들이 또 눈앞에 그려졌다. 굳은 인상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도대체 왜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도 아니고, 동남아시아쪽 나라도 아니고, 주변에 파나마나 온두라스도 아닌 과테말라 아이들 생각이 날까? 영문도 모른 채 길 한가운데서 고민한다. 과테말라에 가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명쾌하게 풀어줄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심경이 복잡하다.

몸이 편해도 마음이 불편하면 오히려 신체리듬에 지장이 있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가자. 그냥 가자. 미련만 남기고 지나쳤던 숙소를 아쉬운 마음에 다시 되돌아왔지만 어쩐지 마음에 부담이 되어 또다시 지나친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여정이다. 좋은 숙소를 포기했지만 의외로 마음은 담담했다. 더 좋은 것으로 채워질 것 같다는 기대감이 마음에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 7시 30분. 어둑어둑해질 무렵 캠핑카들이 몰려있는 두 번째 캠핑장소를 찾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씻을 물을 준비하지 않아서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는단다. 아이쿠! 이거 참 다급하게 됐다. 해는 지평선이 아닌 구름 뒤로 숨어버렸고 이제 비가 한 방울씩 내 얼굴과 몸을 때리기 시작한다. 자전거가 다니는 길이 고속도로도 아니기에 황량하기 그지없는 곳에 모텔은 고사하고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마저 확보하기가 수월찮다. 그러니 선택은 둘 중 하나다. 마른 침으로 갈증을 달래고 찝찝하더라도 안 씻고 그냥 텐트에서 자든지 아니면 물이 있는 곳까지 기어코 찾아가든지…. 하지만 오늘은 폭풍 때문에 혼자 야영하기엔 무리가 따를 것 같아 최소한 기댈 공간을 찾아야 한다.

다음 숙소를 찾기 위해 잠자코 빛의 속도로 달린다. 젠장! 순간 벌레가 가쁜 숨을 몰아쉬기 위해 벌린 입 안으로 들어왔다. 혀로 입안 구석구석을 핥으며 찾아내려 했지만 이미 삼켜버린 듯 정체는 발견되지 않고, 마른기침만 해댄다. 평소 땐 그냥 기분 나쁘고 말 텐데 혹시나 이 녀석이 기생충을 낳아 내 몸에서 번식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도 된다. 찝찝하기도 하고, 마음이 여유롭지 못하니 별 생각이 다 든다.

잠시 후…. 악! 또 벌레다. 다시 벌레가 입 속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엔 아예 목구멍을 정조준하고 가미가제처럼 달려드는 녀석인지라 손 쓸 새도 없이 소화가 된 것 같다. 아놔! 두 번째로 당하니까 이젠 그저 단백질 덩어리가 위 속으로 들어갔구나 긍정적인 체념을 하게 된다.

먹구름 드리운 하늘 아래 안식처 찾기

▲ 하얀 구름과 검은 구름이 뚜렷이 대조되어 있다. 이것은 곧 다가올 폭풍을 암시하는 것이다.
ⓒ 문종성
하늘은 하얀 구름과 검은 구름이 뚜렷한 대립각을 세우며 거의 맞닿아 있다. 저 둘이 부딪히면 엄청난 천둥과 폭우를 동반할 게 뻔해 보였다. 마음이 더욱 초조해진다. 이렇게 급박하고 아쉬울 땐 항상 기도를 하게 된다. '8시까지는 숙소를 허락해 주십시오' 마음으로 빌었다. 늘 감사로 채워진 삶을 망각해 버리면서 염치도 없이 또 빌어 본다.

