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학 입학 열흘 만인 2000년 9월 29일 영국 캔터베리에서 숱한 의혹을 남긴 채 사망한 고 이경운 군 시신 2차 부검이 사건 발생 6년 만인 오늘(23일) 국과수 해외파견으로 이뤄진다. 영국 당국은 이경운군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발표했으나, 유가족 측은 각종 의혹을 제기하며 의문사라고 주장해왔으며 <오마이뉴스>도 이를 몇차례 보도한 바 있다. 2차 부검을 앞두고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들을 몇회에 걸쳐 다시 정리한다. 이글은 세번째 글이다. <편집자주>
이번 기사에서는 이경운군이 사망하던 당일과 영국당국이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보고자 한다.

영국은 국내법에 따라 자연사를 제외한 모든 경우에 검시관 주도하에 부검을 하고 경찰 사고조사, 증인의 증언 등 전반을 고려해 종합적인 사인을 판단하는 사망심의회를 연다.

이경운군은 역과 교통사고에 의한 '다발성 손상'으로 사망했다는 게 이 사건에 대해 영국당국이 내린 현재까지의 결론이다. 2001년 1월16일, 도버에서 열린 사인심의회 내용을 보자. 아래 내용은 사망심의회 개회 후 검시 보조관 데이비드 케어가 사고 전반을 요약해 기술한 부분이다.

▲ 이경운 사인심의회 요약본(사본) 중 검시 보조관 데이비드 케어가 사고 경위를 서술한 부분. 고인은 도로에 걸어 들어와 버스에 부딪혀 쓰러지고 역과됐으며, 켄트 앤 캔터베리 병원 도착 당시 사망했고, 10월 2일 부검의 압둘카디르가 부검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붉은 박스 안의 내용은 사인심의회 요약본 중 검시관 리처드 스타트가 최종 사인을 판결하여 기록한 부분. "평결-사고사(Accidental Death)"라고 적혀있다.
ⓒ 박성진
"본 사망심의회는 켄트 대학 루더포드 컬리지 소속 이경운의 사망에 관한 것이다. 이경운은 17세로 1982년 10월 19일, 스페인 라스팔마스에서 한국인 부모 아래서 태어났다. 한국 국적을 지녔다. 이경운은 사망 닷새 전에 영국에 도착했다(유가족 주장은 열흘 전-필자 주). 이경운은 10월 29일 캔터베리의 세인트 조지스 플레이스에서 혼자 걷고 있었다. 운전사 트레버 선리가 운전하던 (차등록번호 LIW2746이며 스터리에 위치한 르헤인 트레블 소속) 버스가 도버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고인은 버스의 운전석 쪽 바로 앞, 도로로 들어섰다. 이경운은 부딪혀 쓰러졌고 역과됐다. 이경운은 켄트 앤 캔터베리 병원으로 후송됐으며, 도착 당시 의사 추아에 의해 사망이 확인됐다. (중략) 10월 2일 의사 압둘카디르가 부검을 실시했고 사인은 '다발성 손상'으로 제시됐다."

검시관 리처드 스터트는 부검의, 경찰, 운전사, 증인 증언 등을 종합 판단해 '교통사고에 의한 사고사'라고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교통사고' 처리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사실들은 유가족으로 하여금 영국 당국의 '교통사고에 의한 사고사'라는 결론을 쉽게 믿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2000년 9월29일 캔터베리에선 어떤 일이?

2001년 2월 19일, 동켄트(East Kent) 지청검사 러시브루크가 유가족에게 보낸 서한에 따르면, 경찰은 이경운 사건과 관련해 35명의 진술을 확보했다. 러시브루크는 이중 사고 순간을 목격한 사람은 6명이라고 말했다.

