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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흐름에 따라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사회적 이데올로기나, 문중 또는 지역적, 정치적 영향에 의해 부각되기도 하고 때론 작아지기도 한다. 이같은 역사적 아이러니를 극명하게 대비해 볼 수 있는 곳이 고산 윤선도의 간척사업과 관련하여 그의 공적비와 사당이 세워져 있던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다.

훌륭한 옛 인물들은 보통 문중이나 지역민들에 의해 서원이나 사당(사우)에 모셔지는데 문중의식이 강하거나 유교적 전통이 강한 곳일수록 이러한 사당이 많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인물을 모시는 사당의 주인공이 바뀐 곳이 이곳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 유적지다.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는 고산의 간척사업을 기념하여 만든 사당과 기념비가 있었던 곳이나 지금은 대몽항쟁 장수로 알려진 배중손 사당과 동상이 들어서 있어 주객이 전도된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BRI@고산은 일찍부터 간척을 통해 황무지의 땅을 개간하여 입안(立案)을 받아 자신의 재산으로 만든 인물인데 고산의 적극적인 간척사업은 조선시대의 인구증가로 인한 토지의 부족, 임란과 호란등 양대전란으로 인해 양안(토지대장)이 갑자기 줄어들어 정부에서 적극 간척을 권장하거나 장시의 발달 등 사회적인 요인도 있지만 고산의 적극적인 개척(도전)정신도 무시할 수 없다.

그가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간척한 곳 중에 진도 굴포리와 완도 노화도는 대표적인 사례로 해남윤씨가의 간척은 국가사업이 아닌 민간에서는 최초라 할 만큼 고산의 조부인 윤의중(尹毅中)에서부터 시작된다. 해남윤씨가는 서남해안의 지역적 조건을 이용한 해언전(海堰田)개발이 대부분으로 당시 이러한 활발한 간척 덕분인지는 몰라도 재산(토지)이 많기로도 소문이 나있다.

<당악문헌>(해남윤씨문헌) 에 보면 윤선도의 조부인 윤의중이 조헌(1544~1592)의 비난 상소에 대하여 반박한 상소가 나오는데, 조헌의 상소는 윤의중이 크게 탐하여 장흥, 강진, 해남, 진도 등의 거의 모든 언전이 그의 소유라는 주장인데 윤의중은 원래 이곳은 자산(資産)이 있었고 그것이 불의로 취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고산과 해남윤씨가의 간척

우리나라 간척의 기원은 고려 고종 35년(1235년) 몽고침입으로 인해 방어 목적으로 연안제방을 구축한 것을 시초로 보고 있다. 1256년 고종 43년 원나라의 침략에 강화로 피신하였을 때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방을 쌓았고 그 이후에도 가뭄과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민간에서도 간척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해남윤씨가는 가장 선도적인 역할을 했던 집안으로 고산은 1640년(54세)에서 1660년(74세) 사이에 완도, 진도 등지에서 간척사업을 펼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때 완도군 노화읍 석중리에 130정보,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200정보 가량을 농토로 간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남윤씨가의 간척은 여러 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간척사업은 공재 윤두서를 통해 공재의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해남군 현산면 백포리에는 ‘자화상’으로 잘 알려진 공재 윤두서가 살았던 고택이 있다. <당악문헌>의 공재공행장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기록이 나온다.   

“어느해 심한 가뭄으로 그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때 공재는 백포만에 간척지를 개간하고, 염전을 만들어 종가 소유의 백포 뒷산(망부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소금(화염)을 구워 주민들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했다” 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다산은 공재 윤두서의 외손으로 학문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공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산은 1818년(순조18) <목민심서>에 "간척사업을 위한 방조제 및 배수문 축조 방법" 등 간척에 관한 기술을 수록할 만큼 간척에 관심이 많았다. 다산의 이러한 간척에 대한 기술은 고산을 비롯한 외증조인 공재 윤두서의 간척에 대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 고산이 간척을 한 굴포리 바닷가
ⓒ 정윤섭
<목민심서>의 일부를 보면 제방을 쌓는 방법이 기술되어 있다."제방을 쌓는 방법은 반드시 기중기를 사용하여 큰 돌을 운반하여야 한다. 또 조수를 막는 한 대를 만들어 조수 물머리를 감쇄시켜야 한다. 대개 조수의 기세는 멀리 대해로부터 밀려와서 제방을 정면으로 치면 큰 성이라도 무너질 것인데 작은 흙덩이 정도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무릇 제방을 쌓고자 하면 먼저 제방의 허리(물이 깊은 곳)를 정하고 이 허리에 5,6보 떨어져서 조수가 들어오는 입구에 맞추어서 먼저 한 대를 구축한다.”

