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옛 서울역 전경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마음이 심란하다.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오늘을 살다 보면, 산다는 것이 8월의 오후 2시처럼 지루할 때가 있다. 여름날의 오후 2시는 가만히 있어도 숨통이 막히고, 끝도 없이 흘러내리는 땀으로 짜증스럽다. 그즈음의 시간은 1초가 1년처럼 더디다.

요즈음 내 마음이 딱 그 모양새다. 단발머리 계집아이의 연둣빛 웃음소리는 귀에 거슬리고, 출근길마다 마주치는 노부부의 맞잡은 손은 볼썽사납다. 만물이 소생한다는 계절에 걸맞은 보송한 새순이 돋아나고 아침의 훈기는 하루하루가 다를진대, 마음은 점점 겨울로 치닫고 있다. 봄 가뭄에 갈라진 논두렁을 바라보는 농부처럼 마음이 타들어 가는 듯하다.

꼬리 밟힌 뱀처럼 독을 품은 마음은 칭얼대는 갓난쟁이 다루듯이 어르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술기운을 빌리면 여름 가뭄에 단비 내리듯 촉촉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근사한 안주에 알싸한 소주로 달래 보았으나 강악해진 마음은 엇나가기만 했다. 흥겨운 노래를 부르면 어깨춤에 맑아지지 않을까 노래를 흥얼거려보지만 정한 노래는 구구절절(句句節節)한 가사에 늘어지는 리듬뿐이다. 수렁으로 빠져드는 듯하다.

마음이 모질어지면 육신은 쉬이 피곤을 느끼는 듯 침대에 누우면 보이지 않는 손이 밑으로 당기는 느낌에 소스라친다. 습관적으로 텔레비전을 켠다. 유년시절 일요일 아침마다 졸린 눈으로 보았던 <은하철도 999>가 보인다. 철이와 메텔이 천년여왕의 비밀을 밝히려고 우주를 여행하는 환상적인 내용의 만화영화다.

휑한 눈으로 무작정 기차역을 찾다

문득 기차가 타고 싶다. 평소 독야청청 달리는 듯한 기차를 동경했기 때문일까? 이것저것 잴 여력도 없이 부스스한 머리 모양새는 손가락 빗질로 매만지고 청바지에 목 늘어난 티셔츠 달랑 걸치고 휑한 눈으로 기차역으로 향한다. 평소 집 근처 슈퍼를 가도 맨얼굴로 가는 것을 꺼리는 까다로운 성미의 나에겐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다.

손놀림이 재빠르고 일 놀림이 빠른 매표소 직원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어디요?" 직원이 묻는다. 어디를 가야하나, 어디를 가야 메마른 마음을 적실 수 있을까? 마른 입술만 달싹이는 나에게 "손님, 목적지가 어디신가요?" 독촉을 한다. 뒤통수가 뜨끈하다. 슬그머니 후회가 밀려온다. 가라앉는 몸을 이끌고 초라한 입성에 즉흥적인 생각만으로 기차역까지 온 스스로에게 경멸스런 웃음을 보낸다. 뒷사람의 채근에 밀리고 직원의 빠른 입놀림에 기가 죽어 부산 행 무궁화호 차표를 끊는다.

다행스럽게도 창가 쪽이다. 이왕이면 옆자리는 비어 주길 바라며 어두움이 질펀한 창밖을 내다본다. 마음이 메말라 있으니 세상은 회색도시다. 마음이 휘청거리는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더욱 답답한 노릇이다. 터질 듯 한 마음을 품은 나와는 달리 세상은 제 모습을 갖추고 사람들은 바쁘기만 하니 야속하다.

나의 바람과는 달리 연신 차표를 확인하며 중년의 여인이 옆 자리를 차지한다. 오른손에는 'OO떡집 개업' 이라 새겨진 보자기에 귀한 것을 싼 듯이 꼭 끌어안고 한 손에는 보자기만큼이나 초라해 보이는 화분을 들고 있다. 짐은 선반에 얹고 화분은 발치에 두어도 될 것을 알 굵은 다이아반지처럼 소중히 다루는 모습에 실소가 절로 난다. 두어 달 만에 슬며시 물어본 미소다. 나의 웃음을 알아 차렸는지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을 붙인다.

"아가씨는 어디까지 가요?"
딱히 정해진 장소가 없는 나에겐 당황스러운 질문이지만 차표에 찍힌 곳이 꼭 가야만 할 곳처럼 "부산이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을 피해볼 요량으로 눈길은 이내 창밖으로 돌리며 짧고 강하게 대답한다.

어두운 창밖을 보며 마음의 평정심을 꿈꾼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무궁화호의 속도는 KTX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전히 빠른 속도감으로 어두움을 가른다. 마음이 바르지 않다는 것은 세상이 삐딱하게만 보이는 것이며, 그것이 곧게 자리 잡았을 때에만 비로소 이웃과 함께 할 수 있다. 어두운 창밖을 보며 마음의 평정심을 꿈꾸어 본다.