유가족이 입수한 증인 진술 내용 중 가장 정교하게 사고 순간을 말한 세 명의 십대 백인 소년들이 약 40미터 전방에서 목격한 증언에 따르면, 경운군은 차도에 들어섰고, 뒤를 돌아 (차가오는지)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뒤에서 오던 버스에 치여 쓰러졌다. 이어 버스 앞뒤바퀴에 의해 역과 됐다.

사고 차량 운전자도 사망심의회에서 "라운드어바웃(원형교차로)을 돌아 나오며 20마일 정도 속도로 운행 중이었는데 곧이어 머리가 보였다, 그 사람이 인도에서 걷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며, 그(경운군)를 피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목격자도 많고 "내가 이경운을 치었다"고 나서는 운전사도 있던 이 사건의 처리과정은 허점투성이였다.

▲ 영국 경찰이 유가족을 처음 인도한 사고장소와 번복한 장소. 두 장소의 거리는 약 40m가량이다. 이경운군 교통사고 증인으로 진술한 사람이 35명이라고 하고, 사고 순간을 목격한 사람도 6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경찰은 장소도 번복하고, 사고도면에 이경운군의 사망위치도 제시하지 못했다.
ⓒ 박성진
1. 오락가락하는 사고현장 … 경찰은 애초에 유가족에게 사고 현장을 인도하겠다고 약속했던 날보다 열흘이 더 지난 10월 14일에 유가족을 현장으로 인도했다.

경찰이 인도한 현장은 켄트 지역 신문인 <켄티시 가제트> 신문사 건물 앞이었다. 그러나 유가족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사망 교통사고가 발생했던 장소치고는 너무 깨끗했다. 으레 설치되게 마련인 사건 사고 안내판(목격자를 찾는 대형 게시물, 박스 참고), 사고 현장 표시, 영국인들의 관행인 헌화 흔적 등 아무 것도 없었다.

▲ 이경운 사건의 교통사고 도면. 일반 교통사고 도면과 달리, 유품(debris), 혈흔(blood), 버스(LIW2756)의 위치만 표시돼 있을 뿐, 정작 사망자의 위치가 나와있지 않다. 2001년 1월16일 인퀘스트에서 사고조사반 경찰 피브스는 당시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아 도면을 제대로 재구성할 수 없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 박성진
유가족은 경찰관에게 곧바로 의문을 제기하며, 유가족이 사고 현장으로 인도하기 이전에 주변을 직접 탐문해 밝혀낸 지점을 제시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무선 연락을 취했고, 곧이어 다른 경찰관이 현장에 나타나 유가족이 제시한 지점이 맞는다고 번복했다. 그 곳은 경찰이 유가족을 처음 인도한 곳과 약 40미터 가까이 차이가 나는 캔터베리 세무서 건물 세 번째 기둥 앞 부근이었다.

그렇다고 경찰이 두 번째로 말한 그 장소가 사고현장이라는 확증도 없다. 경찰이 작성한 이경운군의 교통사고 도면에도 이경운군의 사망위치가 누락돼있었기 때문. 이는 경찰 측이 경운군의 사고 위치를 확증하지 못했다는 것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 이경운을 후송한 앰뷸런스 기록. 015(?) 1A St.George's Place, Canterbury라고 사고현장 주소가 적혀있다. 경찰이 초기 사고장소로 지적한 곳과 위 주소는 약 40m가량의 오차가 있다.
ⓒ 박성진
경운군의 사고 현장을 조사했던 교통사고조사반 경찰 피브스는 2001년 1월에 열린 사망심의회에서 "현장에 도착했을 때, 경운군은 이미 후송된 이후였고 거리에 증인도 아무도 없었다"며, 경운군이 사고를 당한 위치가 어딘지 모를 수밖에 없다는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경운군을 후송한 앰뷸런스 차량의 환자 보고서에는 경운군 후송 당시 현장에 경찰이 있었던 걸로 나와 있다. 또 경운군을 발견한 위치의 주소도 적혀있다.

