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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이야기>
ⓒ 한길사
<로마인이야기>의 15권 중 2권이 눈에 들어왔다. '한니발 전쟁'이라는 부제를 가진 제2권과 '승자의 혼미'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 제3권이 그것이었다. 제2권과 제3권은 로마와 카르타고라는 역사의 승자와 패자의 대결을 그린 부분과 그 이후의 이야기이다.

로마와 카르타고를 보고 있노라면 그보다 훨씬 세월이 흐른 시점에서 무대도 동양으로 이동된 당나라와 고구려를 떠올리게 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두 그룹 사이에는 여러 가지 유사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하라!

기원전 3세기 지중해의 맹주 자리를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이를 포에니 전쟁이라고 부른다. 포에니란 당시 로마에서 카르타고인을 불렀던 이름인데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페니키아인과의 전쟁이란 뜻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그런 까닭에 전쟁의 이름 역시 역사의 승자인 로마의 입장에서 붙여진 것이다.

기원후 7세기 동양에서는 당나라와 고구려가 동북아시아 맹주 자리를 놓고 세 차례에 걸친 고·당 전쟁을 벌인다. 고·당 전쟁과 마찬가지로 포에니 전쟁 역시 세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져 우연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맹주 자리를 놓고 전쟁을 하였지만 실상은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놓고 싸운 것이나 다름없다. 로마와 카르타고는 그 시대에 전세계를 통틀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또한 문화적으로나 세계 최강대국이었다. 이는 당나라와 고구려도 마찬가지였다. 당나라와 고구려가 공존했던 기원후 7세기 무렵 이들을 능가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로마제국의 반쪽인 비잔틴제국이 계속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이미 힘의 균형은 서양에서 동양으로 넘어가있던 시기였다.

물론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전세계적인 교류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동서양을 아우르는 세계 최강대국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도 있지만 역사에 기록된 객관적인 지표를 놓고만 본다면 기원전 3세기의 세계 최강대국은 로마와 카르타고였고 기원후 7세기에는 당나라와 고구려가 그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초기 양상은 달랐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최후 승자는 로마였지만 처음부터 로마가 카르타고를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포에니 전쟁이 이루어지기 한참 전인 기원전 508년의 조약을 보면 로마의 선박이 카르타고의 항구에 기항하는 것이 상당부분 제한되어 있었다. 반대로 카르타고의 선박은 로마의 항구를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기원전 348년의 조약에서도 로마의 통상은 지역적인 제한이 있던데 반해 카르타고의 통상권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이 같은 불평등 조약은 당시 로마는 공화정으로 이행하면서 국력이 약화되어 있던데 비해 카르타고는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르타고의 허락이 없으면 로마인은 바다에서 손도 씻지 못한다'는 말만 보아도 당시에는 카르타고가 로마에 우위를 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나라와 고구려의 대결 구도도 처음에는 고구려가 앞서 나가는 형국이었다.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제의한 적이 있다. 이는 당나라의 국력이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수나라를 멸망시킨 후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던 고구려와 대적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고구려 영류왕의 친당정책 역시 양국의 우호적인 관계에 한몫을 하기도 했지만 고구려 강경파들의 주장대로 고구려가 먼저 당나라를 공격하였다면 건국 초기 후방이 안정되어 있지 않은 당나라로서는 고구려군을 막아낸다는 보장이 없었을 정도로 당시 고구려의 전력은 막강하였다.

최초의 격돌

초기 열세에 있던 로마는 기원전 264년에 메시나의 구원을 목적으로 군사를 일으킨다. 로마는 카르타고군의 전력에 비할 바가 못 되었음에도 용병으로 구성된 카르타고군의 약점을 파고들어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리고는 아그리젠토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제1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이다.

해군력에서 열세에 놓여있던 로마는 이후 해군력을 증강시키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육지전에 능한 로마군으로서는 해전에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집정관(최고 관리를 가리킴)이었던 두일리우스는 '까마귀'라는 신무기를 활용한다. 까마귀는 일종의 다리로서 로프로 고정되어 있던 철제 갈고리가 적선이 접근할 경우 적선에 꽂히도록 하여 배를 연결하도록 한 도구였다.

육지전에 능한 로마 군사들에게 해전을 육상 전투와 다름없는 환경으로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는데 나관중 원작의 <삼국지연의>에서 방통이 위나라 함대를 하나로 묶은 연환지계와 흡사한 원리이다. 어찌되었건 이 까마귀는 위력을 발휘하여 로마는 기선을 제압한다. 결국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돌아갔고 로마는 서지중해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한편 당나라는 서기 645년 70만의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침공한다. 당태종 이세민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요동 일대의 성들을 하나둘 함락시켜 나간다. 그리고 장량이 이끄는 수군 역시 바다에서 고구려를 압박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는 안시성에 이르러 발이 묶이고 만다. 천혜의 요새였던 안시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당 태종은 토성까지 쌓았으나 그마저도 고구려에 빼앗기고 안시성 성주 양만춘이 쏜 화살에 한쪽 눈까지 잃고 만다. 그리고 바다에서도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수군을 전멸시킨다. 이후 연개소문은 추격을 계속하여 오히려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과 평주 등을 점령하며 전쟁을 승자임을 확실히 한다. 최후의 승자인 로마가 서전부터 승리로 장식했던 것과 달리 당나라는 첫 전쟁에서 완패를 하고 만 것이다.

