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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장산성의 성벽. 용장산성은 삼별초가 웅거하며 여몽연합군과의 전쟁을 벌렸던 격전지이다. 성의 크기가 큰데, 이는 삼별초에겐 결정적인 약점이 되었다.(사적 제 126호)
ⓒ 송영대
고려시대는 그야말로 전쟁의 나날이었다. 우리나라에 있었던 외침 중 3/4이 고려시대에 이뤄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려는 전쟁과 함께 지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와 영웅이 나왔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 속에서 흘린 피는 오늘날의 우리가 존재 할 수 있는 강인한 뿌리의 근원이다. 고려인들의 피가 흐르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한국이라는 나라 속에서 한국인으로서 존재 할 수 있었을까?

고려는 그 당시 수많은 강적들과 전쟁을 치렀다. 대표적인 예가 거란과 여진, 그리고 몽골 등이었다. 거란과 여진은 사실 국사교과서 등에서는 폄훼되어 약한 오랑캐 정도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는 매우 동떨어져 있다. 거란과 여진은 그 당시 세계에서도 그 명성을 날렸던 강대국이었다.

중국의 송나라가 원체 약체라는 말을 듣기도 하나, 그러한 송나라를 강하게 압박하고 떵떵거렸던 요나라, 그리고 송나라를 양자강 이남으로 밀어버리고 그 위에 자리를 잡고 떵떵거렸던 금나라는 고려의 적대국이었다. 고려는 이들을 상대로 한 치의 땅도 내주지 않고, 도리어 맞붙어서 승리까지 하였다. 비록 이자겸의 선택으로 불운한 결과를 가져오긴 하였으나, 이들과의 싸움은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몽골, 즉 예케 몽골 울루스와의 전쟁은 고려의 역사 상 가장 힘들고, 또한 막대한 피해가 있었으며, 끈질긴 저항이 있었던 전쟁이다. 비록 항복을 함으로서 몽골의 부마국으로 되었으나, 그렇게 인정되게 된 것도 고려인의 의기에 대한 일정한 보답이 아니었을까?

몽골과의 항쟁에서 삼별초(三別抄)는 빼놓으려야 빼 놓을 수가 없는 존재다. 삼별초는 야별초인 좌별초와 우별초, 그리고 신의군의 합쳐져 만들어 진 집단이다. 사실 무신정권의 최우가 자신들의 권력 보호 및 치안유지를 위해서 만든 사병집단이라고 할만한 게 삼별초이다.

이들은 쉽게 생각해서 오늘날의 경찰과 비슷한데, 본래는 도둑을 잡고 남폭을 금하는 게 사명이나, 죄인을 체포하고 투옥하는 것도 가능하여, 도둑 뿐 아니라 반역죄인까지도 관할하였다고 한다. 엄밀히 따져보면 이들은 사병집단으로서의 경찰이었기에, 최씨무신정권의 권력을 다지는데 앞장섰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면모 때문에 삼별초에 대해서는 최근 여러모로 비판이 있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의 몽골과의 전투도 이전부터 정식적으로 싸우기보다도 무신정권이나 자신들의 권익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을 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이 있기도 하다.

몽골과의 항쟁 당시, 강화도로 천도 할 때 이들도 최씨 무신정권과 함께 옮겨갔다. 삼별초는 여기에서 왕실과 무신정권과 함께 웅거하고 있었다. 그런데 1259년, 고려 태자 전이 부왕을 대신에 몽골에 입조함으로서 몽골과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이때 최씨정권의 타도되어 왕정이 복구되었으나 실권은 무신들이 잡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왕실과 무신측은 서로 등을 돌리고, 원종 11년(1270년), 왕실은 개경환도를 강행하게 된다.