그러던 중 지나가는 길에 'Salem United Church'라는 작은 교회가 보였다. 하다 못해 비를 피하기 위해 교회 처마에서라도 자야겠다는 생각에 예배당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 문고리를 돌려보니 열린다. 예배당 안에서는 한 명의 남자와 여러 명의 노부인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낯선 동양청년의 등장에 놀라워하는 그들을 두고 먼저 기도부터 한다. 보잘 것 없고 지친 영혼에게 기도란 참으로 신의 따스한 품을 느낄 수 있는 위로의 안식처가 된다. 그리고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괜찮다면 교회에서 하룻밤 잘 수 있겠느냐고 정중히 부탁했다. 이미 하늘이 검게 물들고 스산한 바람이 불고 있었으므로 예배당이라면 좋고 안 된다면 처마 아래 텐트라도 칠 심산이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교회는 문을 닫는다고 한다.

▲ 왼쪽부터 바바라(Barbara)와 그의 동생 해이스(Hayes), 그리고 바바라의 친구. 그들이 나의 천사가 되어 주었다.
ⓒ 문종성
"하지만 제가 오늘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요."

한없이 자비로운 인상을 풍기는 바바라(Barbara)와 그의 동생 해이스(Hayes)가 자기들이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했다. 교회에서 조금 떨어진 개인 여관(Inn)으로 데려다 준 것이다. 놀라운 일이지만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정확히 8시하고 20초가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숙소를 소개시켜 주고 방값까지 대신 지불해 주었다. 그리고 20불을 도네이션해 주었다. 마음이 너무 따뜻해져 감격하고 있을 때 바바라가 나를 꼭 끌어안고는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다. 20불. 내게는 없어도 되는 돈이었지만 이것은 내가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길에서 받은 후원은 따로 적립해서 중앙아메리카에서 재후원할 생각이다.)

그때 갑자기 혀에 닿는 감촉 때문에 이물질을 뱉어냈는데 아까 그 처음 입에 들어간 날파리 녀석이었다. 왼쪽 어금니 뒤 깊숙한 곳에 딱 달라붙어 있다가 우연찮게 혀의 놀림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눈에도 날파리가 들어가서 이미 왼쪽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날씨도 그렇고 가뜩이나 초췌한 얼굴에 눈까지 충혈되니 좀비가 된 것 같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자비를 베풀어 준 바바라 자매와 헤어진 후 숙소에서 만난 존(John Lounsberry)의 부인은 더욱더 나를 반긴다. 그녀는 오타와에서 엔지니어링 교수로 재직 중인 남편과 함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여관을 경영하며 살고 있었다. 부부는 나에게 자신들의 사람에 대해서 진솔한 얘기를 해 주었고, 난 그들과 자전거 여행의 에피소드를 나누었다. 존은 창조과학에 대한 영상물을 보여주며 한 시간 동안이나 강연 아닌 강연을 하고, 부인은 다락방에서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남편과 손님인 나를 위해 'Amazing Grace'를 불러주었다.

아늑한 분위기에서 우린 밤이 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웠고, 창 밖으로는 천둥번개가 치고 바람이 불며 비가 내렸다.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한 후 먹은 주스와 과일샐러드가 이제야 소화될 무렵 졸음이 몰려온다. 침대에 누워 숙소 때문에 부산했던 하루 일정을 체크해 본다. 그리고 또 감사로 하루가 채워짐을 보게 된다.

▲ 창조과학에 대해 열띤 1:1 강연을 해 준 존(John).
ⓒ 문종성
오늘 무더위 가운데 몬트리올을 떠나 평소보다 조금 더 긴 거리인 126.5km를 달렸다. 북부 지방도 이런데 앞으로 한여름에 그랜드 캐년 사막 지역을 어떻게 지날지 걱정이다. 더운 날씨에 헬멧으로 꽉 조였던 머리도 아프고… 앞으로는 페이스 조절이 관건이다. 휴~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숲 속이나 나무 밑에 텐트를 쳤더라면, 정말 재난영화를 방불케 하는 무서운 밤이 될 뻔했다. 오늘, 이 감사를 잊지 않았다가 누군가에게 그 이상으로 되돌려주자는 생각을 하다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자전거여행, #캐나다, #숙소,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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