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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롱 계곡의 정상인 우차이츠 측면 관망대에서 바라 본 우차이츠 전경.
ⓒ 모종혁

나와 홍현진 PD는 닝마딩진의 할머니가 두 명의 남편을 둔 이유가 궁금해졌다. 사정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지만, 티베트 일처다부제에 대한 관심은 남의 집 가정사까지 캐어묻게 했다. 딩진을 잠시 쫓아다니면서 할머니에 대해 이것저것 묻자 소년은 묘한 웃음을 남기면서 어디론가 달아났다.

말을 얼버무리는 딩진의 태도에서 집안 이야기를 타인에게 숨기고 싶어하는 것을 느꼈다. 홍 PD는 좋은 방송소재감을 만나 할머니의 스토리를 더 캐물을 것을 재촉했지만 나는 소년의 반응을 전해주며 이 선에서 끝낼 것을 제의했다. 홍 PD 또한 소년의 마음을 이해하고 흔쾌히 받아들었다.

@BRI@시청자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아쉬운 소재를 날아갔지만 우리는 티베트 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맛볼 수 있는 것이 더욱 즐거웠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딩진의 어머니와 할머니는 불청객을 위해서 '빠바'라는 빵과 수유차(Tibetan butter tea)를 내놓으며 따뜻한 친절을 베풀었다. 양해도 구하지 못한 채 카메라를 들이대며 촬영하는 우리의 작업을 미소로써 이해해 주었다.

나 역시 그들 가족을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집안에 카메라가 없다는 딩진의 말에 디지털카메라를 꺼내어 닝마처린의 가족을 열심히 찍어주었다. 여행에서 되돌아 간 뒤 사진을 보내주고, 촬영한 내용은 한국 TV에서 관련 프로가 방영이 된 후 DVD 타이틀을 보내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 내가 사진을 찍어준다고 하자 닝마처린 부인은 아이들을 세수시키고 머리까지 단정히 빗겨주었다.
ⓒ 모종혁
나를 감동시킨 닝마처린 가족의 깊은 인정

주변 사위가 어두워지자 송판에 볼일보러 나갔던 닝마처린과 두 명의 할아버지가 돌아왔다. 말이 아닌 경운기를 타고 온 것이 조금 의외였다. 말보다 오토바이를 즐겨 타는 오늘날 티베트 젊은이들처럼 문명의 이기가 여기 산골까지 스며들어온 듯 했다.

그들에게도 특별한 양해를 구할 필요가 없었다. 멀리 한국에서 왔다는 두 불청객의 방문을 닝마처린과 두 할아버지도 순박한 웃음으로 반겨주었다. 생전 처음 보는 듯한 HD 카메라를 조금 낯설어하는 듯 했지만. 닝마처린도 다행히 간단한 중국어를 구사해서, 나는 그에게 우리 방문의 목적을 전했다.

어른들이 돌아오자 닝마딩진의 고모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닝마처린의 부인과 딩진이 '이모'라고 부르는 여성은 저녁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손님이 왔다고 특별한 음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지만 찬거리만 네다섯 가지를 준비하는 듯 싶었다.

▲ 닝마처린과 닝마딩진 부자. 집안에서 유일하게 중국어를 구사한다.
ⓒ 모종혁
우리와 얘기를 나누던 닝마처린이 깜짝 잊은 게 있다면서 자리를 비웠다. 잠시 뒤 두 손에 술을 들고 돌아왔다. 가지고 온 것은 티베트인들이 손님이 왔을 때 내놓는다는 칭커(靑顆)술. 닝마처린 가족의 세심함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우리 겨레의 옛 식사풍습처럼 남자들과 부녀자들이 따로 상을 차려먹는 닝마의 가족. 기름기가 적고 고소한 티베트 음식은 맛과 냄새가 최고였다. 계속 돼지고기 음식을 권하는 두 할아버지의 자상함과 술병을 하나 더 가져온 닝마처린 덕분에 우리는 과식에다 대작까지 했다.

말에 의지하여 오른 힘든 산길에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홍 PD의 잔까지 벌컥 마신 탓일까. 술기운이 조금 도는 가운데 닝마처린 부인이 준비해준 방으로 돌아간 우리는 다시금 감동했다.

침대는 새 것으로 보이는 금침으로 정결히 단장되어 우리를 맞이했다. 멀리에서 온 손님을 정성들여 맞이한다는 티베트인들의 문화와 인정이 마음 속 깊이 새겨졌다.

