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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네로 시대, 누가 제국을 책임질 것인가?

아우구스투스부터 네로까지의 시기를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한다. 카이사르의 천재적인 재능은 양자를 통해서도 이어졌고(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모계를 통해서도 이어진다고(칼리굴라, 네로), 로마인들은 믿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싶어했던 로마인들의 인내심은 칼리굴라와 네로를 경험하면서 한계점에 도달했다.

초반에 성군의 이미지를 보이는 것 같았던 네로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폭군으로 종말을 고했다. 시노오 나나미의 표현대로라면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권위'를 지닌 로마 황제는 제국을 운영하는 데 적합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이제 로마인들은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을 고려하지 않고 로마 제국을 책임질 능력있는 사람을 선택해야 했다. 로마인들 역시 이제 더 이상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 혈통만을 의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바야흐로 포스트 네로 시대를 위해서는 제국을 차지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황제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회를 가장 빨리 접할 수 있는 사람은 물리적인 힘을 가진 로마 군단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가보아도 상식에 가까운 일이었다.

뛰어난 황제감으로 과대포장되었던 갈바

네로 황제가 죽자 가장 먼저 황제로 추대된 사람은 에스파냐 주둔군이 옹립한 갈바였다. 사람들은 갈바를 좋은 황제감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갈바는 좋은 황제가 되지 못하고 살해되고 말았다. 타키투스는 그러한 갈바에 대해서 "좋은 자질을 타고났다기보다 나쁜 자질이 전혀 없었던 데 불과한, 요컨대 평범한 인물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로마인 이야기> 제8권 '위기의 극복' 첫 부분에 등장한 갈바는 시오노 나나미의 평에 의하면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해버린" 과오를 범한 인물로 그려졌다. 병사들에게 지급하는 보너스 문제를 비롯하여 협력자를 선택하는 과정, 그리고 민심을 장악하기 위한 행동에서 실패한 갈바는 결국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보다 젊은 유망주인 오토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시오노 나나미의 설명에 따르면 갈바는 굴러들어온 복을 스스로 감당도 못하고 어쩔 줄 모르고 지체하다가 살해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로마인의 잠재의식 속에 있었던 '카이사르 혈통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을 떨쳐버리기 위한 과정으로 본다면, 그 첫 번째 주자인 갈바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실제 나이도 70이 넘은 고령이었고, 갈바가 선택한 것은 거의 모두가 갈바에게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역사 속에서는 평범한 인물이 뛰어난 인물로 포장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포장'에 대해서 냉철하게 분석하고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감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결말의 대부분은 평범한 인물이 마치 뛰어난 것처럼 과대포장되어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에서 출발하기도 한다.

비교적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열악한 상황에서 출발한 오토의 한계

오토는 시오노 나나미에게는 비교적 괜찮은 인물로 보여진 듯하다. 오토는 네로에게 아내를 빼앗긴 비련의 주인공으로 네로에 의해서 식민지의 총독으로 파견되면서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후퇴하지만 나름대로 와신상담의 기간을 가졌으며, 갈바가 황제에 오르면서 갈바의 뒤를 이어 제국을 통치할 수 있는 유망주로 부상한 인물이다.

그러나 갈바는 오토를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토는 자신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견해의 차이가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오토로서는 나이 많은 갈바에 비해서 앞으로 기회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군단을 배경으로 한 비텔리우스의 등장은 오토로 하여금 서둘러 갈바를 살해하고 로마 황제에 오르는 모험을 강요하게 되었다.

오토의 경쟁자 비텔리우스가 강력한 라인군단의 지지를 받고 있는 반면, 특별한 지지기반이 없었던 오토로서는 열악한 상황에서 비텔리우스를 상대해야 하는 불리한 조건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도나우군단이 오토를 지지하면서 로마 제국의 일인자를 위한 대결은 로마 군단끼리의 대결이라는 '내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아직 패배가 확정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은 시오노 나나미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것 같다. 작가는 오토와 비텔리우스를 서술하면서 인간적으로나 황제감으로나 비텔리우스보다는 낫다고 여겨진 오토가 '동포들끼리의 싸움'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 자살한 것이 무척 아쉬운 듯 많은 여운을 남겼다. 이후 비텔리우스의 실수를 언급하는 과정에서는 '만약 비텔리우스가 아니라 오토였다면...'이라는 여운을 남겨주고 있다.

비텔리우스, 제국을 힘만으로는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갈바가 황제에 오르면서 힘있는 군단을 배경으로 하는 지도자가 황제에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주었기 때문에 당시에 라인군단을 지휘하던 비텔리우스가 황제에 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갈바와 오토의 뒤를 이어 제국의 일인자가 되었다.

비텔리우스는 시오노 나나미가 생각하기로는 적절한 황제감이 아니었다. 그것도 포스트 네로 시대를 담당할 황제감은 더더욱 아니었다. 시오노 나나미가 고발하는 비텔리우스의 실수는 그야말로 혼란한 시대를 평정한 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비텔리우스는 그야말로 라인군단이라는 절대적인 군사력에 의해서 황제가 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원로원의 승인을 받아 황제가 된 갈바나 오토와는 달리 처음부터 원로원의 승인보다는 라인군단의 지지만으로 황제가 되었다.

제국의 서방의 유력한 지도자들 중에 최후의 승자는 비텔리우스가 되었다. 그러나 비텔리우스는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로서 가져야 할 덕목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로마로서는 제국을 통치할 자질이 없던 한 사람이 로마 군단이라는 힘을 통해서 황제가 되면서 그야말로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는 이후에 등장하는 베스파시아누스에 의해서 극복되었다.

포스트 네로 시대의 주인공, 베스파시아누스

서방의 유력자들이 치고받고 싸울 때 그 모습을 관망하던 베스파시아누스는 천천히 치밀한 단계를 밟으며 제국의 일인자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전진해 나갔다. 앞서간 역사의 인물들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교훈을 안겨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역사적 인물들은 뛰어난 관찰력을 소유한 동시대의 인물들에게 교훈을 제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베스파시아누스는 잊지 않았다.

베스파시아누스 앞의 세 사람(갈바, 오토, 비텔리우스)의 시행착오는 베스파시아누스에게는 철저한 교훈이 되었고, 세 사람을 경험한 로마 제국은 드디어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 혈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지도자가 황제에 오르는 것에 대해서 면역력이 생겼다. 정상적인 역사적 흐름이라면 수십년이 걸렸을 면역력은 2년도 안되어서 세 사람이 황제에 오르는 비정상적인 역사적 흐름을 통해서 단기간에 완성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이자 뛰어난 협력자인 티투스와 시리아 군단의 무키아누스의 협력을 받아 점진적으로 황제 비텔리우스에 대항할 동방의 유일한 세력자로 부상하였다. 뛰어난 협력자가 없거나 있어도 활용하지 못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와는 달리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들의 협력을 받으며 결국에는 비텔리우스를 격파하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로마에게 있어서 역량이 부족한 사람이 제국의 황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는 여러 황제를 통해서 증명해 보여주었다. 이제 로마 역사는 네로 황제 이후에 가장 적절한 역량을 가진 사람을 세명의 황제를 희생하면서 비로소 베스파시아누스에게서 찾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로마인 이야기> 응모글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태그:#로마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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