계속되는 전쟁

카르타고가 1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했다고는 하나 그 피해는 경미한 것이었고 강화조약 역시 카르타고의 국력을 위협할 만한 수준이 못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로마 연합을 깨뜨리려는 목표를 가지고 사군토를 공격하였다. 이로써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한니발은 누구도 예상 못한 방법인 알프스 산맥을 넘는 전략으로 로마를 압박해 들어가지만 오히려 카르타고의 수도가 공격을 받게 되고 자신을 지원해주던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왕자마저 로마편에 서게 됨에 따라 결국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진 전투에서 한니발은 패배를 하고 후에 도망자 신세가 되어 끝내 자살을 하고 만다. 반면 로마는 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카르타고를 제치고 당당히 지중해의 맹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포에니 전쟁이 로마와 카르타고 한 번씩 번갈아 일으킨데 반해 고·당전쟁은 2차에서도 당나라가 먼저 시작하게 된다. 당나라의 이치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듣지 않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서기 660년 또다시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침공한다. 군대를 나누어 고구려의 다른 지역을 치는 듯하다가 평양성을 직접 공격한 당나라의 전략은 맞아떨어져 고구려는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카르타고에 한니발이 있었다면 고구려에는 연개소문이 있었다. 그는 당나라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당나라군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때마침 돌궐족이 당나라를 공격하게 되어 당나라 군대 중 일부는 철수하기에 이른다. 연개소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고 당나라 군대는 거의 몰살을 당하고 만다.

세 번째 전쟁, 그리고 승자와 패자

▲ <로마인이야기> 제3권 '승자의 혼미'
ⓒ 한길사
로마와 카르타고의 힘겨루기는 이미 2차 포에니 전쟁으로 인해 끝난 상황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다시 부강해지고 있는 카르타고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동맹국인 누미디아를 시켜 카르타고를 침공하게 한다. 2차 전쟁에서 맺은 조약으로 로마의 허락 없이는 군대를 움직일 수 없었던 카르타고는 로마에 도움을 청하지만 무시당하고 결국 자국의 힘으로 누미디아군를 격파한다.

이에 로마는 조약 위반을 내세우며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하지만 카르타고는 화친을 제의한다. 로마의 스키피오는 모든 무기를 넘기면 전쟁을 멈추겠다는 간계를 써서 결국 카르타고를 무너뜨린다. 이로써 카르타고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로마는 승리하기는 했어도 그 방법이 치졸하였기에 후세에까지 비판받는 것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당나라와 고구려의 세 번째 전쟁을 살펴보자. 당나라의 이치는 연개소문을 두려워하여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고구려 원정을 중단하기로 한다. 한편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죽고 나서 연개소문 아들들간 권력 다툼이 일어난다. 그리고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이 당나라로 와서 지원을 요청하자 마침내 당나라는 제3차 고·당 전쟁을 일으킨다.

나라의 버팀목이었던 연개소문이 없는 고구려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많은 성이 항복을 하는 와중에서도 고구려는 오랜 세월을 버텨냈지만 끝내는 평양성이 함락되어 멸망을 하고 만다. 고구려는 세 차례 전쟁에서 두 번을 승리했으나 마지막 한 번을 버티지 못하고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당나라에게 넘겨주게 된 것이다.

역사의 승자, 그 이후

로마는 지중해의 맹주, 아니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한 후 변화의 물결을 겪게 된다. 그라쿠스 형제가 진행한 개혁은 로마제국의 시스템에 공화정이 적합하냐 왕정이 적합하냐는 의문을 던지게 하였다. 또한 유산자 계급과 무산자 계급간의 갈등도 대두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맞서는 동안은 승리를 위해 모두가 단합했으나 로마가 거대한 제국으로 우뚝 서고 나니 서서히 이런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먹고 살만'해졌기 때문이다. 다행히 로마는 이런 점들을 어느 정도 극복했기에 번영이 오래도록 지속되기에 이른다.

고구려를 물리친 당나라 역시 유일무이의 강대국으로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당나라는 로마와 달랐다. 로마 이후에 나타난 국가들이 로마의 축적된 경제적, 문화적 힘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키게 된 것과 달리 당나라의 뒤를 이른 중국 왕조들은 고구려라는 경쟁 상대가 없어진 이후로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결국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동양 중심의 주도권은 서양으로 넘어가게 된다.

로마와 카르타고, 그리고 당나라와 고구려는 시공을 초월하여 많은 유사성도 보이고 시사점도 던져준다. 역사는 분명히 승자의 중심에서 기술되어 온 승자의 기록이다. 그러나 승자에게도 문제는 생기게 마련이다.

이것이 <로마인이야기>의 제3권의 부제인 '승자의 혼미'이다. 승자의 혼미를 극복한 로마는 오래도록 번영하였고 또한 후세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승자의 혼미를 극복하지 못한 당나라는 그 번영이 오래가지 못하였고 후세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만다.

시공을 초월하여 어디에서든 승자나 패자는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보이는 유사성과 시사점을 잘 파악하여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이 진정한 역사의 승자가 아닐까 싶다.

덧붙이는 글 | 로마인이야기 글쓰기 대회 응모작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태그:#로마, #카르타고, #로마인이야기, #고구려, #당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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