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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환자의 생사를 둘러싼 영국 법원의 명령철회 한 건이 영국 사회에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영국 법원과 병원, 그리고 환자의 부모 간에 1년 여간 진행된 한 환자의 생사 논쟁은 지난 21일, 영국 법원이 "환자가 숨을 쉬지 않게 되면 병원 측은 소생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기존 결정을 철회함으로써 일단락 된 상태다. 일명 '샬럿 와이어트 사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그 환자가 신생아라는 점 때문에 더 화제가 됐다.

칠삭둥이 미숙아의 운명

▲ 샬럿이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을 보도하는 <가디언> 10월 21일자 기사.
샬럿 와이어트. 지난 21일로 만 두 돌이 된 여아. 2003년 10월 21일 영국 포츠머스 지방의 한 NHS(국가의료보건제도) 병원에서 태어난 샬럿은 예정보다 3개월 먼저 세상에 나온 미숙아였다. 태어날 당시 이 아이의 몸무게는 458그램이었으며, 신장과 폐, 심장에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특별한 병명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을 뿐. 샬럿은 다른 아이들이 엄마의 품에 안겨 젖을 빨고 있을 때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병원을 통해서만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다.

샬럿은 태어난 뒤 한번도 병원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첫 3개월은 산소공급을 받으면서 병원의 인큐베이터에서 살았으며, 생후 9개월까지는 병원 내 특수격리 시설 안에서 산소공급을 받아야 했다. 2004년 7월, 상태가 약간 호전되면서 어린이 병동으로 옮겨졌으나 폐감염 증세를 보이면서 상황이 다시 안 좋아졌다.

그간 샬럿은 산소 공급 응급처치를 수차례 받아야 했다. 게다가 계속되는 산소부족 증세로 뇌에 상당한 손상을 입었으며 시각과 청각도 모두 잃은 상태다. 신장, 폐, 심장에도 이상이 있으며, 오직 급식관을 통해서만 영양공급이 가능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기를 1년여. 어렵게 이어오던 샬럿의 목숨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생후 1년가량이 지나도록 샬럿의 상태가 호전기미를 보이지 않자, 병원 측이 '소생 노력 불가'라는 특단의 결정을 내린 것. 결국 병원 측과 샬럿의 부모는 샬럿의 운명을 두고 실랑이를 시작했으며, 샬럿의 생사는 영국 전역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청천벽력 같았던 법원 명령

2004년 가을, 병원 측은 3번째 산소공급 응급처치 후 샬럿이 치료를 받고 생명을 계속 연장해도 건강해질 가능성은 없으며 계속 산다고 해도 고통 말고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만일 샬럿이 숨쉬지 않게 될 경우가 오면, 소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샬럿의 각종 의료처치는 영국의 국가의료제도에 따라 무상으로 행해져왔다.

샬럿의 부모 데런과 데비는 즉각 병원의 결정에 불복했다. 이어 법원에 이 문제를 호소했다. 그러나 2004년 10월, 법원이 내린 판결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병원의 입장을 받아들인 것. 당시 재판을 담당했던 헤들리 경의 소견은 이랬다. "나 스스로에게 질문해봤다. 샬럿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일까. 샬럿이 자신의 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이 결정은 지금 당장에만 적용된다."

샬럿의 부모는 법원의 결정에 다시 불복하고, 법원에 재심을 촉구했다. 부모 된 입장에서 결코 아이를 죽일 수 없었던 것.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인들도 법원 결정에 대한 찬반으로 나뉘었다.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라는 의견과 "영국에서 안락사는 불법이므로 이 결정은 명백히 잘못되었다"라는 등의 반대의견이 교차됐다.

샬럿은 영국판 테리 시아보?

▲ 살럿 와이어트 웹 사이트 포토갤러리 면에 올려져 있는 샬럿과 샬럿의 엄마 사진.
일부 영국인들은 샬럿의 상황을 두고 얼마 전 미국에서 논란이 됐던 식물인간 테리 시아보의 영국판이라고 말한다.