이경운군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운전사도 사고를 냈다고 말하고 있고, 앰뷸런스가 병원으로 이경운군을 이송했다고 말하고 있다. 경찰이 확보한 목격자 진술도
35건에 이른다. 그런데 사고 장소가 불확실하다니! 유가족의 질문은 한 가지다. 그렇다면 그 사고는 어디서 발생했는가.

한편, 유가족은 여러 차례 경운군 사망관련 병원 의료기록서를 열람하기 위해 캔터베리 병원을 찾아갔지만 의료기록을 볼 수 없었다. 병원 측에 따르면, 마게이트 소재 여왕 모후병원에 있다는 것. 시신이 이송되고 안치된 병원이 아닌, 그것도 캔터베리 병원과 차로 약 40분가량이나 떨어진 병원에서 의료기록서를 보관하고 있었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2. 사라진 운전사, 미심쩍은 사고버스 …영국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경운군이 사고를 당한 버스는 캔터베리근교 스터리에 위치한 르헤인 트레블 소속의 51인승 버스다. 이 버스는 스터리에 위치한 몽고메리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수송하는 통학버스였으며, 운전사는 마게이트에 거주하는 40대 후반 남성 트레버 선리였다.

이영호씨에 따르면, 유가족과 운전사가 첫 대면한 것은 이경운군 사망 후 약 2~3주가 지난 시점에서였다. 그것도 강력하게 항의를 한 후에 가능했다. 운전사 선리는 사인심의회에 등장해 자신이 경운군을 치였다고 인정했다. 원형교차로를 돌아 왼쪽 오른쪽 후사경을 확인한 후 앞을 보자 어떤 남자의 머리가 보였고 충돌 직전이었다고 진술했다. 당시 속도는 20마일 정도였다고 하며 순식간의 일이라 브레이크를 밟을 수도 없었다고 진술했다.

▲ 유가족이 입수한 사고 차량 등록증. 모델명이 000으로 표기돼 있고, 배기량 표시 없고, 엔진번호가 없고, 차량 등록일이 제조일 보다 빠르다.
ⓒ 박성진
그런데 그가 운전했다는 버스가 이상하다. 유가족이 입수한 버스 차량등록증에 따르면, 제조도 안 된 버스가 운행을 했던 것으로 나온다. 제조일은 1982년 12월 31일인데 차량등록일 1982년 8월 1일인 것. 또 차체번호도 일반 자동차 등록증과 다른 형식일 뿐더러, 주요 항목인 엔진번호도 없고, 모델번호도 '000'이라고만 되어있다. 유가족은 그 버스를 볼 수도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유가족 이영호씨는 정말 그 사고 버스가 있기는 건지 의심스럽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2001년 7월 경, 모 방송사 취재진과 버스 회사를 방문했던 이영호씨는 버스와 운전자에 대해서 관계자에게 질문했으나 그 관계자는 "그런 운전사는 모른다"며 빨리 나가 달라고 독촉했다.

운전자가 스스로 사고를 냈다고 시인하는데도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버스를 볼 수도 없고, 그나마 있는 차량등록증도 엉터리인데 운전사의 진술이나 운전사 자체가 허구가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느냐는 것.

▲ 경운군의 의료 기록에 나와 있는 의사명 '추아'. 경운군의 사망을 확인한 의사로, 특이한 점은 유가족이 직접 만나 경운군의 마지막 상태가 어떠했는지 문의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수소문해도 이 의사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캔터베리 병원 닥터 추아라는 의사 이름으로 발행한 의료서류에 따르면, 앰뷸런스가 발견, 버스에 역과된 것으로 알려짐, 의식 불명상태로 들어옴, 엉덩이에 타이어 자국이 보임 등이 기록돼 있다.
ⓒ 박성진
3. 앰뷸런스는 어떻게 현장에 왔나 … 사망심의회 결과에 따르면, 경운군은 앰뷸런스에 실려 켄트 앤 캔터베리 병원(이하 캔터베리 병원)으로 왔고, 닥터 추아에 의해 사망이 공식적으로 확인됐다. 사망심의회 요약본에서도 기록된 바와 같이 경운군은 병원 도착 당시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앰뷸런스에 탔던 응급치료사 클라크도 사인심의회 진술에서 경운군의 맥박과 호흡이 모두 정지 상태였다며 이미 숨진 것으로 짐작했다고 진술했다.

