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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10주 연속기획 '자전거는 자전車다-자동차와의 아름다운 공존을 위하여'가 5주째를 맞으며 '자출(자전거 출퇴근)'에 자연스럽게 동참하는 이들도 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문화평론가이자 스포츠 칼럼니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정윤수 기자의 '자출' 출사표를 소개합니다. <편집자주>
▲ 독일 레버쿠젠의 자전거 도로를 여유있게 달리고 있는 독일 시민들.
ⓒ 정윤수
▲ 독일 아우구스부르크 중심가를 달리고 있는 독일 시민들.
ⓒ 정윤수
자전거를 '새로' 샀다. 그동안 몇 번이고 내 일상의 가장자리에서 자전거들이 머물다 사라졌으니(누군가 슬쩍 가져가버린 일도 몇 차례였던가), 이번에도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미미하게 종지부를 찍게 될 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새로 자전거를 구입하면서 어떤 상념이 사라지지 않던 차에 마침 <오마이뉴스> '기획 시리즈'가 있어 적어본다.

누구라도 이 번잡한 대도시의 일상 속에서 온갖 소음과 체증에 시달리다 보면 "아, 자전거!" 하면서 뜻밖의 경이로운 음모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나는 지난 6월, 조금은 한가로운 광경을 보면서 기필코 자전거를 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유럽을 여행한다면 자전거를 타라

지난 6월, 나는 월드컵 취재 때문에 유럽의 몇 개 나라를 거쳐 독일에 머물렀는데 그때마다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글래스고·리옹·프랑크푸르트·아우구스부르크·라이프치히 그리고 베를린에서 렌터카를 몰고 낯선 곳을 방황하며, 비싼 주차비를 내거나 아니면 무거운 취재 배낭을 메고 뚜벅뚜벅 걸어다녀야 했다.

그때마다 유유자적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그쪽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래서 베를린 포츠담 광장을 취재할 때는 잠시 공용 자전거 임대 서비스를 이용해 보려고도 했다. 무거운 짐을 진 자로서 가장 용이한 취재 수단이 자전거라는 점은 지금 생각해도 현명한 판단이었다.

누군가 유럽으로 여행한다고 하면 비행기·요트·승용차·오토바이 등 그 무엇을 이용하여 그 도시로 가더라도 시내를 관광할 때는 자전거가 최고라는 점을 권하는 바이다.

그 쪽 문화유산을 둘러본다고 하면 대개 '구 시가지'를 방문하는 것일텐데, 아무리 넓게 잡아도 서울로 치면 광화문에서 남대문 정도를 오가는 일이므로 공용 자전거를 임대하면 하루 종일 쾌적한 여행을 할 수 있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자전거... '아 나도 사야겠다'

조금 사적인 얘기를 해도 된다면 사실 내가 반드시 자전거를 타야겠다고 진심으로 마음 먹은 것은 스위스에서 독일로 넘어가는 여정 사이에 있는 베겐즈라는 곳을 지나가면서 본 어떤 광경 때문이다.

▲ 스위스와 독일의 접경지 베겐즈의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어느 아버지와 딸.
ⓒ 정윤수
그 전날 나는 취리히에서 집에 전화를 걸어 일곱살 아이와 통화를 했다. 집을 나온 지 겨우 8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녀석은 "빨리 와서 놀아줘야 돼, 그리고 선물 사 와" 하면서 제 나름의 간절한 호소를 전달했다. 나는 그저 가벼운 마무리 인사쯤으로 여기고 말았다.

다음날 스위스에서 독일로 넘어가던 중 베겐즈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다 자전거를 탄 부녀를 보았다. 야트막한 언덕길이었지만 꼬마애가 무척 힘들어 했고 이를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가볍게 밀어주면서 아름답게 달리는 풍경이었다.

마침 차가 밀리는 바람에 나는 그 두 사람과 나란히 달리면서 꽤 오랫동안 구경할 수 있었다. 아이는 힘들어 하면서도 즐거운 표정이었고, 아버지는 아이의 반 바퀴 뒤에서 때론 격려하고 때론 등을 밀어주면서 페달을 밟았다.

