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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공감되는 화제를 꺼낼 것. 대립 되는 이야기는 피할 것. 인연이 아니더라도 인상을 좋게 남길 것. 나름대로 맞선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부산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부산에 사는 내 여동생과 한동네 사는 아가씨의 여동생이 만들어 준 자리였다. 나는 가슴을 방망이질 치며 총천연색 상상을 하며 미래를 꿈꾸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고속도로가 극심한 정체현상을 빚어 버스가 내 달리지 못했다. 굼벵이처럼 기어간다는 표현이 옳겠다. 1백 년 만에 한 번 오는 길일이라고,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잘 되는 날이라고 언론이 떠들어서 집을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나는 약속 장소에 1시간 이상 늦어 버렸다.

속상해서 여동생이나 만나보고 되돌아가고 싶었지만, 일단 왔으니 가버린 것이라도 확인하고 싶어서 약속장소에 갔다. 다방에 들어서서 주인에게 부탁해서 아가씨의 이름을 불렀더니 혼자서 책을 읽고 있던 아가씨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1시간이나 늦었는데 기다리고 있음이 감동이었다. 그녀의 기다려준 이유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먼 길 오셨는데 내가 삐져서 가 버린다면 허탈하게 되돌아가야 할 것 같아서요."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만나는 순간에 마음이 통해 버린 우리는 커피 두 잔으로 3시간을 얘기했다. 그리고 함께 부산역을 향했고, 동대구행 차표를 그녀가 끊어 주었다. 시간 여유가 있어 함께 국수를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역 광장에서 팔을 뻗어 무엇을 가리켰다.

손끝에 '열차는 시간 약속을 잘 지킵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나의 지각을 이해함과 동시에 지각하지 않는 방법도 알려 주었다. 그래서 나는 열차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부산으로 달려갈 적에 항상 새마을호 열차를 탔다. 당시엔 제일 빠른 기차가 새마을호였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표를 끊으면 그녀에게 도착시간을 알려 주고 그녀는 내 전화를 받고서 부산역으로 내 달렸다.

우리는 항상 부산역 개찰구에서 만났다. 역 광장은 우리의 연애 장소였고, 근처 찻집이나 포장마차는 항상 우리를 반겼다. 손만 잡고 있어도 마음이 통했고,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다. 새마을호를 타면서 나는 한 번도 지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의 헤어지는 곳도 항상 부산역 개찰구였다. 무에 그리 아쉬움이 많았던지 열차가 떠난다는 기적소리 울릴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내 연애 시절에 철로에 깐 돈이 집 한 채는 된다"던 어느 선배의 이야기가 바로 나의 이야기였다. 돌아오는 길이 너무 피곤해서 깜박 잠들어 동대구를 지나 왜관까지 내달렸던 적도 수차례 된다. 돌이켜 생각하면 지극 정성이었다.

우리가 만난 지 2개월쯤 됐을 때, 내가 쓴 글이 입상을 하여 서울을 가게 되었다. 소식을 전해 주었더니 그녀가 꽃다발을 안겨 주겠다며 따라나섰다. 그녀는 부산에서 나는 동대구에서 서울행 새마을호 열차를 탔다.

같은 열차 같은 객차에 탔지만 같은 좌석은 맞추지 못했다. 그것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일행이라고 양해를 구하고 표를 바꾸면 되니까. 그 시절에 그런 일은 별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열차에 올라 그녀를 찾고 난 뒤 나는 난감해 졌다. 그녀의 옆에 흑인이 앉아 있었다. 표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나마 쪼끔 알던 영어가 머릿속에서 다 숨어 버렸다.

"한국말 할 줄 아세요?"

내가 물었더니 그는 대답이 없다. 대책이 없다. 말이 통해야 양해도 구하고 표도 바꾸고 그녀의 옆에 앉을 수 있는데…. 나는 영어를 모르고 흑인은 한국어를 모르니 어찌할거나. 나는 다짜고짜 열차 표를 흑인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외쳤다.

"change(체인지)!"

생각나는 말이 그것뿐이었다. 흑인은 기도 안 찬다는 듯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더 이상 설명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리둥절한 채 잠시 나를 보던 흑인이 입을 열었다.

"You의 여보?"

나와 그녀를 손가락으로 번갈아 가리켰다.

"O. K."

나는 환성을 질렀다. 흑인은 열차표를 바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내 자리로 가고 내가 옆에 앉으니 그녀는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었다. 나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인과 교감을 나누어 자리를 바꾸었음에 득의양양했다. 덕분에 우리는 대구에서 서울까지 짧지 않은 시간. 사랑의 탑을 더 높이 쌓을 수 있었다.

대중 속에서의 둘만의 공간에서 행복에 겨워 있는데 차내 판매원이 지나가다가 우리에게 음료수 두 통을 내밀었다. 강매인 줄 알고 사지 않겠다고 말했더니 외국인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나는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흑인이 활짝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나도 빙그레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주었다.

수원이 가까워 올 때 흑인이 나에게 와서 표를 내밀었다. 의아해서 그의 표를 보니 수원에서 내려야 했다. 우리는 다시 표를 바꾸었다.

"사랑하세요."

그는 내 여자를 향해 서툰 한국말로 사랑하라고 하고는 나에게 웃음을 던지고 내렸다. 우리는 낯선 외국인의 배려로 더욱 속 깊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그날 그 열차 안에서 우리는 첫 입맞춤을 하였다. 벌써 13년 전의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글.


태그:#새마을 호 열차, #부산, #대구, #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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