15년간 식물인간 상태로 급식관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해온 테리 시아보(미 플로리다)의 안락사 문제를 놓고 미국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 바 있다. 안락사에 찬성하는 시아보의 남편과 반대하는 시아보의 부모 간에 지루한 공방이 계속됐으며, 일부 정치인들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조명을 받았던 이 사건은 지난 3월, 테리 시아보의 급식관이 제거돼 13일 만에 42세의 나이로 시아보가 사망함으로써 끝을 맺었다.

그러나 사실 샬럿의 경우를 안락사 문제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식물인간 상태에서 병원이 '인위적으로 급식관을 제거해 사망에 이르게 한' 테리 시아보의 경우와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환자가 자연적으로 숨을 멈추어 사망할 경우 소생시키지 않는다'는 샬럿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 게다가 소생의 노력을 한다고 해서 샬럿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는 게 판단을 더 어렵게 만드는 부분이다.

법원 측은 샬럿의 문제를 안락사 문제로 보지 않았지만, 영국인들 상당수는 "환자가 자연적으로 사망했다고 하더라도 인위적으로 소생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안락사와 다를 바 없지 않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하지만 2005년 2월, 샬럿의 부모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법원이 샬럿 부모의 호소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 법원은 "샬럿의 상태가 굉장히 많이 호전되지 않는 한, 현 상태에서는 병원의 결정을 존중하는 것이 최선"이라며 기존의 명령 내용을 번복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 사건은 다시 영국인들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 온라인 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제작된 샬럿 와이어트 웹 사이트. "나를 포기하지 마세요"라는 부제가 눈에 띈다.
마침내 법원명령은 철회됐지만

샬럿의 부모는 또다시 재심을 청구했다. 샬럿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증거들도 법원에 더 많이 제공됐다.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의 의료윤리학자인 다니엘 소콜 교수는 "의사는 어떤 경우에라도 환자에게 최대의 관심을 보여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안락사 문제 여부를 떠나 병원은 환자를 소생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 또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NHS 당국이 돈을 절약하기 위해 그러는 것 아니냐"는 거센 비판이 일었다.

10월 21일, 결국 영국 법원은 '샬럿이 숨을 쉬지 않게 될 경우가 오더라도 병원은 소생 노력을 하지 않는다"라는 기존의 명령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원래 예정보다 10여일 정도 늦게 나왔다. 샬럿의 두 돌 생일 선물이 된 셈이다.

▲ BBC 뉴스 인터넷판 21일자 기사. 샬럿이 많이 호전되었으므로 명령철회는 당연하지만, 여전히 마찰의 가능성은 있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샬럿의 부모는 법원의 명령 철회에 대해 상당히 만족을 표시하고 있다. 샬럿 살리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자신들의 웹 사이트에 "생일을 축하한다, 샬럿. 어두운 그림자가 그동안 드리워져 있었지만 이제 사라졌단다. 너도 이제 영국의 다른 아이들처럼 살 권리가 생겼단다"라는 글을 올리며 자축하고 있다.

그러나 <비비시(BBC) 뉴스> 인터넷 판 21일자는 "현 상황은 샬럿의 부모가 완전히 승리한 상황이 아니라 단순히 샬럿에게 법원의 명령이 미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보도했다. 다른 환자들과 똑같이 대우를 받게 된 것을 의미할 뿐이며, 차후 병원 측과의 마찰도 충분히 다시 생길 수 있다고 염려했다.

현재 샬럿의 건강 상태는 처음 출생 당시에 비해서는 훨씬 좋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시각, 청각, 뇌 손상 등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를 바꿀 수는 없다고 해도 샬럿의 목숨을 건 내기는 중단됐다. 한편, 병원 측은 샬럿이 퇴원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있다. 샬럿 가족의 본격적인 투쟁은 이제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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