수원성을 설계하고 축조하는데 큰 공을 세운 다산이 간척을 위한 방법에도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적용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해남윤씨가의 간척사업은 근대에 까지도 이어지는데 고산의 12대 후손인 윤정현(尹定鉉)도 1930년대 초반에 해남군 북일면 금당리에 15만평을 간척 하여 그 일대가 지금도 이 집안의 소유로 되어있다.

진도 굴포리 간척

굴포리는 진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조그마한 포구마을로 바닷가와 면하고 있지만 마을 앞으로는 꽤 넓은 농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의 일부가 고산이 간척했다는 농토이다. 이곳에는 고산이 간척하기 위해 쌓았다는 제방 둑 약 300여 미터가 남아 있는데 이곳에 약 200정보가량을 간척하였다.

이곳에는 수년전 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고산의 간척에 대한 은혜를 기리는 동제를 매년 정월대보름에는 굴포, 남선, 백동, 신동 마을 주민들이 모여 고산을 신위로 제를 지내왔다. 이곳에는 고산사당과 굴포신당유적비, 윤고산사적비 등이 세워졌는데 현재 고산사당은 없어지고 비만 남아있다.

고산은 60세(1646, 인조 24)때 진도에 유배되어 있던 백강 이경여와 시를 주고받은 것으로 보아 아마 이 시기에 진도에 잠시 머물면서 간척을 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하고 있다. 고산은 이곳 굴포리에 머물면서 경주설씨를 만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고산이 이곳에 원둑(제방)을 쌓으면서 생긴 일화(전설)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고산은 이곳에 제방을 쌓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때마다 무너지고 쌓으면 또다시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로 인해 깊은 시름에 빠져 있었는데 어느 날 제방을 쌓고 있는 곳으로 큰 구렁이가 기어가고 있는 꿈을 꾸게 되었다.

고산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새벽녘 사립문을 열고 나가 제방을 쌓는 곳을 보니 꿈에 보았던 구렁이가 기어가던 자리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었다. 고산은 이를 이상히 생각하고 구렁이가 지나간 자리에 제방을 쌓으라는 것이구나 하고 생각하여 그곳에 뱀의 지나간 형상대로 석축을 쌓도록 하였는데 그 이후부터는 둑이 무너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곳의 지형이나 조류의 흐름을 이용하여 쌓은 결과 무너지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곳에 있는 굴포신당유적비(屈浦神堂遺蹟碑)는 1986년 음 4월 18일 신당을 재건하고 신당유적비와 장승을 세웠다. 또한 고산윤공선도 선생 사적비(孤山尹公善道 先生 史蹟碑)는 굴포, 신동, 남선, 백동 주민 일동이 1991년 4월 6일 건립한 것이다.

▲ 고산의 사당이 있던 곳에 배중손 동상과 사당이 들어서있다.
ⓒ 정윤섭
배중손의 사당과 남도석성

그런데 지난 이곳 굴포리 고산사당에 이 마을 출신 동양화가인 백포 곽남배의 주선으로 지역민들에 의해 배중손의 사당과 동상이 세워진다. 배중손은 진도를 무대로 대몽항쟁을 벌였던 삼별초군의 장수로 여몽연합군에 의해 삼별초군의 중심 거점인 용장산성이 무너지고 쫓기는 몸이 되는데, 이중 김통정은 금갑진을 거쳐 제주도로 가지만, 임회면 방면으로 패주를 하던 배중손 무리는 이곳 굴포와 남도포에서 완전 섬멸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 굴포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 남도석성으로 배중손은 남도석성을 거점으로 하여 항전을 하려했는지도 모른다. 평지성인 남도석성은 현재 잘 복원되어 있는데 배중손이 대몽항쟁을 위해 성을 축조한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배중손과 윤선도! 그 역사적 실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곳에 배중손의 사당과 동상을 건립하도록 추진하였던 곽남배 선생과 지역민들은 삼별초라는 구국적 항쟁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고산이라는 한 인물의 자취를 억누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현재 잘 복원된 남도석성
ⓒ 정윤섭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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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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