▲ 슈에산량에서 찍은 일출. 마부 마씨는 슈에바오띵 산줄기를 타고 오르는 일출을 보는 것은 1/10 비율이라고 했다.
ⓒ 모종혁
갖은 고생 끝에 해발 4200m에서 일출을 찍다

다음 날 새벽 4시 반, 하늘에서 간혹 보이는 둥근 달과 별들을 제외하고 한 줄기 빛조차 없는 산길을 말에 의지해 나섰다. 우리에게 특별난 체험과 따뜻한 접대를 해준 닝마처린 가족에게 조용히 인사를 하고 다시 일을 위해 새벽길을 겁없이 나선 것이다.

전날 송판 트레킹 전문업체인 '해피 트레일'에서 노련한 마부들은 어두운 새벽길에 산길을 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수차례 경고했다. 하지만 우리는 해발 4200m의 슈에산량(雪山亮) 앞 산맥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꼭 촬영해야만 했다.

이미 10일째 되는 취재 일정에 지칠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엄청난 위험 부담까지 안으면서 새벽길을 가르는 나와 홍 PD의 걱정거리는 오직 하나였다. 과연 날이 맑아 일출을 찍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마부 마치취안은 "슈에산량 앞에 자리잡은 슈에바오띵(雪寶頂)은 해발 5588m로 산세가 험준하여 봉우리가 첩첩하여 일출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이 1/10"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주술을 걸듯, 맑은 날에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생각만을 머릿속에 주입시켰다. 어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가파른 산길, 좁은 산길 바로 옆은 천 길의 낭떠러지, 구불구불 산길을 말에 기대어 오르는 세 명의 초췌한 행색의 사내들. 인적없는 어두운 산길이 오히려 고마울 정도였다.

한 두 시간쯤 말을 타고 갔을까. 날이 조금씩 훤해지면서 저 멀리 사람이 놓은 길의 정상 부분이 보였다. 떠날 때만 해도 구름이 잔뜩 꼈던 하늘도 파란색으로 바뀌었다.

슈에산량 정상에 도달하자 체감온도는 영하 5도를 오르내렸다. 우리는 두 대의 카메라를 각기 다른 지점에 설치한 뒤 촬영 준비를 들어갔다. 7시가 좀 못 된 시각, 저 멀리 슈에바오띵 산줄기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몸을 가누질 못할 피로와 졸음이 한 순간에 날아간 순간이었다.

▲ 멀리 산중턱에서 바라본 황롱 전경. 황롱 계곡 위에 자리잡은 설산의 눈은 만년설이다.
ⓒ 모종혁
도교사원으로 바뀐 라마불교사찰 황롱사

마씨는 보기 힘든 슈에산량에서의 일출을 촬영까지 하는 우리가 행운아라고 했다. '글쎄, 위험을 무릅쓰고 일출을 찍겠다는 신념으로 새벽길을 나선 우리를 하늘이 어여삐 여겨서겠지….' 40여분 일출 장면을 찍은 우리는 다시 말을 몰아 황롱(黃龍)으로 내달렸다.

황롱은 1992년에 지우자이꺼우(九寨構)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2000년에는 UN이 규정한 생물권보호구로 지정됐다. 중국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자연풍광 중 하나다. 길고 깊은 계곡 속 티베트인들이 사는 아홉 채의 마을이라는 지우자이꺼우와 달리 황롱은 슈에바오띵 동북쪽 계곡에 집중되어 있다.

황룡 입구의 해발은 3160m, 정상인 우차이츠(五彩池)는 3560m로, 높낮이가 400m에 달한다. 입구에서 정상까지의 길이는 대략 15㎞로인데, 작년 9월에는 입구에서 중간까지 도달하는 케이블카가 건설됐다. 문명 이기로 고산병의 위험은 줄어들었지만 케이블카를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원시산림이 훼손된 것은 두말 할 나위 없다.

황롱의 '사절'(四絶)은 흔히 만년설로 뒤덮힌 설산, 그림같은 절경이 자리잡은 협곡, 울창한 원시림, 다양한 빛깔의 연못 등을 가리킨다. 여기 큰 것은 두 개밖에 없지만 크고 작은 폭포도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4년만에 다시 찾은 황롱의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내가 2000년 어머니와 함께 협곡을 오르던 나무다리도 변화가 없었다. 단지 관광객이 3~4배는 더 늘어난 점, 외국인들의 모습이 더 많이 눈에 띄는 점이 달랐다. 내가 1997년 처음 황롱을 찾았을 때 그 곳을 찾는 한국인은 1년에 손가락 꼽을 정도였지만, 지금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중국 관광명승지로 바뀐 것도 큰 변화다.