“11년 다시 개경(開京)에 도읍하매 방을 써 붙여 기일(期日)을 정하고 재촉하여 모두 돌아오게 하였는데 삼별초(三別抄)가 딴 마음이 있어 좇지 않는지라 왕이 장군(將軍) 김지저(金之氐)를 보내어 강화(江華)에 들어가 삼별초(三別抄)를 파(罷)하고 그 명적(名籍)을 취해 돌아오게 하니 삼별초(三別抄)가 명적(名籍)을 몽고(蒙古)에 알릴까 두려워하여 더욱 반심(反心)을 품었다. - 『고려사』 권 130 「열전」 43 반역 배중손”

삼별초가 몽골과 싸우게 된 첫 번째 원인은 사실 고려 왕실과의 분란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위의 인용대로 김지저가 삼별초를 공격하고 그들의 명단을 가지고 돌아갔다. 이는 왕실과 등을 돌렸던 삼별초를 벌하기 위한 조정의 조처였으며, 삼별초는 개경으로 돌아가면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는 위기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삼별초는 고려의 정부와 몽골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품게 된다.

삼별초가 난을 일으킨 3번째 이유는 바로 몽골과의 대응의식이었다. 삼별초는 강화도에 남은 후 고려조정 및 몽골과의 항쟁을 결심한다. 그리고 배중손(裴仲孫)은 여러 사람들을 모아놓고, “몽고병(蒙古兵)이 크게 이르러 인민(人民)을 살육하니 무릇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다 모이라”라고 외친다. 이는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밝히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그 정당성을 밝히기 위한 외침에서 몽골에 대한 대항의식을 드러냈다는 것이 중요하다.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웅거하며 몽골 및 고려와 대항하기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진도로 옮기게 되었다. 진도는 남해안의 큰 섬으로서 수중전에 약하다는 몽골의 단점을 인지하고, 고려의 조정으로부터 떨어진 곳이어야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은 수중전의 이유로 진도와 제주로 옮겼다고 하지만, 이는 사실 역사적으로 옳다고 하기엔 약간 힘들다. 삼별초의 상대는 몽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고려 조정과 몽골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해상력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었기에 단순히 수중전을 이유로 들기보다도 그들의 세력을 더 뻗히기 용이한 곳으로 갔다고 하는 편이 적당하다고 하겠다.

삼별초에 대한 의의를 드는 것 중 하나는 그들은 독자적인 고려정부를 선언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에 2개의 정부가 있는 상황이 되었음을 말하며, 왕족인 승화우 왕온을 왕으로 삼았고, 일본에 사신까지 파견하였다. 이는 삼별초가 자신들의 자주성을 크게 밝혔다는 데에서 의의가 있다.

이 삼별초가 진도로 옮긴 상황에서 그들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 용장산성(龍藏山城)이다. 용장산성은 지금은 옛 자취를 잃어버리고 석축의 흔적들만 남아 있으나, 과거 삼별초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 용장산성 홍보관. 용장산성에 대한 여러 정보들이나, 삼별초의 항전에 대해서 자세히 정리해 놓았다. 영상물도 상영하며, 그 영상물에는 삼별초와 용장산성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 송영대
용장산성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용장산성 홍보관이었다. 만든 지는 그다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는데, 용장사의 옆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행궁터가 보였다. 용장산성 홍보관은 당연 삼별초에 그 코드가 맞춰져 있다. 삼별초가 몽골에 대항하게 된 배경과 그 당시의 역사적 상황, 그리고 용장산성의 전체적인 모습 등이 홍보관에 있었다. 그리고 홍보관 영상실에서는 용장산성에 관련된 영상물을 틀어 놓았는데,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용장산성에 대해서 알기 쉽게 구성해 놓았다.

▲ 용장산성 행궁터.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건물지에서 여러 기와조각들이 발견된다. 이곳에 당시 행궁이 있어서 승화우 온과 배중손 등이 기거하면서 활동하였으리라 본다.
ⓒ 송영대
홍보관에서 나와 행궁터로 갔다. 행궁터는 계단식으로 펼쳐져 있었는데, 계단식 밭을 석축으로 메우면서 위로 주욱 올라간 형태로 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건물지와는 달리 험준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약간 의아한 감이 드는데, 이 행궁터는 절이 있었으나, 삼별초가 이곳으로 세력을 옮긴 후, 왕궁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공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곳에서는 아직도 건물지가 확인된다.