교통사고가 났다면, 일반적인 순서는 앰뷸런스가 와서 피해자를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이다. 이경운군 역시 앰뷸런스에 의해 캔터베리 병원으로 후송됐다. 이때 앰뷸런스에 남아있는 기록은 경운군의 발견 당시 상황을 전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유가족이 켄트 앰뷸런스협회를 통해 입수한 앰뷸런스 환자보고서는 경운군의 사망에 관한 첫 공식 문서다.

▲ 앰뷸런스 기록인 환자 보고서. ① 이경운 신원 관련 부분. 이름, 주소 등은 없지만 국적만큼은 명확히 기재돼 있다. ② 15시54분 신고 접수하여 이동. 15시55분 현장 도착으로 기록돼 있다. 신고를 접수하고 현장으로 이동했다는 것인데, 실제로 인퀘스트 증언에서나 병원에 응급 후송된 뒤 의료 차트에는 모두 우연히 주변을 지나다가 발견할 것으로 나타난다.
③과④ 호출 신호가 동일 문서 안에 서로 다르다. 사진 상단의 ③은 'X13', 하단의 ④는 'I13'으로 적혀 있다.('I13' 위아래 직선 흔적은 유가족이 형광펜으로 표시한 부분이며 서류 내용과는 상관없다.)
ⓒ 박성진
그런데 경운군을 다룬 앰뷸런스 환자 보고서 내용이 이상했다. 당시 앰뷸런스 의료진이었던 클라크의 사망심의회 진술에 따르면, 앰뷸런스가 사고 현장에 온 것은 응급 신고 때문이 아니라 주변을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경운을 응급 처치한 앰뷸런스 환자보고서에 보면 앰뷸런스는 신고를 받고 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것도 신고접수 1분 만에 현장에 도착했다. 사망심의회에서 버스 운전사도 신고했다고 증언했으며, 증인 중 홀이라는 여성도 자신의 전화기를 현장 주변 한 남성에게 빌려줘 신고했다고 증언했다. 또, 경운군을 병원으로 후송한 앰뷸런스는 한 대 뿐인데 앰뷸런스 호출 신호(Call Sign)는 한 문서 내에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이경운을 후송한 앰뷸런스의 환자보고서에 따르면, '이경운'이라는 이름, 주소 등은 나타나있지 않고 단지 '외국인 방문자(관광객)? Foreign Visitor?'이라고 쓰여 있는데 국적은 '한국인(Korean)'이라고 명확하게 적혀있다. 이름도 주소도 아무 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인'이라는 국적은 어떻게 정확히 짚어 낼 수 있었을까.

만족할 수 없는 증거들… 유가족은 경운군의 교통사고 순간을 목격한 목격자가 6명이나 있고, 증인은 35명에 이르며, 사고 운전사가 스스로 경운군을 치였다고 증언했는데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통사고가 성립되기 위한 불변의 증거들, 즉 사고 피해자, 사고 현장, 사고 버스의 문제가 모두 유가족에게 투명하게 공개되며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경운 사인심의회 요약본(사본) 중 이경운을 병원으로 후송한 앰뷸런스에 탑승했던 의료진 중 한 명인 클라크가 사망심의회에서 진술한 내용 중 일부.
위 진술에 따르면, 앰뷸런스는 신고를 받고 현장에 온 것이 아니라, 근처에서 운행하던 중 우연히 이경운을 발견한 것으로(I attended the scene when I came across it. As we drove we could see a young man...) 이해될 수 있는 맥락이 담겨 있다.
ⓒ 박성진
경운군의 시신은 유가족을 피해 숨바꼭질을 거듭했고, 검시관법에 따라 부검을 했다고 하지만 경운군의 시신 사진에는 정상적인 부검 흔적을 볼 수 없다는 게 현재까지 경운군 시신 사진을 관찰한 전문가들의 소견이다.

