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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신학기를 앞둔 지난 1월부터 두어 달 동안 전국적으로 비싼 교복값이 문제가 되었지만 아직 그 해결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공동구매나 교복값이 내리기를 기다려 오는 5월 하복을 입을 때까지 사복을 착용하는 학교도 더러 있는 것 같다.

알고 보니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교복을 직접 판매하는 전국 각 지역대리점이나 매장의 탓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이들에게도 문제나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거대 교복업체들이 교복값을 서로 짬짜미나 하지 않았는지, 본사→지역대리점→매장→소비자에게로 이어지는 유통 구조상의 문제는 없는지, 미필적 고의로라도 교복값이 이토록 비싸진 데 대하여 교복관련 업자들의 마케팅 과정의 문제는 없는지, 문제가 있다면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 해결하거나 개선해야 할 일은 없는지, 정부 관련부처에서는 지금쯤 그 문제가 검토되고 답변이 나와야 할 시점이 아닌가?

@BRI@국민 생활에 불편부당한 문제가 있으면 당연히 해결책이 나와 국민들의 피해를 최소화시키는 것이 정부의 최소한의 존재 이유들 중의 하나다. 더욱이 이 문제는 2세 국민들 즉, 배우는 학생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중요한 교육 문제이므로 최대한 신속하게 그 방책이 나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요즘 아이들의 우리 사회에 대한 불신은 심각한 수준이다. 그것은 곧 우리 어른들에 대한 불만이요,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부정과 부패의 구조에 대한 불신으로 보아야 한다.

지난해 한국투명성기구 대구본부가 대구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의 결과를 보면, 설문 응답자의 86.6%가 우리 사회를 '부패한 사회'로 보고 있다. 이는 물론 2002년 9월에 실시한 동일 설문 문항에 대해 응답 학생들의 95.7%가 동일한 답변을 했던 것에 비해 어느 정도 완화된 수치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를 불신할 때, 어찌 전쟁이 일어날 때 나라를 지키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겠으며, 정부가 주도하는 민족 화해와 통일을 간절히 소망하고 염원하겠는가. 그런 점에서 어른들의 정장 가격보다 훨씬 더 비싼 학생 교복값은 정부가 나서서 분명히 해결토록 해야 한다.

필자는 세계에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 일부와 서구의 소수의 나라들의 사립학교에서만 학생들에게 교복을 입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호주는 교복의 수요자가 학생인 점을 고려하여 교복값을 기업체에 맡겨 두지 않고 정부에서 특별히 통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학교마다 각양각색인 교복 시장에 우리나라 대기업들처럼 밀고 들어와 중소업체들을 쪽박 차게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교복제도가 있는 나라들 중 더러는 정부에서 무료로 주거나 교복값을 지원한다고도 한다.

교복값 문제는, 그간 우리 대기업들이 얼마나 자본의 세속적·천민적 속성에 물들여져 있는가, 우리 교육과 정치가 사회 전반의 급격한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른바 교육지체, 정치지체 현상에 머무르고 있는가를 드러내 주는 좋은 본보기로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시기는 소위 지구촌 시대이며 세계화의 시대다. 지식기반사회라거나 지식정보화사회, 어느 이름으로 불러도 좋겠지만 거역할 수 없는 것은 산업 기술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문화적 다양성의 그 도저(到底)한 영향력이다.

우리 국민은 불과 1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패턴의 급격한 변화를 요즘 겪고 있다. 이는 자가용 자동차의 급격한 증가로 인한 이동수단의 다양화와 신속화에서부터, 초등학생에서 7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누구에게나 휴대폰은 이제 일상적 통신수단이 되었다. 이동수단이든 통신수단이든 인간 생활의 편리와 편의를 가져다주는 데 대해선 그 누구도, 아무래도, 문명의 이기를 결코 탓할 수 없다.