행궁터의 군데군데에 주춧돌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를 유추하여 이곳에 여러 건물이 들어섰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홍보관에서도 이에 대해서는 복원을 하며 그 모습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행궁터의 아래는 넓게 펼쳐져 있으며, 우물이 하나 있다. 아래가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은 이곳에 민가들이 모여 살았거나, 연병장으로 활용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든다.

▲ 유단식 수키와 조각. 행궁터에서 발견하였다. 이처럼 용장산성과 행궁터에서는 곳곳에서 여러 기와조각들이 발견된다.
ⓒ 송영대
행궁터를 거닐다가 기와 몇 조각을 발견하였다. 하나는 그냥 암키와의 조각이었는데, 크게 특징적인 것은 없었다. 그리고 유단식 수키와도 발견하였는데, 유단부분만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는 어렵지 않게 군데군데에 있는 여러 기와들을 볼 수 있다. 답사를 가서 단순히 경관만 보고 만족하기보다 이러한 기와들을 찾으면서 그 매력을 한껏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석축은 아직도 그 의연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복원되어서 그런지 원래 그런지는 몰라도 튼튼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갑작스런 천도(?)로 인하여 임시적으로 조정을 세웠기에 약간의 시늉만 해 놓았다는 느낌도 드는데, 행궁터의 뒤편은 높은 산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산에는 성벽이 있어서 적에게 최대한 방어를 하기 용이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행궁터를 보고나서 용장산성 성벽을 향해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도 약간의 기와편 등이 조금씩 발견되기도 하였다. 산성의 성벽을 보러 가는 길이라 평소 등산하는 느낌이었다. 가다가 도롱뇽 한 마리를 발견했는데, 가만 살펴보자 잠시 몸을 빼꼼 보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 용장산성의 성벽. 본래는 석심토축성으로, 사진에서 보이는 곳은 현재 복원된 곳이다. 성벽의 돌들을 살펴보다 보면 채석흔이 있는 게 더러 보인다.
ⓒ 송영대
용장산성 산성벽으로 올라가는 길은 생각보다 험준하지는 않았지만 시간은 좀 걸렸다. 올라서서 보니 산등성이를 따라서 성벽이 형성되어 있었다. 석축이며, 높이는 4m 정도 되는 곳도 있다고 한다.

이곳에 오르면 진도가 한눈에 보인다. 마을과 논밭도 한눈에 보이며, 바다까지 내려다보인다. 이곳에서 삼별초는 고려 조정과 몽골에 대항한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세력을 형성하여 남해안을 잠식해 갔으니, 이는 고려 조정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고, 삼별초로서도 그들의 세력을 유지하는데 좋은 버팀목이 되었다.

이러한 성벽은 현재 12.85km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모든 지리지에서는 이 용장산성의 길이를 둘레 38,741척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를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12.1km, 포백척으로 환산하면 18.1km이다.

성돌을 가만가만 살펴보면 채석흔이 남아 있다. 즉 성벽을 쌓기 위해서 돌을 깬 흔적인데, 드문드문 그 흔적들이 보였다. 내가 오른 곳은 현재 복원한 성벽으로 길이는 420m정도라고 한다. 본래는 석심토축성이라고 하는데, 석심토축성이란 속은 돌, 겉은 흙으로 되어 있는 외유내강형의 성벽이다.

용장산성은 남고북저형으로, 육지와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방어벽을 형성하였고, 산등성이를 따라 성곽이 이어져 있다. 크게 보면 3면이 바다인 형태인데, 궁궐(행궁터)과 마을과 군사시설 등이 모두 이곳에 있었다는 점을 쉽게 연상 할 수 있다. 길다란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인데, 자연지세를 이용한 점은 용장산성의 장점이고, 큰 규모도 스스로 새로운 고려를 자칭하였기에 그렇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큰 규모이다.

