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 기념사진
ⓒ 한길사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기획되고 출간되던 1979년의 봄·여름·가을, 유신정권은 마지막 몰락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식인·학생·노동자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어져 갔다.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의 10명이 보도되지 않는 사건들의 개요를 수록한 <10·24민권일지> 출간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었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고난받는 문인을 위한 문학의 밤'을 전국에서 열었다.

3·1절을 맞아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 결성되었다.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으로 지식인들이 대거 구속되었다. 각종의 저항집회가 열렸고 재야인사들이 연금되었다. YH 여공들이 신민당사에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고 경찰은 이들을 폭력으로 해산시켰다. 폭력해산의 와중에 여공 김경숙 양이 추락해 숨졌다.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가 '정의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여는 한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는 '노동자·농민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기획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늦봄부터였다. 도대체 왜 분단이 되었을까? 흔히 '외세에 의해서' 민족과 국토가 분단되었다고 이야기되고 있지만, 과연 외세에 의해서만 분단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외재인'(外在因)이 아니라 '내재인'(內在因)으로 해방전후사 및 분단과정사를 규명해볼 수는 없을까? 이런 의문들을 나는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소박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런 문제의식과 더불어, 아니 보다 본질적인 문제의식으로 오늘의 상황을 규정하는 역사적 유산의 구조를 좀 과감하게 분석해보자, 오늘의 이 민족적 삶을 규정하는 요인들을 보다 자주적인 시각으로 규명해보자는 소망이 나에게 있었다. 우리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시기인 '해방전후사'를 이제 다루어야 한다.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지금 대결해야 할 '역사탐구의 영역'이 아닌가 말이다.

해방전후사를 제대로 논의한다는 것은 아직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들 이야기했다. 그러나 가능한 대목부터 논의해보자.

나는 목차를 짰다. 동아투위원들에 대한 재판을 방청하고 송건호 선생과 다방에서 만났다. 기획안을 살펴본 송 선생은 "아주 좋은 구상"이라면서 반겼다.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는 글만 모아진다면 제법 읽힐 거라는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송 선생 자신도 한 편 쓰겠다고 했다. 이미 나와 있는 논문들을 조사하고 집필해야 할 주제와 집필자를 고르고 청탁에 들어갔다.

해방전후사를 민족주의 사관으로 살펴보자!

▲ 미군의 지원 아래 한국광복군 대원에게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훈련을 시킬 것을 협의한 후 회의장을 나서는 김구와 미국측 대표
ⓒ 한길사
해방전후사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해방전후의 역사를 '민족사의 시각'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를 송건호 선생에게 청탁했다. 진덕규 이화여대 교수에게 '미군정'이란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를 문제제기 하자고 부탁했다. 진 교수는 해방전후를 중심으로 한 정치·사회 및 권력관계를 규명하는 선구적 업적을 이미 내놓고 있었다. 분단의 배경 및 그 과정을 국제정치적인 측면에서 다룬 김학준 서울대 교수의 논문을 그의 저서 <한국문제와 국제정치>(1976)에서 전재하기로 했다.

친일세력의 실체를 규명하여 독립된 국가의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자는 민족적 당위에서 출발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되고 반민족행위 처벌특별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었지만 바로 그 반민족 세력에 의해서 좌절되는 과정을 오익환 <경향신문> 기자에게 부탁했다. 오 기자는 당시 <경향신문>에 '반민특위'를 취재하여 연재한 바 있다.

일제 말 친일파의 반민족 친일행위의 실상은 임종국 선생에게 부탁했다. 임 선생은 <친일문학론>이라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이미 1960년대에 써냈다. 해방전후의 민족운동의 줄기를 잡아보는 분석은 <일제말 한국농민운동사>를 한길사를 통해 펴냈던 춘천교육대의 조동걸 교수에게 부탁했다.