정상 부근인 우차이츠 앞에 서있는 사찰 황롱사에 도착하니, 또다른 미묘한 변화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나라 때 세워져 400여년의 역사를 지닌 황롱사는 본래 5개의 전각과 18나한조상이 있던 불교 사찰이다. 본래 황롱사를 세운 것은 명 장수였지만, 오랫동안 황롱 일대가 티베트인들의 거주지였던 탓에 라마불교 사원으로 변했다. 헌데 지금 황롱사는 도교사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 작은 연못들이 서로 아름다움을 뽐내는 듯한 정옌차이츠(爭艶彩池). 황롱의 연못은 지질 구성이 협곡지층으로 연못 밑 광물 성분이 각기 달라 연못의 물빛도 서로 다른 빛깔을 낸다.
ⓒ 모종혁
감사편지와 선물을 보내온 닝마처린 가족

도교는 중국인들의 민족종교라 할만큼 중국에서 발흥하여 발전한 종교이다.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 의해 불살라지고 파괴된 황롱사가 복원되고 중건까지 한 것은 좋았는데, 전혀 연관이 없는 도교사원으로 변했다니….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지방사료인 <송판현지>(松潘縣志)를 인용, "원래 슈에산(雪山)사였던 황롱사에 황롱진인(眞人)이 여기에서 도를 닦은 뒤 오늘날과 같은 명칭으로 바뀌었다"는 말도 안 되는 전설과 설화를 가져다가 이름을 바꾼 점이다.

원래 황롱진인이 황롱 일대에서 산신령과 같은 존재로 받들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도교와 연관됐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더욱이 한 산골에서 전해져오는 전설 속의 인물 이야기를 끄집어내 엄연히 라마불교사찰이었던 황롱사를 도교사찰로 만든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온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인 황롱에서 티베트 및 라마불교의 역사를 지우는 듯해서 기분이 씁쓸해졌다. 산하는 그대로이되 역사가 바뀐 현실, 어쩌면 오늘날 티베트와 티베트인들이 처한 현실이 황롱사와 같을 것이다.

계절이 변하고 해가 바뀐 오늘, 내가 지난 작년 가을 추억을 다시금 떠올리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며칠 전 닝마딩진이 한 통의 편지와 티베트풍의 목걸이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나는 약속대로 여행 후 닝마처린 가족에게 사진을 보냈고, 한국에서 방송된 프로의 DVD 타이틀을 포장해서 급송으로 전해주었다. 그 뒤 송판에 볼일보러 나온 닝마딩진은 내게 고맙다며 감사의 전화를 걸어왔다. 집에 DVD 플레이어가 없어서 당장 DVD 타이틀 틀어 볼 수 없다는 아쉬움과 함께.

이번에 보낸 편지에는 드디어 DVD 플레이어 구입해서 내가 보낸 <걸어서 세계속으로: 중국 쓰촨성> 편을 재미있게 보았다는 것이다.

편지에는 딩진이 대신 적은 두 할아버지와 할머니, 닝마처린, 두 어머니(딩진이 이모라 부른 여성은 원래 닝마처린의 또다른 아내였다. 즉 닝마처린은 자매인 두 아내와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의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닝마처린 가족은 자신들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를 남겨준 내게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기회가 생겼을 때 다시 자신들의 집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 우차이츠 상단에서 바라본 우차이츠와 황롱사. 황롱사는 중국정부가 지방 역사를 왜곡한 현장이기도 하다.
ⓒ 모종혁
여행은 체험하고 사색하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

나는 지난 10여년동안 중국 곳곳의 숨은 오지와 비경을 찾아 길을 나섰다. 그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헤아릴 수 없는 따뜻한 인정을 체험했다. 닝마처린 가족의 친절도 그 중 하나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나는 내 조국보다 50배는 더 크고, 13억 인구가 대지 구석구석까지 사는 중국 땅을 다 찾아다닐 수 없을 것이다. 중국 56개 민족들의 각기 다른 삶의 향취와 문화의 다채로움을 접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내가 열린 마음으로 드넓은 대지를 접하고 열린 손으로 발이 닿는 곳의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때, 내 여행길은 언제나 깨달음으로 충만했다. 10일 동안 무슨무슨 코스 정복이 아닌, "왔노라, 보았노라, 찍었노라"가 아닌, '우리끼리' '우리만의' '우리를 위한' 여행이 아닌 열린 사고와 마음으로 떠나는 현지인과 함께 하는 여행. 나는 그 여행길에서 언제나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나고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그렇기에 나 혼자 떠나는 여행은 동반자가 없어도 언제나 즐겁다. 길 위에서 나는 또다른 중국, 또다른 중국인들을 만나면서 이 거대한 나라를 이해하고 체험한다. 오직 사진 찍고 즐기는 여행이 아닌 체험하고 사색하며 나 자신을 돌아보는 여행. 이제 당신이 떠나시지 않으렵니까?

▲ 오염되지 않은 해발 3000m 고산지대에만 사는 야크와 그 위에서 사진 찍기 바쁜 관광객들. 이런 사진 찍기만이 여행의 추억을 남기는 방법일까.
ⓒ 모종혁

태그:#송판, #황롱, #불교사찰, #도교사원, #닝마처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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