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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당 안의 나옹상. 뒤의 영정은 오른쪽은 나옹, 중앙은 스승인 지공, 왼쪽은 제자인 무학대사.
ⓒ 백유선
▲ 강에서 보트를 타고 바라본 신륵사 전경.
ⓒ 백유선

일요일에는 여행길을 나서기가 두렵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오고가는 길의 교통정체가 겁나기 때문이다. 오래 전 겨우 1시간 거리를 무려 5시간이나 길에서 씨름한 적이 있다. 그 때 이후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일요일엔 길을 나서지 않았다.

오랜만에 일요일(8일)에 길을 나서는 모험을 했다. 사전 준비도 없이. 철저한 준비를 해야 조그만 것이라도 놓치지 않은 보람된 여행길이 된다는 게 평소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준비없이 길을 나선 것은 '아무 이유 없이' 상투적인 여행의 틀을 깨고 싶었기 때문이다.

넘치는 차량들 사이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도착한 곳은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 주변에 영릉을 비롯해 명성황후 생가, 고달사 터 등 둘러볼 곳이 많은 곳이다. 차가 밀리지 않는다면 서울에서 1시간여 거리. 돌아오는 길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국도를 잘 이용하면 그 역시 어렵지 않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이미 여러 차례 들렀던 곳이다. 가본 곳을 왜 또 가느냐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곳이든 항상 같은 모습이 아니다. 시간과 계절의 변화는 여행자의 보는 눈도 변화시킨다. 때로는 한 번 찾아본 곳을 다시 들렀을 때 낯선 곳에서보다 더 많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절 앞마당은 강가... 굴레 씌워 용마 다스린 절

▲ 신륵사에서 내려다 본 남한강. 나옹의 다비 장소에 세워진 작은 탑이 강을 지키고 있다.
ⓒ 백유선
'신기한 굴레'라는 뜻을 가진 신륵사. 대부분의 절이 큰 산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드물게도 남한강의 큰 줄기를 끼고 있는 절이다. 이처럼 큰 강을 앞마당 삼은 절이 또 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신륵사는 이 강에서 날뛰며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용마'를 어느 대사가 굴레를 씌워 다스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대사가 나옹이라고도 하고 인당대사라고도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절의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그럴듯하게 부풀려져 전하는 것일 게다.

곰이 사람이 될 수 없으니 '단군신화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너무나 초보적인 반론이다. 역사에서 설화는 사실 그대로 보기보다는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중요하다는 사실 정도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신륵사의 설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강에서 날뛰는 용마가 무엇이겠는가? 더구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누구나 강의 범람으로 인한 홍수의 피해를 떠올릴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 어느 승려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제방을 쌓거나 하는 직접적인 노력이었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바로 풍수해를 막는 비보의 목적으로 절을 세우는 일. 이런 사실들이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신륵사라는 이름을 만들어지게 했을 것이다.

이 절이 처음 세워진 것은 신라의 원효대사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절이 그런 것처럼 고승을 원조로 삼고 있으나 뚜렷한 물증이 없으니 말 그대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만 생각하면 된다.

신륵사 대표 승려 나옹, 우리 아들을 웃겼다

▲ 개나리 사이로 보이는 신륵사 일주문.
ⓒ 백유선
▲ 나옹의 부도. 앞쪽의 석등, 뒤쪽의 비 등 3점이 각각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백유선
이 절이 큰 절로 거듭나게 된 것은 고려 말 공민왕의 왕사로서 이름을 떨치던 나옹이 이곳에서 입적을 했기 때문이다. 즉 신륵사를 대표하는 승려가 바로 나옹이다. 그래서 이 절에 오면 맨 처음으로 조사전과 나옹의 부도를 찾게 된다.

국보이지만 최근 수리를 해서 고졸한 맛이 나지 않은 조사전에는 스승인 지공과 제자인 무학의 영정을 배경으로 나옹의 상이 봉안되어 있다. 사찰에 승려의 상이 봉안되는 것이 드문 일이니 그 자체만으로도 주목받을 만 하다.

그런 만큼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겨우 초등 4학년인 둘째 녀석이 부처님이냐고 묻는다. 나옹이라고 알려주니 재미있다며 한참을 웃는다. 만화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고양이 이름이 '나옹이'란다.

웃음을 주고받으며 산길을 따라 계단을 오른다. 나옹의 종 모양 부도가 있다. 4학년이 알기에는 어려운 말로 적혀있는 안내판을 소리 내어 읽게 한다. 내용을 알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여행지에 가거든 안내판이나마 읽어보게 하는 습관을 갖게 하기 위해서다.

그때 한 무리의 여행객과 문화유산 해설사가 나타난다. 여러 차례 왔으니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많았지만 그래도 해설을 듣는 것은 재미있다. 모두 귀기울여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이 해설사가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담당자란 생각이 든다.

통도사나 금산사에 있는 계단 형식을 따르고 있는 이 부도는 그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더구나 양주 회암사를 비롯해 여러 곳에 그의 부도가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유명한 그의 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가 떠오른다. 잠시나마 마음이 정화된 느낌이다.