삼별초가 진도에서 항전하다가 적에게 진 이유 중 하나를 대라면 지나치게 큰 용장산성의 구조 때문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방어선이 크고 방어망이 잘 짜여져 있으면 적으로부터의 방어에 용이하나 수많은 병사들이 필요하며 이러한 병사들이 고루 배치되어야 한다.

▲ 성벽에서 바라본 바다. 마을과 논 등 진도의 북쪽이 훤히 보인다. 이곳에서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의 움직임을 체크하였을 것이다.
ⓒ 송영대
『고려사』를 보면 당시 고려군을 이끌었던 장수는 김방경(金方慶). 김방경은 그 이후 일본정벌까지 활약한 장군으로서 꾀를 잘 쓰는 자였다. 김방경이 애초에 아해와 함께 진도에서 삼별초와 싸울 때에는 해전을 하였다. 삼별초는 이때 강성한 세를 보이면서 배와 성에서 북과 징을 치면서 기세를 드높이면서 여몽연합군을 위협하였다.

아해는 이에 적과 싸우기를 주저하고, 삼별초가 반격을 가하자 관군은 지레 겁을 먹고 슬금슬금 물러나게 되었다 이때 김방경은 군사를 이끌고 적진에 홀로 돌진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는 김방경의 미스 초이스였다. 아군의 기세를 드높이고자 하는 행동이었으나 도리어 적에게 포위를 당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고려사에서는 이에 대해서 “적중에 돌입하니 적이 포위하고 구박(驅迫)하여 가는지라 김방경의 사졸(士卒)이 죽음으로써 싸웠으나 시석(矢石)이 다하였으며 또 모두 화살에 맞아 능히 일어나지 못하였다”라고 써있다.

이때 김방경은 자살하려고 하나, 주위에서 만류하였다. 김방경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의자에 걸터앉아서 군사를 지휘한다. 이때 전세를 뒤바꾸는 상황이 발생하였으니, 바로 양동무의 협공이었다. 양동무가 군사를 이끌고 김방경을 구원하고, 삼별초는 물러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김방경으로서는 배중손과의 첫 대결에서 패배를 당했다고 보아도 되겠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았던 장수들은 아해와 함께 모두 좌천되어 바뀌게 된다. 그리고 몽골장군 흔도는 김방경과 연합하여 진도를 공략하게 된다. 이때 김방경과 흔도는 용장산성의 약점을 파악하여 이를 최대한 이용한다.

용장산성의 방어선은 길다. 이는 관군에 비해서 적었던 삼별초에게는 최대의 약점이었다. 자고로 적과 싸울 시 군사가 적으면 적의 군사를 아군과 비슷하거나 적게 해서 싸워야 승산이 있다. 그렇지 않고 군사가 적으면 당연히 전쟁에서 불리하게 된다. 그래서 손자는 전쟁에서 군사가 적은 것을 경계한 것이다.

군사가 많을 경우 그 당시의 전쟁에서 쓰는 방법은 크게 3가지이다. 모든 군사가 적과 한꺼번에 싸우는 작전과, 군사를 일정한 패턴으로 교대하면서 적과 싸우는 방법, 군사를 크게 여러 부대로 나눠서 적들을 분산시켜서 공격하는 방법이 바로 그것이다. 김방경과 흔도는 바로 세 번째 방법을 사용하였다.

김방경과 흔도는 중군을, 홍다구는 좌군을, 김석은 우군을 거느리고 전투에 임하였다. 우선 중군은 벽파정으로 가니, 삼별초는 벽파정에서 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이때 홍다구가 장항으로 들어가 불을 놓고 협공하자, 삼별초는 크게 당황하게 된다.