해방전후의 민족운동노선에서 중요한 비중을 갖는 정치지도자들의 사상과 행동을 조명하기로 하고 '이승만'은 당시 <영남일보>에서 일하던 김도현 선생에게, '김구'는 백범사상연구소 백기완 선생에게 부탁했고, '여운형'은 이동화 선생이 <창작과비평> 1978년 여름호에 발표한 것을 전재하기로 했다.

해방 후의 농지개혁의 과정과 성격은 유인호 중앙대 교수가 이미 1975년에 발표한 논문을 전재하기로 했다. 해방직후의 문학을 시 중심으로 임헌영 선생에게 부탁했고, 소설은 염무웅 교수가 이미 발표했던 것을 전재하기로 했다.

7월 중순까지 모아진 원고는 매수가 3000여 매나 되는 방대한 것이었다. 각 논문들은 소설처럼 흥미진진했다. 미답의 해방전후사는 한결같이 싱싱하고 신비로운 영역이었다. 새로 집필된 원고뿐만 아니라 전재되는 원고들도 그 생명력이 새롭게 되살아났다.

나는 송건호 선생의 원고 '해방전후사의 민족사적 인식'을 받아 읽고 무릎을 쳤다. '8·15해방'의 의미를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하다니, 나는 이 책이 분명 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다른 원고들을 받아 정리해가면서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송 선생은 '민중이 주체가 되는 역사'로서의 '해방'을 논의하고 있다.

"8·15 하면 으레 해방을 연상하고 또 어떤 시인처럼 이날의 감격을 잊지 않기 위해 '우리들의 8·15로 돌아가자'는 노래까지 부르기도 했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8·15란 도대체 우리 민족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는가를 회의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것은 틀림없었으나 해방의 날이라고 하는 바로 8월 15일을 계기로 국토가 분단되어 남에는 미국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국토와 민족의 분열이 시작되었고 이 분열로 말미암아 6·25라는 민족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동족상잔을 빚고 그 후 30년간 남북간의 대립은 날로 심화되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막강한 군사력으로 언제 또 6·25보다 더 파괴적인 동족상잔이 빚어질지 모르는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 통에 민주주의는 시련을 겪고 민족의 에너지는 그 대부분이 동족상잔을 위한 새로운 군사력을 위해 소모되고 있는 가운데 지루하고 암담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 이른바 '해방된' 이 민족의 현실이다.

민족이 이토록 비극적인 절박한 상황에 빠져 있는데도 일찍이 이 땅의 학계에는 오늘의 분단상황을 민족사의 높은 차원에서 반성하여 민족의 살길이 무엇인가를 냉철하게 탐구하는 참된 의미의 민족적 고민의 흔적이 적고 고작 현실을 합리화하는, 이른바 정통성 논의 등이 지배적인 것을 볼 때, 민족이 자기 힘으로 쟁취한 해방이 아닌 주어진 해방일 때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한다."


나는 편집자의 말을 썼다.

"우리는 민족사의 전진을 위해, 이 시대와 숙명적으로 대결하는 자세를 가다듬으면서 이 시대의 의미를 추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가 해명됨으로써 그 이후 우리 자신에 대한 사회과학은 비로소 맥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1979년 10월 15일 책이 나왔다. 독자들의 반응은 놀라웠다. 5000부 정도는 나갈 것이라고 송건호 선생과 이야기를 나눈 바 있지만, 나가는 속도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앞지르고 있었다. '독자'들이 '해방전후사의 새로운 인식'을 이미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출판이 새로운 문화의 마당으로서 발돋움하면서 독자들도 크게 늘어났지만, 500여 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책이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에 나는 놀라고 있었다.

"친일 좀 했다는 것이 무슨 문제냐?"

▲ 1945년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전후 처리문제 등을 협의한 얄타 회담
ⓒ 한길사
<해방전후사> 제1권은 이렇게 탄생하지만, 시대상황은 급격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책이 세상에 나온 그 다음날, 부마(釜馬)사태가 터졌다. 유신정권의 몰락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마련되었다. YH사건 등 유신정권의 말기적인 증상이 여기 저기 노출되더니 급기야는 대통령 박정희가 그의 권력장치인 중앙정보부의 김재규 부장에 의해 시해되는 10·26사태로로 진전되는 것이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모든 출판물은 '군검열'을 받아 펴내게 되었다.