부처의 구원을 바라는 세종의 영혼

▲ 신륵사의 중심법당인 극락보전.
ⓒ 백유선
신륵사는 조선시대에는 주로 '보은사'란 이름으로 불리었다. 세종대왕의 영릉이 여주로 옮겨지면서 영릉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 된 후 세종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의미에서 보은사란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원찰이 되었으니 중심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이 봉안된 극락보전이다. 세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곁눈질을 좋아해서인지 중앙의 아미타불보다는 그 곁의 작은 탄생불이 눈길을 붙잡는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불교는 탄압을 받았다. 심지어 석가모니를 '석씨'라 표현하고 부처를 '불씨'라고 표현하기도 했었다. 그 탄압이 가장 심했을 때가 세종 때였다. 불교를 탄압했던 세종의 영혼이 결국 부처의 구원을 바라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불교의 수난시대인 조선에서 정작 왕릉에는 수호 사찰들이 지어지고 있었으니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내가 하면 로맨스요, 다른 사람이 하면 불륜'이라던가? 적절한 비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죽은 뒤의 세상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종교가 하나같이 극락이나 천당 그리고 지옥을 말하고 있다. 불교를 탄압하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극락이나 지옥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럼에도 원찰이 세워지고, 나아가 지옥에 빠질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명부전과 같은 전각이 세워졌다.

이를 보면 조선의 유학자들도 사후 세계에 대해서만은 확신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죽은 후의 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 제자의 물음에 "내일의 일도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고 대답한 공자의 말을 그들이 가슴으로 받아들였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어쨌거나 영릉의 원찰이 되는 바람에 신륵사는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불교 탄압으로 사찰들이 유생들의 유흥장이 되고 승려가 천민취급을 받던 시절이니 신륵사로서는 큰 원군을 만난 셈이다.

명부전의 십대왕을 본 아이가 "누구야?"를 반복한다. "저 분은 염라대왕이야. 나쁜 짓을 한 사람을 지옥으로 데려간단다. 알았지?" 겨우 이 정도가 아이 눈높이에 맞춘 설명의 전부일 수밖에 없다.

뱃사공을 지켜주던 '벽절'이기도 했다

▲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강월헌, 적묵당의 굴뚝, 바위를 기단으로 삼은 외로운 부도.
ⓒ 백유선
▲ 신륵사 다층전탑. 보기 드문 고려시대의 벽돌탑이다.
ⓒ 백유선
신륵사의 강가에는 벽돌로 만든 탑이 세워져 있다. 여러 차례 보수 과정을 거치느라 정확히 층수를 알 수 없는 탑이어서 '신륵사 다층전탑'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탑이 세워지는 일반적인 자리인 법당 앞이 아니라 강가 언덕 위에 세워져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래서 흔히 이 탑이 한강의 홍수를 막기 위한 비보의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되고 있다. 즉 한강에서 날뛰던 용마의 굴레 역할을 하기 위해 세워놓았다고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탑 근처의 강은 물길이 휘어지면서 소용돌이가 발생하여 사고가 잦은 곳이었다. 한강을 오르내리던 뱃사공들은 이 벽돌탑을 그 표지로 삼아 뱃길을 조심했다. 그래서 신륵사는 벽돌탑이 있는 절이라고 하여 민간에는 '벽절'이란 이름으로 오히려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벽돌탑 아래 나옹의 다비 장소로 알려진 곳에는 작은 탑과 세워져 있고, 그 곁에는 '강월헌'이란 이름의 누각이 세워져 있다. 그곳에 오르니 강바람이 시원하다. 조용히 흐르는 남한강의 물줄기는 햇빛에 아롱거린다. 아마도 신륵사의 최고의 멋은 바로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정취일 것이다.

바로 아래쪽으로는 한강 수운의 중간 기착지인 조포나루가 있던 곳이다. 충주까지 오르내리면서 물자를 운반하던 많은 범선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순간 아이의 눈이 갑자기 반짝거린다. 강에 떠있는 오리보트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범선이 사라진 그 자리를 지금은 모터보트와 오리보트가 대신하고 있다.

이제 아이의 목표는 하나로 정해졌다. 녀석의 마음을 오리보트가 단번에 사로잡아 버린 것. '저 부처님은 누구야?' '저게 뭐야?'를 묻던 그 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아이들과 이곳에 올 때는 강변의 벽돌탑과 강월헌에 오르는 것이 마지막이 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강에 떠있는 오리보트에 정신이 팔려 절에 대한 관심을 잃기 때문이다.

뱃놀이를 고집하는 아이의 손에 이끌려 결국 오리보트를 탄다. 강에서 보는 신륵사는 새롭다. 멀리서도 그 모습이 당당한 벽돌탑을 보면 가히 벽절이라 부를 만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용마가 날뛰던 강물은 고요하지만 이제 푸른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절의 전경이 신선해 보인다.

아이를 바라본다. 이 녀석에게는 무엇이 기억될까? 겨우 4학년이니 많은 것을 기대하고 싶지는 않다. 아마도 신륵사를 떠올릴 때면 고양이 '나옹이'와 강에서 탄 오리보트의 추억만이 남게 되겠지. 아빠의 따뜻한 눈길도 함께 기억하려나?

▲ 옛 조포나루는 지금은 오리보트와 모터보트를 타는 장소가 되었다.
ⓒ 백유선

덧붙이는 글 | <나만의 여행지>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여행, #신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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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콘서트>, <청소년을 위한 한국사>(공저), <우리 불교 문화유산 읽기>, <한번만 읽으면 확 잡히는 국사>(상,하)의 저자로 중학교 국사 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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