삼별초는 애초에 군사의 다수를 벽파정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일부 병력만 주둔시켰을 터인데, 또 다른 곳에서도 전선이 형성되니 그곳에서 군사를 급파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그 당시는 오늘날처럼 군사가 많지 않아서 군사의 운용에 있어서 모든 방어진에 군사를 파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중요한 부분에는 일부를 배치하고 본격적인 싸움터에 다수의 군대를 파견하는데, 삼별초의 예상과는 달리 2곳에서 격전이 벌어지니 할 수 없이 본래의 병력에서 둘로 쪼개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 경우 전투력은 당연 절반으로 떨어지고, 갑작스런 명령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지게 된다.

홍다구의 좌군과 싸우던 군사들은 도망치면서 우군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우군은 생각보다 강하지 않고, 도리어 삼별초에게 우세한 상황이 벌어진다. 우군은 중군과 합세하고, 삼별초는 이들을 추격하여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기만책이면서 삼별초는 전투의 혼란으로 본의를 망각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배후에 적을 남겨두고 우군의 약함을 생각하여 그들을 처치하면 연합군이 물러나리라는 생각을 하였으나, 3군으로 나눈 배치는 삼별초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말해준다. 중군과 우군은 연합하여 삼별초와 맞닥뜨리니 삼별초는 생각보다도 강한 그들에게 적잖이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홍다구의 좌군은 그대로 궁궐로 진입하여 승화후 온을 죽인다. 이로서 배후가 습격되어 삼별초는 전진할 수도 후퇴할 수도 없으며, 크게 보면 포위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로서 삼별초는 패배하게 되고 일부는 후퇴하여 탐라로 도망가게 된다. 이게 바로 김방경과 배중손으로 두 번째 전투, 결과는 김방경의 승리로, 배중손은 여기에서 전사한 것으로 보인다.

삼별초는 용맹하였으나, 그들을 진도에서 무너지게 한 원인은 바로 이 오만이라고 하겠다. 사병집단으로서 언제나 최고임을 자부하고, 연합군을 자신보다 약하다고 생각한 방심이 허를 찌르게 만들고 이는 자신들의 멸망으로 이어지게 된다. 적과 싸울 시, 적을 방심하게 하려면 적의 책략에 스스로 말려들게 하는 방법이 최고이다. 자신이 쓰는 책략에 열중한 나머지 적의 책략을 보지 못한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타격을 맞게 된다.

용장산성에 올라 그 당시 상황을 생각해보며 많은 상상을 하였다. 이곳에서 죽어갔을 여러 군사들과 희생된 백성들……. 그들의 넋을 잠시라도 느낄 수 있었다.

▲ 용장사. 유형문화재 제 17호로 지정된 용장사 석불입상이 있다고 한다. 시간 관계상 들어가서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게 아쉽다.
ⓒ 송영대
용장사에는 유형문화재 제 17호로 지정된 용장사 석불좌상이 있다. 그러나 이곳에는 시간 관계상 가지 못해서 매우 아쉬움이 따른다. 이들은 용장산성을 쌓을 때 조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민중들의 삶의 애환과 바람이 깃들지 않았을까? 이 석불좌상은 약사여래라고 하는데, 약사여래에게 기도를 올리면서 자신의 병과 함께 몽골로 인하여 골병이 든 고려에 대한 애환에 눈물을 흘렸을 민중들도 있었을 터…….

시간이 많았으면 좀 더 훑어보았지만 바쁜 일정으로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비록 아쉬움은 많이 남았으나 조상의 넋을 알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곳에서 피를 흘리며 싸운 삼별초와 동포들과 싸워야 했던 고려의 관군들, 자의인지 타의인지 외지의 전쟁에서 희생되어야 했던 몽골의 군사들, 그리고 그 와중에서 희생된 민초들의 넋을 기린다.

태그:#용장산성, #배중손, #김방병, #삼별초, #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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