사고 현장의 경우 약속보다 열흘이나 늦게 유가족을 사고 현장으로 인도한 경찰은 (앰뷸런스 환자기록서에는 경찰이 현장에 있었다고 표시돼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현장을 번복한다. 사고도면에는 경운군의 위치도 표시돼 있지 않다. 사고 버스는 유가족이 한 번도 본 적 없고, 등록일이 제조일보다 빨라 만들기도 전에 도로 위를 활보했던 일종의 유령 버스와도 같다.

이경운군을 편히 잠들 수 있게 하려면

그렇다면 2000년 9월29일에는 실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제까지 나온 증거들을 종합 판단 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영국당국이 말하는 대로 이경운 군이 일반 역과교통사고로 사망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이 전제가 사실일 경우, 영국 관계당국의 사고처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허술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의 해명이 필요하다. 또 시신 확인 및 부검 마찰 등에 대한 의혹도 해명돼야 한다. 무엇보다도, 단순 명료하게 처리할 수 있었던 일반 교통사고 건을 그 수많은 오류와 의문을 흉측한 모양으로 만들어 내며 유가족을 6년 넘도록 극한의 고통 속으로 내몬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둘째, 이경운군이 어떤 이유로든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상태에서 최종적으로 교통사고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됐거나 다른 원인으로 사망한 것을 교통사고로 위장했을 가능성이다. 통상적인 일반 교통사고와 달린 사고처리과정 번복, 허술한 사고관련 서류, 유가족에 의한 시신확인 지연, 부검의혹 등을 고려했을 때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셋째, 일반교통사고 후에 병원에서 사망했을 가능성(의료과실 등)이나 일반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시신훼손이 이뤄졌을 가능성이다. 실제 유가족에게 이미 사건 초반기에, "1차 부검을 하지 않은 의혹이 짙은데도 영국당국이 부검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장기적출을 의심해 볼만한 부분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한 의료 관계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가족 이영호씨는 "그런 건 부검을 하면 다 나오지 않겠나, 섣불리 추측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위와 같은 경우의 수는 그 어떤 것도 '확증'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닌 '추정' 상태일 뿐이다.

▲ 이경운 군 생전 모습(대학 입학전 런던 관광 중)
ⓒ 이경운참진회
오늘 영국 현지시각으로 오전 8시부터(한국시간 오후6시) 마게이트에 있는 여왕 모후 병원에서 한국 국과수에 의한 부검이 실시된다. 이번 부검은 김윤신 박사를 주축으로 한 국과수 부검단이 집도하고, 서울법의학연구소장 한길로 박사, 영국 최고의 부검의 중 한명으로 꼽히는 리처드 셰퍼드가 공동 참관한다.

이번 부검에서 어떤 결론이 나올지, 또 모든 의혹이 밝혀질 수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결론이 나오든 간에 사건처리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한 의혹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게 유가족의 입장이다. 아래는 부검을 앞둔 유가족 이영호씨의 말이다.

"진정한 교통사고일 경우 3가지 증거 즉 '현장', '차량', '피해자'가 있으며 이 증거 하나하나를 철저하게 조사, 분석, 검토한 후 그 3가지 '증거'가 서로 일맥상통하여야 한다. 하나라도 의혹이 있을시 사건은 모두 원점에서부터 재조사해야 하는 게 아니냐. 이번 부검단을 통해 그 증거 중 하나인 '피해자'에 대한 부검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이번 부검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가. 경운군이 어떤 죽음을 맞이했든 진실 규명만이 경운군을 온전히 잠들게 할 것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