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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말,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선배들 중엔 육사 생도들이 많았다. 그 선배들은 방학 때가 되면 멋들어진 교복을 걸쳐 입고 가슴을 펴 절도 있게 직각 보행을 했다. 꼭 짝을 지어 발을 맞추면서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광주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특히 겨울방학 때 입던 외투는 모양이 특이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여학생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곁눈질할 만큼 인기 있었다.

그 선배들이 모교를 방문하면 특별대접을 받았다. 후배들을 모아놓고 사관학교를 소개하는 시간이 별도로 마련됐다. 목에 잔뜩 힘을 주어 좀 어색하기는 했지만 선배들은 차분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속 시원하게 사관학교에 대해 브리핑했다.

일단 합격만 하면 모든 것이 공짜요, 대학 졸업과 똑같은 학사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에 난 마음이 크게 쏠렸다. 특히 장차 나라의 지도자가 사관학교에서 육성될 것이라는 말이 매력적이었다.

대부분의 신생 독립국가들에서 그러하듯이 한국을 이끌 인재를 가장 조직적으로 훈련하는 기관은 사관학교뿐이라는 내용이 당시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고 대다수 국민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미래의 지도자들이 사관학교에서 양성되고 있다며 기대가 자못 컸다. 물론 엉뚱하게도 결과는 나쁜 방향으로 흘러버렸지만.

이런 시대 분위기에 따라 나도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꿈을 안고 육사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는 명분에 불과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혹시 연좌제(내 아버님은 해방 공간에서 남로당 간부로 일하셨다)가 불거져 사관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내 희망이 좌절되진 않을까, 그렇게 되면 아버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파하고 불안해 할까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불효 막급하고 이기적인 고집쟁이였다. 아버님께서는 내가 육사 시험에 응시하는 것을 반대하시지 않았다. 그러나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수건으로 머리를 싸맨 채 며칠간 끙끙거리며 누워계셨다.

당시 사관학교 출신에게는 이학사 학위만 수여됐고 입학시험에서도 수학과목 점수에 가중치를 부여했다. 난 꼼꼼히 따지고 계산해야 하는 이과 쪽엔 취미가 없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문과와 이과를 구분해 반을 편성할 때, 난 우리 학교에 특별히 설치되었던 사관학교 준비반을 택했다.

피말리던 신원조사의 기억

사관학교 시험은 매우 까다로웠다. 먼저 신체검사에 합격해야만 학과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1차 신체검사에 무난히 합격했던 난 필기시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당시 필기시험 합격자 명단은 <서울신문>에 공고되었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일이 왔다. 하얗게 눈이 덮인 새벽길을 뽀드득뽀드득 밟으며 조심스럽게 달려 <서울신문> 광주지국으로 갔다. 다른 친구들도 신문을 싣고 내려올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가 도착했고, 모두 떨리는 마음으로 숨죽여 신문을 펼쳐보았다.

거기 내 이름 석 자가 또렷이 있었다. 시무룩해 있는 친구들 모습을 잠시 잊은 채 난 소리쳤다. "합격이다! 합격!" 기쁨에 벅차 나는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이 보여준 것 같은 승리의 몸짓을 했다. 육사 합격 소식만큼 나를 들뜨게 한 시험 결과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이내 다시 걱정거리가 생겼다. 신원조회 때문이었다. 공식 문서상 신원조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특무부대원을 비밀리에 직접 파견해 철저히 확인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육사 신입생에 대한 신원조사는 엄격했다. 나는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낯선 사람 하나가 마을에 나타났다. 그 사람은 힐끔힐끔 담장 너머로 우리 집을 기웃거리다가 셋째 삼촌과 마주쳤다. 당시 삼촌은 광주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 헌병 중사로 근무하다가 제대하고 집에 머물고 있었다. 삼촌은 그를 집안에 들어오게 해, 소주 한잔을 나누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알고 보니 그는 삼촌의 논산 훈련소 입대 동기였다. 조상님들과 신의 도우심이 컸던지 모든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려 나갔다.

필기시험 합격자들은 마지막으로 사관학교에 모여 체력검정 및 면접시험을 치렀다. 나는 100m 달리기에서 제한시간인 16초에 겨우 턱걸이했다. 실망이 컸던 나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2000m 달리기에서는 '1등을 하지 못 하면 운동장에 쓰러져 죽겠다'는 각오로 뛰었다.

어찌나 빨리 달렸던지 난 2등과 한 바퀴 이상 격차를 내며 1등으로 들어왔다. 면접고사 시간에는 생도대장으로 맨 마지막에 앉아 있던 고 최주종 장군이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끄떡끄떡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분의 호의적인 표정은 '너는 합격'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집에 내려와 아무리 기다려도 정식 합격통지서가 오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불안하고 초조해 견딜 수 없었다. 아버님 일 때문에 합격이 취소된 것 아닐까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참다못해 가정교사를 하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다니고 있던 동기생에게 육사에 직접 가서 합격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후 동기생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다. 럭비 선수로 발탁되었으니 즉시 올라와 가입교하라는 내용이었다.

스파이크가 뭔지도 모르는데 웬 럭비 선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부랴부랴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사관학교 교무과로 갔다. 교무과의 한 장교가 내게 물었다. "자네 육상 선수인가? 스파이크는 가져왔나?" 2000m 달리기 기록이 너무 뛰어나 럭비 선수로 선발되었으니 가입교해서 운동연습을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는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를 매우 중요시하여 럭비와 축구 선수들을 별도로 선발, 맹연습시키고 있었다. 스파이크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2000m 기록이 좋은 건 순전히 악에 받쳐 뛰었기 때문이며 기본적으로 운동 감각이 둔하고 운동에 소질도 없어 럭비 선수를 하기 곤란하다고 말했다.

몇 가지를 더 물어본 그 장교는 내가 럭비선수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러면 일단 고향에 내려갔다가 나중에 다시 올라와 일반생도들과 함께 입교하라"고 했다. 나는 "급히 올라오라고 해놓고 이렇게 싱겁게 그냥 가라고 하느냐"고 항의했다. 그러나 "요놈, 아직 입교도 하지 않은 놈이 불평이 많다"는 장교의 한 마디에 나는 도망치듯 교무실을 빠져나와 곧장 고향 완도로 내려가야 했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육군사관학교 최종 합격 통보서를 받았다. 눈물 나도록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어둡고 괴롭던 인생의 긴 터널을 지나 이제 환한 희망의 길만 열리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면장님과 지서장님 등 유지들이 할아버지께 축하 인사를 드리러 찾아왔다. 농악 잔치가 벌어졌고 온 동리가 떠들썩한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할아버지께서도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평생 근엄한 모습을 흩트리지 않으셨던 어머님께서도 이날만은 고개를 숙이신 채 춤을 추셨다. 내 동생들은 음식 심부름하느라 분주했다.

난 입교하러 출발하기 전날까지 식사 대접받느라 이집 저집 다녀야 했다. 구름 위에 두둥실 떠다니듯 황홀한 날들을 정신없이 보냈다.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과 격려와 부러움을 내게 전했다. 인생 역전 드라마의 산 주인공이라도 되듯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칠순이 다가오는 지금까지 그분들에게 아무 것도 대접하지 못했다는 걸 통절히 후회한다. 그러나 나라와 겨레를 위한 내 마지막 사업인 평화재향군인회 일을 잘 하는 것이 그들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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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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