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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원의 종. 하늘 높이 솟은 저 종이 울리는 때는 식사 시간이다.
ⓒ 박민수
점점 파편화되고 개인화되어 가는 현대 사회의 흐름 속에서, 일상의 자그만 혁명을 꾸려나가는 집단들이 있다. 자신을 제대로 성찰하고, 관계의 소중함을 체험하며 유쾌한 탈주를 꿈꿔보는 이들. 어느 순간부턴가 현대의 그 흐름에 매몰되어 가는 나의 삶을 보며, 그들의 삶을 보고 느끼고 싶은 기행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첫 출발지로 충축 괴산의 평화원을 찾아갔다. - 기자 주

땡땡땡! 지금은 저녁 6시. 평화원의 종소리가 울린다. 논, 밭에서 일하던 평화원 가족들이 하나둘씩 옹기종기 사랑방에 모여들기 시작한다. 오늘의 식사당번은 소리님. 두루치기에, 각종 나물에, 김치에….

가족들 모두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식사를 시작한다. 식사 하는 동안 만개의 이야기 꽃이 피어난다. 다른 이들에 비해 발음이 부정확한 뭉치님. 그러나 평화원 가족들은 이제 뭉치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모두 알아듣고 잘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평화원 가족들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별칭'을 사용한다. 나이라는 허울을 없애고 서로 더 깊은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이다. 게다가 자신의 별칭에 자신의 모습을 담아보기도 한다. 한결님, 뭉치님, 예행님, 여울님, 소리님, 햇님 등 12명의 어른들과 3명의 아이들로 이루어진 평화원 마을의 식사시간은, 이들의 별칭 때문에 더 재미있고 유쾌해 보였다.

평화를 이룩하자

충북 괴산군 청천면. 시골의 한적한 곳에 조그만 평화원이란 간판이 보였다. 평화원을 가기 위해서는 여러 지역을 거쳐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서울에서 청주로, 청주에서 미원으로 가는 길에 탄 버스에서, 익숙하지만 이름모를 어렸을 때 들었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버스 아저씨와 주변에 탄 아주머니의 이야기에 괜스레 내 귓바퀴가 곤두서 그들의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었다. 마을의 골프장 이야기에, 마을 주민 이야기, 이웃집 땅 이야기…. 버스에서 흘러 나오는 옛날 노래에, 기사 아저씨와 할머니의 대화에, 알 수 없는 시골의 정겨움이 느껴졌다.

미원에 도착하여, 마중 나온 평화원 식구의 봉고를 타고 드디어 평화원에 도착했다. 평화원은 2003년을 첫 해로 시작한 세살배기 공동체이다. 그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평화원의 비전은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말씀과 묵상 그리고 정직한 노동과 땀을 통한 자급자족의 '개인의 평화'를 이루고, 자연과 생명 중심의 평화 농법으로 '땅의 평화'를 이룩하며, 또한 나누고 베푸는 사랑의 실천으로 '인류의 보편적 평화'를 구현하고자 한다.

평화원 공동체 원경선 원장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에서 공동체의 비전을, 아니 그의 삶의 자락을 살아왔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나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닌 내 이웃과, 나라와 온 인류 사회를 뜻한다"는 것이다.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선, 정신적 성숙과 더불어 '경제적 자립'이 꼭 필요하단다. 그러기에 평화원은 생산 공동체를 지향하고, 3년의 짧은 시간 동안 그들 삶의 울타리를 아직 다 완성하진 못했지만, 하나 하나 그들만의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하는 모든 평화원 식구들은 이 과정 하나하나에 농사꾼으로 참여하고 있다. 물론 거기엔 아흔 세살인 원경선 원장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 농부가 되어 평화의 사상을 배우고 있었다.

원경선 원장님은 공동체를 함에 있어 분명한 '뜻'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평화원 공동체의 그것은 바로 '평화'를 사랑하고 이끌어내는 것이다. 아직은 평화원의 부지가 많이 비어 있다.

하지만 하나 둘 비닐하우스들이 그곳에 들어서고 곳곳에 푸른 새싹들이 촘촘히 올라올 쯤엔, 아마도 평화원에서 길러낸 생명의 곡식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굶주린 자들에게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나눔의 생명 속에 평화가 깃들어, 그 평화가 곳곳으로 퍼져나가기를 평화원 식구들은 소망하고 있다.

평화원의 하루

오늘은 어린이날. 토요일이다, 공휴일이다 이건 농사꾼들에게 별 의미없는 말이다. 숙소가 마땅찮아 평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동막골(평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원경선 원장님의 집 이름)에서 잠을 잔 난, 아홉시에 있는 아침 작업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원장님이 운전하는 오토바이 뒤에 탔다.

아흔 세살의 어른이 스물 일곱살배기 청년을 뒤에 태우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그 풍경. 가히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뭐 어쨌든, 원장님의 탁월한 운전 솜씨로 난 무사히 동막골에서 평화 마을로 이동할 수 있었으니 그러면 된 거지.

평화원 전체의 살림을 이끄는 한결님이 가족들과 상의하여 그날의 작업을 배정한다. 그런데 웬걸, 원장님은 오늘이 어린이 날이니 아이들에게 선물로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란다. 주향이도, 태석이도, 근태도 약간은 찡그린 얼굴이지만 이내 찡그린 얼굴을 편다.

