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최후의 템플기사단>
ⓒ 김영사
유럽의 중세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십자군이다. 그리고 십자군을 이야기할 때는 성당기사단을 빼놓을 수 없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십자군의 역사는 곧 성당기사단의 역사나 마찬가지다.

프랑스에서 성당기사단이 만들어진 것은 1118년이다. 1차 십자군 전쟁에서 십자군이 예루살렘과 트리폴리, 베이루트를 점령한 이후의 일이다. 예루살렘을 점령하자 유럽에서는 신자들이 이 지역으로 성지순례를 떠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은 여전히 위험했다. 무장한 아랍세력들이 아직도 그 지역을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순례단은 아랍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로 잡혀갔다.

성당기사단이 결성된 것은 이런 배경때문이었다. 성지인 예루살렘을 지키고, 성지에 오는 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취지에서 성당기사단은 결성되었다. 성당기사단은 처음에 9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결성 직후에 예루살렘으로 떠났다. 수천명의 아랍군과 맞서는 9명의 기사단. 마치 영화 <7인의 사무라이>, <황야의 7인>처럼 용감한 기사 9명이 순례자들을 보호한다는 영웅담이 시작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유럽 전역에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도처에서 성당기사단을 지원하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귀족들은 성당기사단에게 돈과 토지를 기부했고, 교황은 아낌없는 축복을 내려주었다. 성당기사단은 당연히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다른 가설도 있다. 성당기사단이 처음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예루살렘 왕이었던 보두앵 2세는 이들에게 궁전 동쪽에 있는 숙소를 내주었다. 한때 솔로몬 왕의 성전이 있던 곳이다. 성당기사단을 둘러싼 수많은 신비한 이야기 중의 하나는 이 부분에 있다.

성당기사단은 초기에 이 지역에 틀어박혀서 외출도 하지 않은 채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무엇을 찾고 있었을까. 예수가 죽고나서 천년도 넘은 시간이 흐른 뒤이다. 그곳에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

성당기사단의 보물을 놓고 벌어지는 음모

성당기사단을 소재로 하는 역사미스터리 소설은 많다. 그것은 아마도 성당기사단의 역사 자체가 워낙 드라마틱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부터 호르헤 몰리스트의 <반지>까지, 모두 성당기사단을 둘러싼 음모를 소재로 한다.

레이먼드 커리의 <최후의 템플기사단>도 마찬가지다. 성당기사단은 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물건은 성당기사단이 와해되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물건은 어디에 숨겨져 있을까. 그 물건이 공개되면 가톨릭 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최후의 템플기사단>은 현대의 뉴욕에서 시작한다. 바티칸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에 말을 탄 4명의 기사가 나타난다. 마치 수백년의 시간을 뚫고 나온 것처럼 이들은 하얀 바탕에 붉은 십자가가 그려진 망토를 입고 있다. 바로 성당기사단의 복장이다.

이 4명의 기사는 경비원을 죽이고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서 바티칸의 보물들을 가져간다. 그중 한 기사는 유독 한 가지 물건에 집착한다.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일종의 기계장치다. 타자기만한 크기에, 앞에는 수많은 단추가 붙어있고 옆면에는 전동장치가 얽혀있는 물건이다. 언뜻 보기에는 전혀 화려하지도 않고 돈이 될 것 같지도 않은 물건이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은 바로 이 기계장치에 있었다. 이 기계장치는 수백년 전에 성당기사단이 암호문을 작성하고 해독하기 위해서 만든 물건이다. 성당기사단의 비밀문서를 읽기 위해서는 이 기계장치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이때부터 모험과 추격전이 펼쳐진다. 뉴욕에서 시작한 모험은 터키의 산악지역, 바티칸 교황청을 넘어서 지중해의 바다까지 넘나든다.

성당기사단은 예루살렘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성당기사단을 둘러싼 또 다른 흥미로운 가설이 있다. 그것은 성당기사단이 과연 보물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성당기사단의 몰락은 갑자기 찾아왔다. 1307년 10월 13일 금요일에 프랑스 전역에서 성당기사단원들이 체포되었다. 체포되기 하루나 이틀 전에, 기사단원 몇몇이 짐을 실은 마차 몇 대를 끌고 기사단의 본거지를 떠났다고 한다. 그 짐이 성당기사단의 보물이었을 것이라는 설이 지금도 끊이지 않는다.

성당기사단이 체포된 원인은 이단과 동성애 등의 죄목이었다. 이들이 실제로 이단 행위와 동성애를 자행했는지는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다만 여러가지 정황이 있었을 뿐이다. 성당기사단은 오랫동안 예루살렘에서 생활했다. 아랍세력의 한복판에 근거지를 두고있었던 만큼, 이들은 오랜 시간동안 아랍인들과 어떤 형태로든 접촉이 있었을 것이다.

성당기사단을 상징하는 그림도 문제가 되었다. 창과 방패를 든 두 명의 기사가 한 마리 말에 함께 올라타고 있는 그림이다. 전성기때 성당기사단에는 기사 한 명 당 세마리의 말이 지급되었다. 그런데도 몸을 붙이고 함께 말에 올라있는 두 명의 기사. 이 그림은 성당기사단의 동성애를 암시한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중세시대에 개인이나 단체를 파괴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극도로 종교적인 시대였던 만큼, '이단'이라는 죄명을 붙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성당기사단도 그렇게 와해되었다. 성당기사단은 많은 땅과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사단 체포령을 내렸던 프랑스 왕은 기사단에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에 성당기사단은 더 이상 지켜야할 성지도, 보호해야할 순례자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는 '아비뇽 유수' 시대이기도 했다. 힘없는 교황은 남프랑스의 아비뇽에 연금되어 있었고, 프랑스 왕은 교황을 능가하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더이상 존재해야할 실질적인 이유도, 명분도 없는 성당기사단. 그러면서도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성당기사단. 프랑스 왕의 눈에는 성당기사단이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시쳇말로 하자면 십자군 전쟁이 끝나면서 기사단은 배신당한거나 마찬가지다.

1291년 아크레 성이 함락되면서 십자군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 그리고 1314년 성당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인 '자크 드 몰레'가 화형당하면서 성당기사단의 역사도 끝난다. 야만의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야만적인 사건이었다. 이제 14세기 중반으로 접어든다. 그것은 곧 르네상스가 시작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최후의 템플기사단> 1, 2. 레이먼드 커리 지음 / 한은경 옮김. 김영사 펴냄.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를 전후로 해서, 로마 가톨릭을 둘러싼 역사 미스터리 소설이 끊이지 않고 출간되고 있습니다. 관련 작품들을 소재별로 분류해서 한 편씩 소개하고자 합니다.


최후의 템플 기사단 1

레이먼드 커리 지음, 한은경 옮김, 김영사(2005)


태그:#레이먼드 커리, #<최후의 템플기사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