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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종 곰순이와 함께 산책에 나서는 흑곰과 백곰
ⓒ 송성영
"백곰! 흑곰!"

녀석들을 아무리 불러 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산자락에 납작 엎드려 우거진 나무 숲 사이를 요리저리 살펴보았지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햐! 이 자식들이 도대체 어딜 갔지? 백곰! 흑곰!"

계속에서 불러봤지만 앞산 쪽에서 내 목소리만 힘없는 메아리로 되돌아왔습니다. 아, 우리 집에 곰 새끼라도 기르고 있느냐고요? 아닙니다. 녀석들은 우리 집 개, 곰순이 새끼들입니다. 곰처럼 생긴 어미 곰순이를 닮아 그런지 두 놈 다 곰처럼 생겼습니다.

▲ 반달곰 닮은 반달이는 이웃 사촌 영주네 집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 송성영
곰순이 새끼는 본래 여섯 마리였습니다. 녀석들의 발바닥을 보면 영락없이 곰 새끼들입니다. 곰탱이, 반달곰, 짝귀, 깜씨는 이미 새 주인 만났고 흑곰과 백곰 두 놈만 남았습니다. 한 놈은 북극곰처럼 털색이 하얗고 또 한 놈은 어미처럼 검은 색입니다. 그래서 백곰, 흑곰입니다.

이름을 지어놓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새 주인 찾아 떠난 녀석들과 더불어 녀석들 모두 조폭 이름 같습니다. 그 이름값을 하겠다고 작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녀석 하는 짓이 완전 조폭 수준입니다.

▲ 흑곰 백곰에게 집을 통째로 내준 갑돌이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송성영
지 애비인 갑돌이 집을 무단 점령하기도 하는 녀석들은 종종 곰순이와 함께 산이며 산비탈 밭에 나서곤 합니다. 세상 물정 알 만큼 다 아는 곰순이는 밭고랑 사이로 조심스럽게 다니는데 녀석들은 주의를 주거나 말거나 밭작물을 온통 헤집어 가며 싸돌아다닙니다. "이 눔 새끼들! 얼릉 안 나와!" 벼락같이 소리치면 아예 밭 가운데에 발라당 누워 이리저리 뒹굴기까지 합니다. 배 째라는 식이죠.

그 날도 역시 새벽이슬에 젖어 있는 풀숲을 헤쳐 가며 녀석들과 함께 산에 올랐는데 잠시 잠깐 사이에 내 시야에서 벗어났던 것입니다. 곰순이요? 곰순이는 늘상 그래왔듯이 휘파람 소리를 듣고 달려와 내 옆댕이에 착하니 붙어 있었죠.

"너만 오믄 어떻게 혀 임마! 새끼덜은 어디에 있는 겨?"

곰순이 녀석은 혓바닥을 길게 빼놓고 헐떡거리며 꼬리만 살랑살랑 흔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휘파람 소리길 따라 되돌아온 시간이 다른 날보다 오래 걸렸습니다. 그만큼 녀석은 평소 때보다 먼 거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너 설마? 버리고 온 것은 아니겠지?"

▲ 곰순이와 흑곰 백곰
ⓒ 송성영
불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며칠 전부터 곰순이가 새끼들을 아주 귀찮아했었습니다. 다 큰 놈들이 아귀처럼 착 달라붙어 잘 나오지도 않는 곰순이의 축 처진 젖통을 아프게 빨아댔습니다. 그럴 때마다 곰순이는 이리저리 도망다녔고 그래도 다가오면 송곳니를 날카롭게 내놓고 새끼들을 매몰차게 떼어 놓곤 했습니다. 그 날 아침 산행을 갔을 때도 역시 새끼들이 따라오거나 말거나 저만치 거리를 두고 내달렸던 것입니다.

곰순이를 앞장세우고 이 골짜기 저 골짜기 기웃거려 봐도 새끼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흑곰! 백곰!"

정작 어미인 곰순이는 나 몰라라 뒷짐 지고 있는데 내가 더 설쳐댔습니다.

"곰순아, 니 새끼들 어딨다가 팽개쳐 놓았어! 엉?!"

녀석은 혓바닥을 길게 빼고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새끼들을 찾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습니다. 녀석도 지쳤고 나도 지쳤습니다. 1시간 넘게 산을 헤매다 보니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팠습니다. 아침밥을 챙겨 먹고 다시 찾아 봐야 할 것 같았습니다.

▲ 갓난 흑곰을 안고 있는 우리집 큰 아이 인효.
ⓒ 송성영
산을 내려오면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녀석들이 영리하니까 집을 찾아 올 수 있을 거여, 아니, 오소리 같은 녀석들에게 잡아먹히면 어쩌지….'