나는 10월 28일 문화공보부(문공부)로 호출되었다. 문공부 당국자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펼쳐놓고 나에게 호통을 쳤다.

"친일행위 따위를 지금 들춰내어 무엇 하겠다는 거야!"

10·26 이전에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대한 검토가 이미 진행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계엄사령부로부터 문공부에 파견된 한 문관의 '훈시'를 들어야 했다.

"당신을 구속해야 하지만, 처음이니까 관용을 베풀겠소. 다시는 이런 책 내지 마시오."

나는 문공부 관리의 지시에 따라, 서점에 나가지 않은 <해방전후사의 인식> 500여부를 용달차에 싣고 문공부로 운반해주어야 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초판을 5000부 찍었으니까 열흘 만에 4500여부가 나간 셈이었다. 광고도 없었고, 신문이 제대로 소개할 겨를도 없었다. 독자가 있을 거라고 예측하고는 있었지만, 이 땅의 독자들은 이미 더 나아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학술·인문적인 책의 경우 대개 초판을 1500부나 2000부를 찍는다. 초판을 5000부나 찍은 것은 딴에는 용기를 부린 셈이었다.

왜 '판금'되었을까? 어느 누가 판금시켜야 한다고 했을까? 해방전후의 역사적인 사실, 그 전개과정을 사실적으로 기술했을 뿐인 책을 말이다. 사실적인 기술이 가장 설득력 있고 폭로적일 수도 있겠지만, '판금'을 나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친일한 사실을 밝히고, 또 해방된 마당에, 민족을 반역한 친일파들의 숙청작업이 그 반민족 세력에 의해 좌절당하는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했다 해서 판금시키는 정부의 처사에 나는 도저히 승복할 수가 없었다.

임헌영 선생이 당시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필자'가 문제되어 판금시켰을까?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임 선생의 <해방 후 한국문학의 양상>은 더욱 돋보이는 선구적 논문이다.

임 선생은 8·15의 문학사적 위치, 각종 문학단체의 난립, 그 단체의 강령과 기치를 소개한 후 '해방'을 노래하는 자세와 그 시사적(詩史的)인 결실 및 과오를 비판하고 있다. 임 선생은 또 월북하고 납북된 시인들을 '민족문학사적 입장'에서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이들에 대한 과대평가는 물론 바람직스럽지 못하지만 맹목적인 과소평가 또한 바람직스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서울의 봄'에 다시 태어난 <해방전후사의 인식>

깊은 밤 권력자들의 총격으로 일어나는 10·26사태와 더불어 선포된 계엄령의 와중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판금되었지만, 나는 그해 12월 중순부터 <해방전후사의 인식>의 '재생'을 위해 움직였다. 나는 서울시청에 마련된 계엄사 검열실을 찾아가 검열 실무자들을 만났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대해 자세히 읽어봐 달라고 했다. 이 땅에서 책 만드는 사람의 양식으로 나는 '판금'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그때 실무자들은 서울시립대 출신의 시청직원들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인 김동배씨는 정말 책을 좋아하는 젊은 공무원이었다. 지금은 은평구청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나는 그를 비롯한 젊은 친구들과 여러 차례 만나 토론했다. 젊은 실무자들은 "정말 좋은 내용"이라고 동의까지 했다. 책이 나온 이후 나는 계속 자료와 논문을 찾고 있었고, 좋은 논문들이 이미 확보되고 있었다.

이종훈 중앙대 교수의 대형 논문 <미군정 경제의 역사적 성격>이 그 중 하나였다. 나는 이 교수의 논문 등을 추가해서 새로 조판하여 검열에 넣었다. 실무 담당자들과는 이미 약간의 '작전'이 진행되어 있었고 검열 책임자는 붉은 빛깔의 큼직한 '검열필' 도장을 쾅하고 찍어주었다.