"툭!" 옆자리 여인이 끌어안고 있던 보따리를 놓친 듯하다. 떨어지는 소리보다 이어 풍기는 반찬냄새가 먼저 훅 하고 코끝에 감긴다. 좁은 소견의 내가 쉽게 넘길 상황은 아니지만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 벌겋게 달아오른 여인인지라 "선반에 올려놓으시지요?" 이 말만으로 반갑지 않은 반찬 냄새에 대한 면박을 준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안타까워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변명처럼 들린다.

"아지매 솜씨가 좋은지 반찬 냄새 때문에 배고픈 거 말고는 괜찬심더, 다 먹는 긴데요." 앞자리 남자가 여인의 탄식에 위로를 한다.
"부산에 자대 배치 받은 아들 잘 묵는 반찬이라 만든 겁니더. 돈만 많으면 아들 좋아하는 통닭이며 회를 사고 싶었는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살림살이라 에미 노릇도 이렇게 밖에 못 합니더."
묻지도 않는 속사정까지 이야기 하는걸 보니 정성껏 준비한 음식의 흐트러짐에 속상하고, 걸쭉하게 퍼지는 반찬냄새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닌 듯하다.

그제야 여인의 행동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젊은이들이 즐기는 음식을 챙겨오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초라해 보일 수 있는 밑반찬이지만 아들 먹을 것이기에 혹여 라도 남의 발에 차일까 선반에 올리지 못한 어머니의 속 깊은 정이 있었구나 싶다.

"아가씨 잠시만 화분 좀 갖고 있으소. 요거 좀 치우구러."

여인은 바닥에 흥건히 배인 반찬 국물을 휴지로 닦는다. 여인이 맡기다시피 한 화분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받아들고 있는 꼴이 우습다. 이 화분은 뭘까? 군에 있는 아들에게 줄 화분치고는 꽃의 크기나 모양새가 볼품없을 뿐더러 향기까지 없는 걸 보니 조화인 듯하다. 아무리 살림이 궁핍해도 이왕에 아들 줄 요량으로 구입한 것이면 생화를 살 것이지 끌탕이 절로 난다.

물 적신 휴지로 여러 차례 닦아내는 부지런함으로 말끔히 정리를 하고 여인은 자리에 앉는다. 화분을 건네며 "조화보다는 생화를 사다 주지요. 요즘 생화도 저렴한데." 오지랖 넓은 척을 한다. "아이요 아가씨. 이건 생화라. 우리 아들은 뿌리가 있는 생화를 좋아해. 연보라를 좋아해서 꽃시장을 여러 번 돌아서 산기라 자세히 봐 보소. 볼품없고 향내는 진하지 않지만 잎사귀에 생채기가 있잖우" 그러고 보니 여린 잎사귀에 실금처럼 노란 상처가 있다.

그렇다. 살아있는 것은 인공적인 듯이 허술한 모양새에 향기 없는 듯 하나 저마다의 생채기가 있다. 나의 강악해진 마음은 무수한 생채기에 의한 것이고 그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마음이 후끈하다. 창밖의 어두움이 부풀어 똑똑 떨어진다. 초라한 행색의 여인을 얕잡아 본 나의 갈색 마음이 송구스러울 뿐이다. 깊은 깨달음이 있어 정신은 투명하고 마음은 제자리를 잡는 듯하다.

다시 떨어뜨리지 않으리라는 굳은 신념 같이 보따리를 힘주어 안은 여인과 나의 사이에는 뿌리까지 펄떡이는 조화 같은 생화가 자리 잡고 있다.

혼자만의 시간 갖기 제격인 밤 기차

▲ 부산역 전경
ⓒ 오마이뉴스 윤성효
밤 기차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엔 제격이다. 옆자리 타인의 고른 숨소리에 세상 혼자라는 외로움을 삭힐 수 있고 무심히 흘려버려도 좋을 듯한 아픈 사연에 스스로를 위로 할 수 있으니 마음이 우울 할 때는 안성맞춤인 해결책이다. 한발 물러서 바라본 불빛은 색유리를 뿌려놓은 듯 곱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술과 노래로 힘든 마음을 달래려한 나의 어리석음이 부끄럽다. 두어 달 만에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 조용하다. 흔들리는 기차에서 요지부동으로 잡히지 않을 것 같던 마음을 잡았다. 살아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생채기 없는 인공적인 삶만 꿈꾸었기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은 아닐까?

마음이 메마르고 강악해 질 때면 쾌적하지 않고 덜컹거림에 불편할지라도 기차를 타리라. 성난 고양이에게 할퀸 듯한 생채기를 치유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치료제는 없다.

집 떠난 자식에게 전해줄 보자기를 남의 발에 차일까 염려해 귀한 보석처럼 보듬고 잠든 부모님의 모습이 있고, 회사일로 이동중인 샐러리맨의 피곤함이 깃든 밤 기차에서 마음만은 맑은 시냇물처럼 졸졸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는 부산 부산입니다."

스피커를 통해 안내가 나온다. 여인의 반찬 냄새 때문일지 두어달 만에 허기를 느낀다. 멸치 국물 진하게 우려진 우동국물이 간절하다.

아! 이제 살수 있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글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