언덕을 다 오른 다음에 그들은 밀린 차들을 뒤로 하고 숲으로 둘러싸인 주택가로 아주 가볍게, 그리고 아름답게 사라졌다. 나는 그때 꼭 자전거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지'에서 광화문까지 출근? 나도 할 수 있겠네

귀국 이후 한 달 동안 몇 가지 조사에 착수했다.

우선 자전거를 구입해서 뭘 할 것인가. 동네 산책로와 호수공원을 배회할 정도라면 굳이 인터넷을 검색하여 열성적인 전문가의 도움을 찾아낼 일은 아니지만 이른바 '자출', 즉 자전거로 한 번 출퇴근 해보자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것은 지난 3월의 사소한 착각에서 비롯됐다.

미 대륙을 자전거로 횡단하여 요즘 자전거 열풍에 경이로운 영향을 끼친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의 저자인 홍은택 <오마이뉴스 인터내셔널> 편집국장 때문이다. 이 분이 경기도 '수지'에서 광화문까지 자전거로 출퇴근한다는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던 것.

나는 지도를 펴서 수지와 광화문의 거리를 짐작해 보았고 그것이 내가 사는 일산보다 좀 더 먼 거리라는 것을 알았다. 하기에 일산에서 광화문까지 다녀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홍 국장의 말을 정성껏 들었다면 이런 결심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홍 국장의 집은 '수지'가 아니라 강남구 '수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거리가 격무에 시달리는 국제판 편집국장으로서 매일같이 자전거로 출퇴근하기 쉬운 거라는 건 아니다. 잠시 망설이긴 하였으나, '그렇다면 나도 일산에서 광화문을…' 하고 결심했다.

'자갈포장도로'에서 첫 퇴근

▲ 서귀포월드컵경기장 인근 자전거도로.
ⓒ 정윤수
그래서 한 달 동안 많은 조사를 했고 마침 7월 중순께 제주 FC 홈경기를 중계할 일이 있어 제주도에 갔다가 그 곳에서 자전거를 빌려 중문과 서귀포월드컵경기장을 오가면서 '체력 테스트'까지 해보았다. 할 만 했다.

보름 전부터는 코스를 정하기 위해 선배의 자전거를 빌려 서울과 일산을 몇 차례 왕복해보았다.

일산에서 행신과 수색을 거치는 코스가 가장 빨랐지만, 길이 험하고 복날 더위의 매연에 괴로웠다. 행주대교를 넘어 올림픽대로 쪽의 자전거 도로는 쾌적한 반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그래도 할 만 했다. 일단 광화문이나 신촌에서 강북 쪽의 자전거 도로를 이용하여 가양대교와 방화대교를 거쳐 행주산성으로 빠져나와 일산으로 들어오는 코스를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좀 더 철저하게 공부하고 답사를 했다면 이 코스를 이용하지 않았을 텐데 우선 급한 마음으로 자전거를 구입하기로 하였고 그리하여 지난 금요일 나는 마포에서 드디어 첫 퇴근부터 하게 되었다.

자전거로 산에 갈 일이 없고 험로 주행을 할 이유가 없으며, 출퇴근을 한다지만 솔직히 그것도 일주일에 한두 번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결국은 호수공원을 빙빙 돌게 될 지 모를 운명임을 예감했다.

그래서 나는 그 흔한 산악자전거 유형의 바퀴 대신 두께가 얇은 '로드 타이어'가 장착된 자전거를 타고 강북 강변도로 옆 자전거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30분 후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자전거 도로는 가양대교에 이르러 끝이 났고 그 다음부터는 비포장 흙길이었는데 장마 이후라서 딱딱하게 굳은 진흙과 자갈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 운명의 갈림길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던 몇 명의 동호인들이 내 자전거를 보고, "그 타이어로 힘들 텐데, 펑크날 지 몰라요" "그 쪽으로 계속 가면 길이 없는데" "그래도 갈 만하지 않나, 방화대교 밑에서 실개천 건너면 행주산성이잖아?" "근데 저번 장마로 거기 못 건너갈 걸?" 하면서 걱정을 해줬다.