이렇게 되는 데는 유신정권이 붕괴된 이후 1980년 5월까지의 '서울의 봄'이라는 역사적 과정에 우리 모두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짓눌렸던 국민들의 자유에의 열망이 폭발했던 것이고, 그것이 비록 5·17쿠데타에 의해 좌절되기는 했지만,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가슴 깊이 새기는 집단적 역사체험을 했던 것이다.

▲ <해방전후사의 인식>
ⓒ 한길사
그 격동하는 역사과정에서 태어나고 수난 받고 또다시 태어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그 격동하는 역사의 어둠을 밝히는 하나의 이론적 지향 또는 시대의 지적 이정표가 되었다. 아울러 해방전후사에 관한 인식작업 또는 연구가 금기시 되고 있었지만, 이 책의 존재로 그 금기는 깨지기 시작했다.

여러 출판사가 이 시대를 다루는 기획들을 진행시켰으며 젊은 세대들에 의해 이 시대가 힘차게 연구되기 시작했다. 분단시대사와 분단체제는 민주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의 최대의 테마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의 근대사·현대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출판운동과 연대되면서 하나의 민족문화운동으로 진전되는 것이 80년대의 풍경이었다. 해방전후사는 한 권의 책으로 규명될 수 없는 큰 주제일 것이다.

우리가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하나의 입문서'라고 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해방전후사가 특히 젊은 세대에 의해 연구되고 있지만, 한길사가 펴내고 있는 무크지 <한국사회연구>에서도 이 시대는 크게 다루어지고 있다.

제1집(1983)부터 '1945년 이후사의 재조명'을 기획하여, '현대사 연구와 민족사학의 과제'(송건호), '미군정기의 한국: 아시아 냉전의 초점'(최상용), '해방전후 민족경제의 성격'(박현채) 등이 발표되었고, 제2집(1984)에서는 '미군정시대의 언론과 그 이데올로기'(송건호), '8·15 직후의 노동자의 자주관리운동'(성한표)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제4집(1986)은 '38선은 어떻게 그어졌는가'(진석용), '8·15 직후의 사회운동'(송건호)을 다루고 있었다.

6년 만에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2권 출간

나는 <해방전후사의 인식> 속편의 기획에 대한 생각을 제1권을 펴낼 때부터 갖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해방전후사'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82년에 부르스 커밍스의 대작 <한국전쟁의 기원> 가운데 몇 편과 다른 논문 몇 편을 준비하여 펴내려고 했는데 '국내원고'가 채 마련되지 못한데다가 일월서각에서 편집해 펴낸 <분단전후의 현대사>에 커밍스의 논문이 들어 있다 하여 책이 수난을 당하는 바람에 <해방전후사의 인식 2>의 기획은 계속 지연되었다. 커밍스를 이른바 '반한(反韓)학자'라 하여 정부에서는 '금기필자'로 몰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문공부 쪽에서는 나에게 <해방전후사의 인식> 속편을 내지 말아달라는 '압력'까지 하고 나왔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이 나온 지 만 6년 만인 1985년 10월에 나온 <해방전후사의 인식 2> 작업은 그러나 1권에 비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1985년 봄 주제를 확정하고 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토론회를 가졌으며, 또 책을 낸 후 다시 필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 평가하는 모임도 가졌다.

<해방 2>에는 젊은 연구자들이 참여함으로써 해방전후사 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해방 1>을 대학시절에 읽고 공부하여 <해방 2>의 필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8·15 직후 정치지도자들의 노선비교'를 집필한 김광식씨,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과 활동'을 집필한 홍인숙씨, '미군정의 교육정책'을 집필한 이광호씨 등이 그들에 속한다. <해방 1> 이후 우리 사회의 해방전후사 및 해방 이후 현대사에 대한 인식 수준은 양과 질에 있어서 놀라운 진전을 보였고, <해방 2>는 바로 그 진전된 수준을 보여주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1

송건호 외, 한길사(2004)


태그:#해방전후사의 인식, #김언호, #한길사, #송건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