오늘의 주된 임무는 감자밭에서, 이미 난 싹을 비닐에서 꺼내어 숨쉬게 해 주는 거다. 농사일에 익숙지 않은 내게 하루 종일 쪼그려 앉아 비닐로 덮인 감자밭에서 싹을 찾아내기란 쉽진 않았다.

저 앞에 가는 한분 한분 가족들을 보며 한참 뒤떨어진 곳에서 외로이 그렇게 싹을 찾고 땀을 삐쭉 흘리는 내 모습이 많이 어설퍼 보였다. '차라리 힘으로 하는 일이라면 더 잘 할 수 있는데'라고 혼자 중얼거리며 말이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어, 조금 일찍 일이 끝났다. 이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 그래, 바로 노래다. 예행님은 평화원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가수다. 오늘도 어김없이 예행님의 노랫소리가 감자밭을 고요하게 울린다.

과거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노래라며 부르는 노래, 가곡, 노동가 등 그 장르를 가로지르며 부르는 예행님의 노랫소리가 끝날 때마다 우린 서로를 보며 기분좋은 미소를 살짝 드러내 보였다. 햇볕 쨍쨍하지만, 시원한 그늘에서 듣는 구슬프지만 정겨운 노랫가락. 그렇게 노랫가락이 흘러가며 평화원에서의 또 하루가 저물어간다.

한 길 가는 삶

▲ 평화원엔 두 개의 저수지가 있다. 그 중 평화원 가족들이 새로 만든 저수지이다. 간적접으로라도 자연그대로의 농사를 짓기 위해 평화원 가족들은 일부러 고생을 한다.
ⓒ 박민수
평화원엔 저수지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평화원이 세워지기 전부터 있었던 저수지이고, 나머지 하난 평화원 가족들이 직접 만든 것이다. 거기엔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는데, 평화원 가족들의 철학이 담겨 있기도 하다.

원경선 원장은 60년 동안 땅과 함께 살아오며 얻은 깨달음이 있다. "자연 그대로의 것이 가장 건강하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평화원에선 절대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이 의미는 직접적으로 뿌리지 않는다는 것과 동시에, 간접적으로도 그런 영향을 최소화시키겠다는 의지다. 이것이 바로 평화원에 저수지가 두 개인 이유이다.

평화원 뒤로 담배밭이 있고, 그 밭에선 여느 농가와 같이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농약과 화학비료로부터 나온 인위적이고 유해한 약품들이 땅과 물길들 속으로 스며들어가 평화원으로 들어오는 원래의 저수지에 함께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고 산 정상에서부터 그 담배밭을 돌아오는 물길을 만들어 저수지를 새로 만들었단다.

여울님은 "농부는 철저히 자연의 그 흐름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것이다"라고 했다. 계절의 순환에, 일조량과 강우량에, 바람의 세기와 방향에, 하나 하나의 자그만 자연의 변화에 우리의 삶을 맡기고 그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다. 항상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인간의 능력'을 강조하는 현대의 문명 속에, '물의 흐름과 함께 흘러가는 그 삶'을 사는 삶. 이게 '농부의 삶'이란다. 이렇게, 꿋꿋이 한 길 가는 삶. 평화원 식구들의 농사짓는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보였다.

공동체를 이루는 것, 죽어야 산다

▲ 평화원을 떠나기 전, 평화원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사진을 같이 찍었다.
ⓒ 박민수
한결님은 우리나라 유기농의 효시인 원장님께 농사를 배우기 위해 6개월 전 이곳으로 왔단다. 그런데 "더 많이 배우는 건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란다. 친분이 전혀 없었던 열다섯 사람이 같이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 서로 공동체에 참여한 시기가 다르고, 나이와 성별이 다르며, 무엇보다 서로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평화원에서 역시, 여느 사회와 마찬가지로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문제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 아닌, 갈등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 평화원의 예배 시간, 원경선 원장은 예수의 부활사건을 이야기하며, '죽어야 산다'라고 한다. "우리가 소비에 죽고, 욕심에 죽고, 개인의 이기심에 죽으며, 농약과 화학약품에 죽을 때, 그때 우리도, 공동체도 사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평화원 공동체는, 서로를 분리시키고 해코지하는 것에, 그리고 평화를 위협하는 것에 죽는 것을 연습하고, 그러기에 다시 사는 것을 체험하는 곳이란다.

평화원을 떠나오며...

이제야 나도 뭉치님의 이야기를 조금씩 알아듣기 시작했는데, 평화원의 족구 삼매경으로 빠져들었는데, 그 정듬과 평화원 식구들의 인사를 뒤로 한 채 평화원을 떠나와야 했다.

봄의 기운이 활개치는 5월. 마을이 사라져가고, 관계가 사라져가며, 그러기에 사람의 냄새가 그리운 시절. 전국 방방곡곡의 공동체를 방문하며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고, 짧지만 함께 살아가고픈 내게, 그 첫 번째 행선지로 평화원에 오게 된 운명은 축복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한국의 '공동체' 혹은 '마을'을 들여다 보고싶고, 그들의 삶, 관계, 그리고 그들의 고민을 따라 따라 나도 농부처럼 한 번 흘러가 보려 한다. 무엇보다, 내 일상에서 그 공동체들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를 한 가지 한 가지 실천해 나가는 자양분으로 삼아가면서 말이다.

태그:#평화원, #공동체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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