일산으로 가려면 오던 길을 거꾸로 내려가 성산대교 쯤에서 수색으로 빠져야 하는데 첫날의 추억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어서 나는 일단 직진을 선택했다. 비포장도로는 엉망이었다. '험한 길을 갈 일은 없을 거야' 하고 로드타이어 자전거를 산 첫날, 나는 자갈과 진흙이 교배된 험로를 주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열아홉살, 끔찍하게 아름다웠던 자전거 추억

▲ 능곡과 일산 사이의 농로 위에서 잠시 멈춘 내 자전거.
ⓒ 정윤수
자갈로 포장된 길을 달리면서 오래 전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열아홉살 때, 처음 자전거를 타고 대구에서 서울까지 올라올 때, 소백산 죽령 넘어 단양에서 충주까지 달릴 때가 꼭 이와 같았다.

충주댐을 건설하고 난 다음 단양과 충주 사이의 길을 확장 및 포장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차라리 공사 이전의 흙길이 나았을 만큼 공사 와중의 비포장길은 악전고투였다.

죽령을 넘는데 3시간 이상 소모하는 바람에 나는 엄청난 장맛비 속에서 공사 중인 도로를 달리다가 인적없는 빈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고, 나는 폭우를 피해 들어오는 들쥐떼와 밤새도록 싸우다가 지쳐 잠에 들었다.

이듬해 나는 친구와 함께 서울에서 양양으로, 그 곳에서 대구·마산을 거쳐 전라도 목포와 광주를 거스르는 자전거 일주를 했다. 그러나 까마득히 높았던 죽령의 장렬한 안개와 충주댐 인근의 빈 집에서 들쥐떼와 하룻밤을 보냈던 끔찍하게 아름다웠던 추억만큼은 그 어디에서도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었다.

그러니 조금 전의 동호인들이 가볍게 갑론을박했던 가양대교와 행주산성 사이의 자갈 길은 사소한 찰과상에 지나지 않을 터. 그럼에도 십수년 만의 리턴 매치가 기묘한 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말처럼, 길은 갈 수도 있고 못 갈 수도 있는 그런 양 갈래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진흙과 자갈들 사이에 자전가 바퀴 자국이 선명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길은 갈 수 있는 길이었고 장마 때문에 불어난 방화대교 밑의 개천도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었다.

바윗돌 사이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나는 앞선 자들의 행로를 분주히 찾아냈는데, 방화대교와 자유로가 교차하는 거대한 교각들 밑으로 앞선 자들의 바퀴 자욱이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 지하철 공사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철강판 다리가 보였다.

인천공항과 서울을 잇는 지하철 공사용 트럭들이 이용하는 철강판 간이교는 불어난 물 때문에 마구 뒤엉켜 있어서 자전거를 들고 건널 수밖에 없었다. 자전거는 가벼웠고, 그래서 할 만 했다.

자전거와 나, 찰과상 뒤 딱지처럼 단단하게

▲ 방화대교 밑 공사용 다리 위를 건너고 있는 사람.
ⓒ 정윤수
험로 주행할 일이 없다는 이유로 선택한 자전거가 그 첫날에 자갈길을 달리고 무너진 다리 위로 번쩍 들려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아마도 이러한 사소한 찰과상이 나와 이 자전거의 인연을 꽤 오랫동안 이어줄 것 같았다.

미 대륙 횡단은 물론이고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 출퇴근'을 하면서 겪은 장엄한 에피소드에 비하면 아무 일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전거를 위로하기 위하여 담배 한 대 피워 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또 한 사람이 자전거를 들고 무너진 다리 위를 건너오고 있었다. 아마도 그 사람 역시 앞선 자들의 흔적을 좌표삼아 자갈 길을 달리고 또 달렸을 것이다.

창대하였으나 미미할지 혹은 미미하였으나 창대할지 모를 일이지만, 오늘처럼 새 자전거와 나의 인연은 수많은 찰과상으로 인하여 꽤 많은 고비를 겪을 것이다.

그래도 이 '교통지옥'의 대도시에서 자전거라는 자구책을 스스로 찾아내고 제 몸을 리트머스 시험지삼아 좀 더 안전하고 좀 더 인간적이며 좀 더 '지속가능'한 길을 찾아내기 위해 지금도 페달을 열심히 밟고 있을 앞선 자들이 있다.

나는 다만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들의 바퀴자국을 겸손하게 따라가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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