내 고무신을 껌처럼 질겅질겅 씹는 것은 예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집구석에 들어와 아무한테나 구질구질한 몸뚱이를 비벼대고 아예 진흙 발로 내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니다시피하는 녀석들이었습니다. 사고 치다가 콧잔등을 된통 얻어맞고 저만치 달아났다가도 "백곰! 흑곰!" 부르면 이내 쪼르르 달려와 손과 발을 핥아 주던 녀석들이었습니다.

어쩌다 심보가 뒤틀려 서로 죽어라 물어뜯어가며 싸우고 나서도 서로 핥아 주고 잠 잘 때는 서로 따듯한 이불이 되어 주던 녀석들이었습니다. 이런 녀석들을 어떻게 미워하겠습니까? 녀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어미에게서 멀어져 가며 젖을 떼고 있는데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녀석들과 미운 정 고운 정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산에서 내려와 다랭이 논 물꼬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길모퉁이에서 동네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워딜 갔다 오슈?"
"산에유. 혹시 우리 강아지 못봤쥬? 한 놈은 까맣고 한 놈은 흰 놈인디."
"못봤슈. 근디 거시기 논 옆댕이에 딸린 밭두 갈아먹을 거쥬?"
"예."
"뭘 심어 먹으려구?"
"콩 좀 심을까 하는디, 노루 새끼덜 극성에…."
"그류, 콩은 노루 땜에 안듀. 엌그제는 노루 새끼덜이 집 앞까지 내려 왔다니께, 그래서 오늘은 약을 쳐 놨슈."
"어떤 약유?"
"농약이나 쥐약 같은 거 버무려 놔유…."
"쥐약유? 노루 잡게유?"
"다들 그러는디 뭘, 노루새끼덜이 콩 밭을 싸그리 먹어 치우잖유."

나는 얼른 곰순이를 챙겨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곰순이 녀석이 남의 집 밭 가장자리를 어슬렁거리다가 노루 잡겠다고 놓은 쥐약이라도 낼름 주워 먹었다가는 큰일 나니까요.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집에 돌아와 보니 흑곰과 백곰 녀석이 꼬랑지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며 헤헤거리고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곰순이 녀석 역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꼬리를 흔들어대며 뭐라 말하는 듯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곰순이 녀석은 새끼들을 집에다 데려다 놓고 내 휘파람 소리에 다시 산으로 올라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점점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는 흑곰과 백곰 녀석들의 목줄을 만들었습니다. 녀석들은 영역이 넓어질수록 불안전지대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녀석들의 어미 곰순이에게 그렇게 했듯이 녀석들에게 목줄을 걸어 길들이기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저녁 때만 풀어놓고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가지 못하게 단단히 주의를 줬습니다. 함부로 산에 올라가 산짐승들을 크게 위협하는 일이 없도록 될 수 있으면 밭이나 집 주변에서 놀도록 했습니다. 녀석들이 다 크면 언제 어느 때고 휘파람 소리에 득달같이 달려오는 곰순이처럼 길들여질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 결국 묶일수 밖에 없었던 흑곰과 백곰.
ⓒ 송성영
목줄에 묶인 흑곰과 백곰은 종일토록 낑낑거렸습니다. 하루 종일 묶여 있는 다른 집의 개들과는 달리 아침저녁으로 짬짬이 풀어 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며칠 내내 낑낑거렸습니다. 녀석들은 산책길에서 돌아와 묶일 때마다 낑낑거렸습니다. 나는 그런 녀석들에게서 문득 우리 집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은 다른 집 아이들에 비해 공부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학원은 문턱에도 가보지 않았고 학습지조차 받아 보지 않습니다. 어쩌다 아내의 엄한 눈초리에 이끌려 책상 앞에 앉게 되는데 그때마다 낑낑거립니다.

목줄에 묶인 강아지들처럼 책상 앞에 익숙해질 때까지 깽깽거립니다. 곳곳에 쥐약과 농약이 놓여 있는 '사람들의 마을'로 내려가지 못하게 강아지들을 묶어 놓는다고는 하지만 우리 집 아이들을 책상 앞에 묶어 놓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의 마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길들이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펴가며 책상 앞에서 낑낑거리고 있는 아이들을 불러냈습니다.

"얘들아 밖으로 나와라, 강아지 데리고 산에 갔다 오자."

▲ 지금은 흑곰마저 떠나고, 여섯마리의 강아지들 중에 유일하게 흰털을 갖고 태어난 백곰만 남았다.
ⓒ 송성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자연과 생태> 7, 8월 호에 보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며칠후 흑곰은 개를 엄청 좋아한다는 어떤 스님네 절집으로 보냈습니다. 지금은 백곰 녀석만 남아 어미를 독차지 하고 있습니다.


태그:#개, #공부, #책상, #목줄,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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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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