요즘 학교의 아이들은 틈만 나면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며, 쉼 없이 휴대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이 그들의 익숙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런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학교마다 교실마다 천편일률적인 색상과 형태의 교복을 입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다. 차라리 '어른들의 의도'대로 몸에 맞는 단정한 차림이거나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딱딱한 책걸상에 앉아 버티는데 편하기라도 한 옷이면 그래도 교복의 효용성을 부정할 수 없을 테지만 말이다.

교복 업체들은 자신들의 제품을 선전하는 마케팅 전략의 하나로 '기능성 교복'이란 미명 하에 '우리 제품은 상의가 짧다, S라인이 살아있다'는 식으로 아이들의 관심을 끌어야 하기에, 소위 교복 3사의 패션 교복은 색깔과 형태만 같을 뿐 시방서(示方書)의 세부 기준을 어기기 십상이다.

여학생의 경우 상의의 길이를 줄이거나 허리선을 살리기 위해 품을 줄이고, 일부 남학생의 경우 바지의 폭을 줄이는 게 유행이어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생활을 하는데 사복보다 오히려 불편해졌다. 허리를 구부릴 때 허리춤이 다 노출되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게 다반사다.

그것뿐인가. 도시 지역의 경우 한 교실에 17만원짜리 중소기업체의 교복과 57만원에 이르는 대기업체의 최고급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생활하는 현실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 가지는 열등감과 무력감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이만하면 원래 교복 착용의 취지가 무색해 진 게 분명하다.

돌이켜 보면, 전두환 정권은 초기 자신들의 권력의 부당성과 폭력성을 은폐시키고, 국민들을 호도하기 위한 유사(類似)민주주의적 조치의 하나로 당시는 꽤 획기적인 '교복자율화 조치'를 단행한 바 있다. 하지만 시행 5년이 채 못 되어 방과 후 유흥장 출입 단속을 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폐지되고 말았다.

당시는 어떠한 토론 절차와 국민적 합의 과정도 없이 문교부의 일방적 발표로 시행되었다가 어느 날 문득 폐지된 셈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교복을 자율화할 때는 각종 교육적 고려가 무성하다가, 폐지될 때는 어른들의 편의주의 하나로 그간의 모든 교육적 고려를 일축해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은 일종의 '교육의 퇴보'였고, 어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가두어 두려는 비교육적 발상이었다고 회고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군부정권 시절에는 남자들의 머리 길이와 여자들의 치마 길이까지 자와 가위를 들고 단속에 나섰으니, 요즘 아이들의 다양한 패션 감각과 견줘보면 격세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다양화 다원화를 추구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면, 다소 부작용이 따르더라도 학생 교복을 자율화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궁극적으로 더 교육적이라고 본다. 이 말은 학교별로 교복을 입든 사복을 입든 그것까지 자율화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왜 아이들의 교복과 체육복을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시켜야 하는가. 유전인자와 성장환경이 천차만별인 저 아이들을 똑같은 색상과 형태의 교복을 입힌다고 국민 일체감과 평등의식이 제고되기나 하는가? 결국은 아이들을 타율성에 길들이는데만 일조하는 것은 아닌지, 한 때 중국집에 들어가도 자장면으로 통일시키려는 우리 어른들의 구시대적 사고에 저 아이들을 짜 맞추려는 과도한 욕심은 아닌지, 심사숙고해 보아야 한다.

획일화된 교복으로 '우후죽순이고 중구난방이어야 할' 저 아이들의 다양한 개성과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창의성, 무한한 상상력을 '획일화의 우리' 속에 가두려는 것은 아닌지, 재고해 보아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이 현실을 두고 패션 도시, '컬러풀 대구'를 운위하는 것이 우리 어른들의 지독한 자만이고 모순이 아니겠는가.

덧붙이는 글 | 정도원 기자의 카페는 http://cafe.daum.net/dowon2017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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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해직교사 詩人·한국작가회의회원 전교조 대구교육연구소장 교육민주화동지회 부회장 저서 : 『교단으로 돌아가면』 『우리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겨울나무는 외롭다』 『더 나은 교육은 가능하다』 『교육보다 교사가 먼저다』 『삼백예순날 하냥 외롭고 순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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