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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지리지에 따르면, 본래 대량주군(大良州郡)이라 불렸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부터 현재의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한 경상도 합천군(陜川郡)은 “기후가 따뜻”하고 꿀·밀·잣·종이·여우가죽·삵가죽·노루가죽 등의 특산품으로 잘 알려진 곳이었다.

또 <세종실록> 지리지는 이곳의 사찰인 해인사와 관련하여 “산세(山勢)는 천하에 뛰어났고 지덕(地德)은 해동(海東)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정수(精修)한 땅”이라고 극찬하였다.

@BRI@그런데 이 아름다운 합천 땅은 여러 가지로 세종 임금의 속을 썩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합천을 포함한 경상도 지방에서 수 차례에 걸쳐 지진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런 천재지변보다도 세종 임금의 속을 더 썩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왕명을 잘 받들지 않은 몇몇 합천군 관리들이었다.

세종 원년(1418)에는 합천군 감고(監考) 박번(朴蕃)이 기민(饑民) 구제에 힘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곤장 70대를 맞은 적이 있다. 박번이 “우리 합천에는 굶주리는 집이 1호밖에 없다”고 허위 보고한 일 때문에 왕명으로 곤장 70대를 맞은 것이었다. 새로 즉위한 군주의 애민 정치를 방해하는 행위였으니, 세종임금이 호된 벌을 줄만도 했다. 감고는 관아의 물품을 관장하던 관리를 말한다.

세종 22년(1440)에는 합천군수가 정면으로 왕명을 거역하여 왕이 직접 사태 해결에 나선 일도 있었다. 합천군 해인사를 보수하라는 중앙의 공문을 여러 차례나 받고도 합천군수가 고의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종실록> 세종 22년 2월 16일자에 의하면, 세종은 경상관찰사에게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렸다.

“합천군 해인사는 태조께서 지으신 곳이다. 본군(本郡)의 수령으로 하여금 훼손된 곳이 있으면 즉시 수리하도록 일찍이 공문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 모두 다 무너졌는데도 조금도 수리하지 않았다. 그러니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고, 그 무너진 곳은 간사승(幹事僧) 해회(海會)의 말을 들어서 차질 없이 수리하게 하라.”

여기서 “해인사는 태조께서 지으신 곳”이라는 말은, 해인사는 본래 신라 때에 세워진 곳이지만, 태조 이성계 때에 팔만대장경을 이곳에 보관하도록 한 이래 조선 왕실이 각별히 관심을 갖게 된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할아버지인 이성계 때부터 왕실이 애착을 가진 곳이라서 세종 임금도 특별히 신경을 썼던 듯하다. 그래서 합천군수에게 공문을 보내 사찰 보수를 명한 것이다.

아마 웬만한 군수 같았으면 그 기회에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사찰 수리에 공을 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웬일인지 합천군수는 왕명을 받들지 않았다.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는 사료 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도 사상적인 이유가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자신의 유학적 소양 때문에 불교 사원 보수를 거부했을 수도 있다. 임명권자인 왕의 명령을 거부했으니 그의 관료 생활이 이후에 어떠했을 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440년의 합천군수는 왕이 하라는 공사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징계를 받았는데, 2007년의 합천군수는 국민들이 하지 말라는 일을 억지로 하여 호된 비난을 받고 있다. 자신이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을 위해 국민과 시대의 분위기에 정면으로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왕조 국가가 아닌 국민 국가인 오늘날, 국민의 시대정신을 부정하는 공복(公僕)이 설 자리는 한 군데도 없을 것이다.

합천군수는 시대정신에 역행하여 일해공원을 사수하려 할 것이 아니라, 세종 임금처럼 가난하고 헐벗은 ‘백성’들을 챙기고 또 혹 ‘무너진 곳은 없는지’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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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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